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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탄 열매처럼 툭 떨어진 태양 아래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기성 〈포옹〉

비가 수천의 하얀 팔을 뻗어
너를 안는다
흰 도화지 같은 공중에
너의 입을 예쁘게 그려줄게
주르륵 녹아 흐르는 입을 다시 그려줄게
똑같은 노래를 반복하는 파란 입술 그려줄게

비의 하얀 팔들은 어디로 가서
낯선 얼굴 어루만지는지, 어디로 날아가
검고 차가운 목덜미를 감싸며 흩어지는지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있고
아직 따뜻하고 고요한 뺨이 있다는 듯
주황색 포클레인이 우뚝 멈춰 있다
부서진 옥상 위
아이의 슬리퍼가 고요히 젖고 있다

비의 팔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가는지
퍼붓는 빗속에서 아이는
하염없이 입을 벌리고 걸어간다

이기성 시집 《채식주의자의 식탁》, 문학과지성사, 2015


처음 나는 〈포옹〉을 사랑의 시로 읽었다.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삶을 약동으로 이끌고 메마른 마음에 기쁨과 행복이 넘치게 한다. 사랑은 타자를 끌어들여 외로움을 해소하고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정념이 추동하는 개체화의 원리다. 사랑에 빠진 자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의미로 충만해서 찬란해 보이지만 그 마음에 항상 희열이 넘치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은 영혼이 교란되고 마음의 혼란과 위기를 겪는 존재 사건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수시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비가 수천의 하얀 팔을 뻗어 ‘너’를 끌어안는데, 물론 이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왜 그럴까? 끌어안은 것은 ‘너’라는 타자다. 그러나 시인은 그 ‘너’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너’는 입도 없고, 당연히 노래하는 입술도 없다. 시인은 ‘너’에게 입을 예쁘게 그려줄게라고 약속한다. 똑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는 파란 입술을 그려줄게 약속한다. 비의 하얀 팔들은 공중을 날아다닌다. 날아다니다 보면 이 사람의 얼굴도 만지고, 저 사람의 목덜미도 만지게 될 것이다. 그 얼굴은 “낯선 얼굴”일 것이고, 그 목덜미는 “검고 차가운 목덜미”일 것이다.

먼저 ‘너’라는 타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시인은 이 ‘너’를 특정하지 않는다. 이 ‘너’는 누구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너’는 시인이 마음에 품고 있는 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너’는 ‘나’의 저편에 있는 대자적 존재다. ‘너’는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무슨 일인가를 하며 살아갈 것이다. 시인이 이 ‘너’를 특정하지 않은 것은 그가 멀리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너’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혹은 어디에서 무얼 하며 떠돌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너’는 ‘나’의 지각영역 바깥에 존재한다. 따라서 “수천의 하얀 팔을 뻗”는 비가 어디로 가서, 어디로 날아가서 얼굴을 만지고, 목덜미를 쓰다듬고, 그 누군가를 포옹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여기에 없는 ‘너’가 헤어진 연인이라면 ‘나’는 마음이 허전하거나 슬프거나 쓸쓸할 것이다. 한때 사랑했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너’는 없다. 비에서 연상한 “하얀 팔”로 누군가를 포옹하는 상상은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 상상의 바탕은 허전하고 슬프고 쓸쓸한 마음이다. 지금 여기 없는 ‘너’를 끌어안는 이 포옹은 환대의 행위이고, 사랑의 표현 중 하나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이 포옹으로 인해 마음은 고적할 것이다.

시인의 눈길은 멈춘 “주황색 포클레인”을 주목하는데, 비와 선명한 색채의 포클레인은 실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그것은 고적한 시인의 마음에 조응하는 객관적 상관물인지도 모른다. “주황색 포클레인”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은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있고/아직 따뜻하고 고요한 뺨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 따뜻한 뺨에 뺨을 맞대고 부비고 싶은데, 그 대상은 여기에 없다. 시인이 부서진 옥상 위와 젖고 있는 아이의 슬리퍼를 보여줄 때, 이 쓸쓸한 풍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에 젖어가는 아이의 슬리퍼는 지금 여기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포옹의 대상이 연인이 아니라 ‘아이’였단 말인가? ‘아이’는 퍼붓는 빗속에서 입을 벌리고 하염없이 걸어간다. 이 시는 ‘아이’를 잃은 자의 마음을 노래한 시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 시를 잘못 읽었다. 상실과 부재가 낳은 슬픔을 머금은 이 시는 연인을 잃은 자의 마음이 아니라 ‘아이’를 잃은 자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아이는 “작고 부드러운 시간을 키”우고, “울면서 희고 가볍고 공기처럼 투명”해진 바로 그 아이일까?(〈범람하다〉) 아이는 “빨간 얼굴로 / 울면서 태어”나, “종일 까만 눈으로 벽지를 뚫어지게 보”고, “흰 입술로 텅 빈 말을 중얼거렸”던 바로 그 아이, “영원히 자라지 못”한 그 아이일 것이다. 그 아이는 죽음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외투”를 입고 있는 아이다.(〈천호동〉) 아, 알겠다! 시인의 무의식적 상상 세계에는 한 아이, 죽어서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벌린 입은 “호스처럼 벌어진 목구멍 속으로 / 밤의 어두운 골목이 사라지고 / 노숙자의 커다란 발과 늙은 고양이가 사라”(〈합창〉)진 그 이상한 입구가 아닌가? 그 아이는 퍼붓는 빗속에서 입을 벌리고 걸어가고 있다. 세상에 없는 그 아이의 뺨을 미치도록 부비고, 그 작고 따뜻한 몸통을 미치도록 안고 싶다. 그 마음의 갈망이 뻗어나가 내리는 비에 “수천의 하얀 팔”을 주고, 그걸로 빗속에서 울며 어디론가 가는 가엾은 아이의 뺨을 비비고 목덜미를 끌어안으려는 안타까운 몸짓을 보여준다.

이기성 시인의 생각에 생이란 “어두운 장르”(〈크리스마스〉)다. 고작해야 “검게 탄 열매처럼 정오의 허공에서 툭 떨어진 태양”(〈스틸 라이프〉) 아래에서 “무뚝뚝한 흑백의 오늘”(〈오늘〉)을 살아내는 게 생이다. 생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내려놓은 자에게 허락된 시간이란 “횡단보도 옆에 쓰러진 자전거의 검은 체인이 / 홀로 몇 바퀴 더 돌다 / 멈출 때까지”(〈히치하이커〉)의 무의미한 정동(情動)의 찰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늙은이의 딸들은 “창가에서 하품을 하고 찻잔이 식어”갈 때 “하얗게 늙어”간다.(〈스틸 라이프〉) 시인은 생의 찰나들을 조용히 관조하면서 “재의 글씨를 쓰고”(〈스틸 라이프〉) 있는 것이리라.


이기성(1966~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마쳤다. 1998년 《문학과사회》에 시 〈지하도 입구에서〉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지금까지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등 시집 세 권을 펴냈다. 늘 세상에서 숨고 사라지려는 시인은, “밤의 심장에 고개를 처박고 창백한 고백을 몰래 만져”보는 이 내면성의 시인은, 오늘의 만찬에 초대되어 “번쩍이는 강철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광활한 모국의 식탁 위에서 덜덜 떨면서” 앉는다. 접시 위에는 “당신의 잘린 목”이 놓인다.(〈채식주의자〉) 이 식탁의 난감함은 실존의 부조리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주체의 의지와는 달리 육식의 식탁에 초대된 난감함이라니!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나’는 “당신의 존재를 덥석 베어 물고” “뜨거운 혀로 당신의 표면을 어루만지고” “날카로운 이빨로 차가운 뼈와 뼛속에 감춘 권태의 쓴맛을 찢어발”겨야만 한다.(〈채식주의자의 식탁〉) 이기성의 슬픔과 창백한 목소리의 시는 그런 배경 속에서 나온다.
  • 2016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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