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모르는 세상

글 : 박정민 

작품을 하다보면, 평소에 쓰지 않는 말을 해야 할 때가 더러 있다. 예를 들어 사극인데 스릴러물이고 거기에 의학용어가 나오더니 심지어 법률용어까지 나온다면 대사의 대부분은 한 번도 뱉어보지 않은 말일 가능성이 높다.

“짐이 검시장식을 보아하니 혜민서에서 디피브릴레이터를 올바르지 않게 사용한 것 같소. 이는 의료법 7조 1항에 위배되는 행위요. 담당의관을 데려오시오.”
“줄행랑을 쳤다 하옵니다.”
“예끼 고얀 놈. 김 형사 출동하시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거 보니까 의사가 잘못한 거 같은데. 이거 불법인데 이거. 그 새끼 데려와봐.”
“토꼈답니다.”
“ㄱㅅㄲ.”
“…”
“뭐하고 섰어. 가서 잡아와 이 새끼야.”


이 정도면. 아니, 사실 이 정도여도 평소에 쓰는 말은 아니다.(‘ㄱㅅㄲ’ 정도만 자주 쓰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체를 본다거나, 누군가에게 누군가를 잡아오라고 명령한다거나 하는 일은 웬만하면 죽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모르는 세상이 많다. 이 글을 읽는 당신들의 세상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정작 가장 가까운 사이인 소화기를 만드는 내 친구 곽과, 소화기를 파는 남궁과의 대화 조차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 회사 때려치고싶다” 하는 그들의 넋두리도 사실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세상 보통의 넋두리라는 것을 이해한 다른 세상의 사람이 《미생》이라는 만화를 그려 세상 보통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냈고, 드라마로 재편집 되어 인기를 끌었고, 나는 거기 출연을 못 했다. 내 인생 두 번째로 큰 실수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때 YG 오디션 안 본 거. 세 번째는 지금 이 두 가지의 개소리를 한 거. 좌우지간,

모르는 세상이 참 많다.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카페 테라스에서 커피를 드시고 계신다. 그때 또 다른 백발의 할아버지가 그 앞을 지나간다. 무리 중 한 분이 그분에게 소리치신다. “야! 너 죽었다고 들었는데 아직 안 죽었네!?” 하신다. ‘!!!’ 하는 마음으로 지나가는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누가 그래. 허허” 하신다. 실화다. 5분 전에 바로 앞에서 일어난 어르신들의 이 짧은 대화도 나는 도저히 모르겠는 세상이다.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그런 세상과 맞닥뜨려 그 세상의 말과 행동들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이해를 해야 하고, 흉내를 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문득 그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느낄 때도 있다. 참 많이 모르고 살았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카메라 앞에서 흉내내고 있는 것은 그들의 실제에 비했을 때, 코딱지에 코가 있다면 그 코에 붙은 코딱지 수준이다. 모두들 참 열심히 살더라는 것이다. 군말 좀 하면 어떤가. 꿋꿋하게 계속 해나가는 그들이 전부 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또 제 역할을 못하면 좀 어떤가. 그들에게는 그렇게 힘들고 버티고 이겨낼 권리가 있는데 말이다. 개똥도 똥파리의 식량이고, 암세포도 생명이 있는데… 인생의 네 번째 실수를 저질렀… 1글 4실수. 실수류 갑.

모르는 것에 대한 태도가 중요한 시대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뭘 모르는 소리가 됐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기도 하고, 땐 굴뚝에 연기가 아니 나기도 하고, 그 연기들이 어디까지 피워 나갈지 알 수 없는 시대다. (갑자기 막 속담 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복싱 선수는 경기에 올라가기 위해 몇 달 동안 수십만 번의 펀치질로 담금질을 한다. 손과 발이 터져가면서 샌드백을 친다. 그렇게 기어코 링 위에 서게 되고, 그는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피를 흘리며 상대방과 주먹을 나눈다. 우리는 그가 복싱을 왜 하는지, 그래서 뭘 얻는지, 뭘 얻기는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자기 꿈을 위해서 자기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다. 난 그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알지만(사실 그조차도 상상이 안 된다.) 그들의 마음까지는 모른다. 그저 응원할 뿐이다. 그들의 꿈과 선택에 있어 왈가왈부할 권리 같은 건 나에게 없다. 과거에 어떤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들을 만났을 때, 나는 절대 그들에게 왜 이런 걸 하느냐고 따지지 않기로 했다.

모르는 세상이 참 많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다른 직원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시는지, 내 친구가 소화기를 만들면서 무슨 말을 쓰는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각자의 세상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평생 알 수 없을 수도 있을 테다. 그저 응원할 뿐이다. 잘 모르니까, 당신들이 어떤 실수를 하는지도 나는 잘 모를 것이다. 모르니까, 닥치고 응원하겠다.

*훗날 본인이 빼어난 미남인데 육감까지 좋아서 세상의 비리를 알게 되고, 그 와중에 세계적인 여배우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자를 포기하고, 숨 막히는 총격전을 마치고 사건을 해결한 뒤 그녀에게 돌아가 “내가 조금 늦었지?” 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 그 세상을 잘 아는 사람은 본인에게 이메일 좀 보내주길 부탁한다.

박정민은 영화 〈동주〉 〈순정〉 〈오피스〉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G코드의 탈출〉 〈키사라기 미키짱〉,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6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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