《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출간한 백영옥 작가

현재의 삶이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뉴스가 성공에 주목한다면, 문학은 실패에 주목한다. 성공담은 드물지만, 실패담은 흔하다. 문학이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면 누구든 그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실패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없다. 소설가 백영옥 역시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왔다.

사진제공 : 백영옥, 스튜디오 지브리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든 사람은 평생 두 마리의 개를 키우며 산다고 한다. ‘선입견’과 ‘편견’이다. ‘빨강머리 앤’은 이 두 마리의 개에 가장 많이 물렸으면서 결코 이 두 마리의 강아지를 분양받지 않은 소녀다. 주근깨 많은 얼굴에 어디서든 눈에 띄는 빨강머리, 거기다 빼빼 마른 앤은 어릴 적에 부모를 잃는다. 가까스로 입양된 집에서도 ‘남자아이인 줄 알고 입양했다가 잘못 온’ 불청객이다. 그럼에도 앤은 인생을 원망하거나 운명을 한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내 속엔 여러 가지 앤이 들어 있나 봐요. 난 왜 이렇게 골치 아픈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가끔은 들기도 해요. 내가 한결같은 앤이라면 훨씬 더 편하겠지만 재미는 절반밖에 안 될 거예요.”

이 소녀는 인생을 무방비 상태로 사랑한다. 어른이 된 뒤 앤을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건, 그 말랑말랑한 심장을 다시 갖기 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백영옥은 자신을 ‘상처 수집가’ ‘눈빛 탐험가’라고 소개한다. 그런 그에게 앤은 많은 상처를 입고도, 상처받은 눈빛을 갖지 않은 보물 같은 존재다. 그가 최근 한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아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라는 책을 냈다.

“보통 한 권의 책이 나오면 참 힘들어요. 쓰는 동안 수도 없이 고치고 또 고치고를 반복하기 때문에 책이 되어 나왔을 때는 거의 탈진 상태죠. 이번 책은 달랐어요. 제가 제 책을 보고 힘들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책이에요.”

소설을 쓸 때 그는 조금 더 팽팽하다. 산문을 쓸 때는 조금은 여유롭다. 특히 ‘빨강머리 앤’에 대한 글을 쓸 때는 그도 쓰면서 위로와 구원을 얻었다. 어릴 적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노래 한 번 부르지 않고 자란 이 없겠지만, 그가 앤과 좀 더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건 어른이 된 후다. 책에 따르면 그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년 전 봄, 지친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인간관계에 실패했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에서 멀어졌고,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 때 그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50부작을 봤다. 만화 속에서 앤이 말했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요?”


어른이 된 뒤 보이는 것들


《빨강머리 앤》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곳에 밑줄을 긋게 된다. 그는 앤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삶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백영옥 작가는 네 가지의 직업을 지나왔다. 처음엔 광고회사 AE였고, 서점 직원과 잡지사 에디터로도 조직에 몸담았다. 이 긴 여정에서 한 번도 놓지 않은 게 소설 쓰기다. 2006년 《고양이 샨티》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2008년 《스타일》로 세계일보 문학상을 받으면서 전업 작가가 되었다.

“제가 굉장히 소심한 사람인데도, 대범한 결정을 한 경우가 있어요. 직장을 옮길 때나, 직업을 바꿀 때가 그랬어요. 문득 먼 여행을 떠난 적도 있고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컸어요. 한때는 ‘일중독’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는데, 새로움을 향한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밤새워 야근을 하면서도 소설을 썼다. 그에게 전업작가가 되는 길은 어느 날 찾아온 행운이 아니라 10년을 두드려 열린 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발레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글을 쓴다.

“제 인생에 아주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을 때 글을 많이 썼어요. 6~7개씩 고정 연재를 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하나만 삐끗해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늘 긴장했어요. 그 시간이 있어서 어려운 순간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 어려움이 극복된 건 아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또 하나 달라진 점은, 앤을 양육하는 마닐라에 대한 시선이다. 예전에는 이 책이 앤의 성장기로 읽혔다. 지금은 마닐라의 육아일기로도 읽힌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마닐라가 천방지축 앤을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앤이 지금 학교를 다녔다면 ‘ADHD 진단’을 받았을지도 몰라요(웃음). 굉장히 말이 많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잖아요? 처음엔 마닐라가 모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이해가 되더라고요. 더구나 마닐라는 자신이 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에요. 잘못을 했을 때는 사과할 줄도 알고요.”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이 이해되기 시작하면 어른이 된 것이라고 하는데, 《빨강머리 앤》의 마닐라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늦은 때는 없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마닐라의 엄마수업’.
백영옥 작가는 요즘 발레를 배운다. 시작한 지 3년 정도 됐다. 발레는 통증의 춤이다. 근육통이 없다면 발레를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땀을 흘리고 연습한 시간이 쌓이면 비로소 완전해지는 동작이 있다. 그럴 때 그는 삶의 희열을 느낀다.

“아사다 마오는 트리플 악셀이 어려운 줄 알면서도 늘 도전하잖아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요. 스케이터 이규혁 선수는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결국 메달을 따지 못했어요. 저는 그런 풍경에 눈이 가요. 인간은 성공을 위해 끝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실패를 통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요.”

그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 드라마틱한 성공담이나 성장신화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숱한 실패담이다. 누구나 거창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이유는 없다. 백영옥 작가는 인터뷰 칼럼을 진행하다 만난 프로파일러 권일용 경감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그는 “특별한 소명의식 때문에 프로파일러가 된 게 아니라,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잘하게 되었다. 어쩌면 직업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성실함이 그의 직업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었다. 현재가 과거를 바꾼 셈이다. 백영옥 작가 역시 현재 우리의 삶이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과거의 의미는 현재의 해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를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라고 정한 건 그래서예요. 인생이 단 한 번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다고 적었는데요. 앤은 어린 나이에도 이미 그런 인생을 살아요. 물론 작가인 루시 몽고메리의 힘이겠지만요(웃음).”
  • 2016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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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박소연   ( 2016-09-05 ) 찬성 : 35 반대 : 34
사과꽃길 아련한 상상 기쁨이었는데
 기쁨의하얀길 을 돌려주세요.
 검은색채를 많이써서 깜짝이야~놀라움의길이됐어요.
 ㅠㅠㅠ~너무 어두워 혼란스럽고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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