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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힘, 고향

한국화가 김선두

“낮의 맑은 하늘에도 별은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빛이 가려 보이지 않는 별들이 마치 현상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본질처럼 여겨졌습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별들을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6월 4일부터 7월 3일까지 한 달간 학고재 상하이에서 열린 김선두 화가(중앙대 한국화과 교수)의 개인전 <별을 보여드립니다>에 나온 작품들은 환한 낮과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한 화면에 담고 있다. 시멘트 벽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맨드라미, 장독대 사이에 놓인 선인장, 텃밭 채소, ‘열심이 살자, 안되면 되계하라’고 맞춤법도 맞지 않는 다짐이 쓰여 있는 리어카 등 낮의 풍경은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일상과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반면 꽃 같은 별들로 가득 메워진 밤하늘은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염원, 꿈과 이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검푸른 하늘뿐 아니라 빨간색, 노란색 하늘에도 별이 빛난다. 별이 가득한 하늘 때문에 일상이 빛나고, 질긴 생명력을 지닌 일상 때문에 별이 더 빛난다.


한국화를 현대화하는 작업에 몰두

별을 보여드립니다 - 오금동, 장지에 먹 분채, 144x98cm, 2016
“현실에서 꿈을 이루기란 사실상 어렵죠.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별도 사실 실체가 없을 수 있어요. 수억 광년 떨어진 별빛이라 지금 그 별은 사라졌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별이 없는 하늘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별은 어둠의 벽에 뚫린 작은 숨구멍이자 창이 아닐까요?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꿈은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기에 결국은 허망합니다. 그래도 꿈을 좇는 과정 자체가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삶의 에너지이니까요.”

중국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그를 젊은 작가, 심지어 젊은 여성 작가로 생각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추구하고 탐구하고 실험하는 젊은 작가정신을 유지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작가 작업실을 찾았더니 바탕색을 칠해놓은 장지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30겹에서 50겹, 60겹씩 분채로 반복해서 칠했다고 한다. 여러 겹으로 물들여 자아내는 색은 한층 깊었다. 그는 그 위에 자유분방한 선과 형태를 그려 넣는다.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사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천진하다. 사실은 힘을 빼고 이렇게 그리는 게 더 어렵다고 한다. 한국화를 우리 시대에 맞게 현대화하는 작업에 천착해온 그는 수묵화와 채색화를 접목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남도 - 꽃생각, 장지에 먹 분채, 142x74cm, 1996
“수묵화의 밀도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완성됩니다. 한 번에 휙 그린 것 같지만, 제대로 된 선을 끌어내기 위해선 그 전에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잘못 그렸다 해서 물감으로 덮어 수정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는 중앙대 한국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1984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젊은이들의 초상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지친 표정으로 지하철에 앉아 있는 남자, 서커스 곡예사 등 우리 사회 언저리에 있는 인물들을 그렸다. 그 후 연작으로 그린 <남도> <그리운 잡풀들> <느린 풍경>과 최근의 <꿈을 보여드립니다>까지 그의 이런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별을 보여드립니다 - 파주, 장지에 먹 분채, 98x144cm, 2016
그는 산 높고 물 깊은 화려하고 웅장한 풍경을 그리지 않는다. 야산과 논밭,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지는 우리 일상 그리고 정서와 밀착되어 있는 풍경을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는 전통적인 원근법이 완전히 무시된다. 여러 시점(視點)에서 본 모습을 합쳐놓은 듯 혹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풍경이다. 그의 그림을 접하면 위에서 아래로 읽어 내려가게 된다. 바다와 맞닿은 길이 있고, 솔밭이 있고, 논밭이 있고, 언덕에 나무들이 서 있는 그의 고향 길을 마음속으로 따라 걷게 된다. 그의 마음속 풍경, 마음속 지도이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유장한 남도가락 같기도 하고, 우리 인생살이 같기도 하다.

“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전남 장흥의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논과 밭, 야산이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서울 광화문의 정남쪽이라고 해서 정남진이라고 불렸죠.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고향을 떠나시는 바람에 조부모님 밑에서 자유롭게 지냈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었죠. 냇가와 바닷가에서 피라미, 붕어, 미꾸라지, 게, 소라, 고둥, 망둥이를 잡으며 마음껏 뛰놀았습니다. 4남매 중 제가 제일 개구쟁이였고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풀을 베어 오라고 시키면 실컷 놀다 빈 꼴망태로 돌아오기 일쑤였으니까요. 할아버지 할머니라 너그러우셔서 제 맘대로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슴아슴합니다.”

큰산, 장지에 먹, 60x90cm, 2005
그의 부친인 소천(小川) 김천두 선생은 시-서-화(詩-書-畵)를 모두 갖춘 문인화가로 꼽힌다. 한학을 공부한 후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 남농 허건, 의재 허백련, 월전 장우성 선생에게 수학하고 한국화가로 활동해왔다. 부친은 그에게 언제나 ‘큰 산’ 같은 존재라고 한다. 함께 살지 않던 어린 시절에도 고향 어른들이 “네가 소천 아들이냐?”고 묻고는 달리 대했기에 항상 아버지의 그늘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올라온 후 그는 한동안 뿌리내리지 못하고 방황했다고 한다. “이제 서울에서 지낸 시간이 훨씬 길어졌지만, 서울 생활에 지칠 때면 고향 생각을 하면서 위로받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늘 꿈꾸던 그 고향은 아니죠. 땅은 그대로라도 사람은 거의 다 떠나고 없으니까요. 서울의 변두리 풍경을 보면서 어수선한 내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별을 보여드립니다>가 이렇게 어수선한 내면을 지닌 사람이 변두리에서 꾸는 꿈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는 소설가 이청준과의 인연,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의 그림 그리는 모습 대역으로도 유명하다. 동향 선배인 이청준 작가와의 인연은 1985년 이청준 작가의 글에 그가 그림을 그려 한국전래동화 책을 내면서 시작됐다. 이후 자주 함께 고향을 찾고, 여러 차례 공동작업을 하면서 오랜 인연을 이어갔다. 이청준 선생은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 작가라 할 수 없다”면서 고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다. 그는 이청준 선생이 그려준 문학 지도를 들고 소설 무대를 하나하나 답사하면서 그 땅을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까지 그림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스스로 ‘직진 차선 위의 일벌레’라고 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돌아갈 고향이 있었다. 미술계에 데뷔한 지 20년이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 그는 <느린 풍경> 연작을 시작하면서 다시 고향을 그렸다. “백남준 선생이 작가는 게을러야 한다고 했는데, 너무 바쁘게만 살아오지 않았는가. 삶에 여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그에게 고향은 그저 아련한 향수를 일으키는 존재만이 아니다. 지금 이 현실을 살게 하고 버티게 하는 건강한 생명력과 에너지를 주는 곳이다. 그의 그림 덕분에 우리도 그런 고향을 나눠 가진 듯하다.
  • 2016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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