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주메뉴

  • cover styory
  • focus
  • lifestyle
  • culture
  • human
  • community
    • 손글씨
    • 1등기업인물
    • 나도한마디
    • 기사제보
  • subscription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하오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이체 〈몸의 애인〉

잘못 온 편지를 읽고 운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의 거짓말들을 안다
사랑한 자의 심장을 꺼내본 뒤로는
백지에서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몸은 표현을 두려워한다

당신에게 나를 주어선 안 되겠구나
당신에게 나를 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나는 죽겠구나

부재가 되지 못한 존재

헤어진 애인과의 섹스에서
혐오가 무뎌질 때까지,
그 감촉의 비곗살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의 멀미를 잊으면 나는 사라질 수 있다

〈몸의 애인〉(이이체 시집 《인간이 버린 사랑》, 문학과지성사, 2016)


〈몸의 애인〉은 애인과 헤어진 뒤 쓴 시다. 사랑을 잃은 자는 겨우 살아남은 자다. 사랑을 잃고 겨우 살아남은 자는 “죄 없는 자들로부터 병든 삶을 옮아/나는 시든 꽃으로 만개한다”라는 절묘한 표현을 얻는다. 시든 꽃으로 만개한다니! 사랑은 자신의 보존과 안녕에 깊이 관여하지만, 사랑 때문에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사랑을 잃은 자는 죽지 못해 사는 삶, 즉 “병든 삶”을 산다. 그를 병들게 하는 것은 죄의식이다. 그 죄의식에서 “나는 직업이 죄인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푸른 손의 처녀들〉). 이것은 사랑의 실패에 대해 ‘내 탓이오!’라고 하는 자책의 다른 표현이다.

“잘못 온 편지를 읽고 운 적”이 있는 사랑, “사랑하는 자의 심장을 꺼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사랑의 갈 데까지 가본 사람이다. 사랑의 진실과 거짓을 다 겪어본 사람은 거기에서 나온 의심과 움츠림 때문에 “용기”를 잃는다. ‘나’는 이 사랑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에서 “당신에게 나를 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나는 죽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이동한다. ‘나’는 그 사랑과 헤어진다. 헤어졌다고 해서 사랑에서 놓여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사랑의 인력 안에 붙잡혀 있다. 애인은 ‘나’를 떠남으로써 부재의 존재가 되지만 ‘나’는 “부재가 되지 못한 존재”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나’는 “헤어진 애인과의 섹스”를 할 때의 기억, “그 감촉의 비곗살”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혐오는 고착에 빠진 사랑의 안감이다. 그것은 안 보이는 곳에서 자라나다가 어느 순간 바깥으로 삐죽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이란 “자신이라는 상상과 타인이라는 추상을 번갈아 쓰”는 일이다. 많은 사랑이 실패로 끝난다. “사랑을 시작하면/애인들은 내가 너무 차갑거나 뜨겁다고 운다”라는 구절을 통해 유추하자면, 실패가 예정된 사랑은 서로에 대한 기대치의 어긋남 때문이다(〈돌아올 수 없는 윤회〉). 우리는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를 아프게 한다. “당신을 아프게 해놓고 당신을 치유해도 될까”(〈무화과(無花果)〉). 병 주고 약 주는 것, 아프게 해놓고 치유하는 것, 그게 사랑이다. 사랑이 끝나는 원인은 사랑의 촉매가 된 과잉의 욕망이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욕망이 싸늘하게 식어 재가 되어버린 자리에 권태가 고인다. 권태는 사랑의 재앙이고, 사랑의 죽음을 불러온다. 권태는 모든 사랑을 서서히 죽이는 불치병이다.

어쨌든 ‘나’는 당신과 연애를 했는데, 그 사랑은 끝났다. ‘나’는 당신이 했던 거짓말을 안다. 어떤 사랑은 거짓에 의해서만 지탱된다. 그 거짓말 때문인가. ‘나’는 “당신에게 나를 주어선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른다. 사랑이 깨진 것은 거짓말이 만든 관계의 균열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애인과 헤어졌지만 잊을 수는 없는 애인의 부재 속에서 지나간 사랑을 반추한다. 그 부재의 자리는 크고 넓다. 그 부재의 자리에 바글거리는 것은 한때 사랑했던 자의 기억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사라졌다는 착란으로 남겨진다”(〈시간을 (잃어)버린 시계〉). ‘나’는 “부재가 되지 못한 존재”이고, 따라서 부재하는 자를 기억으로 불러오는 자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졌으니, 의지할 것이라곤 그 대상에 대한 아련한 기억뿐이다. 그 기억의 가장 큰 부분은 몸에 새겨진 기억이다. 서로의 몸을 핥고, 쓰다듬고, 깨물던 기억, 즉 “살을 섞고 삶을 나누던 기억”(〈물의 누드〉)이다. 그 사랑했던 몸이 약동하는 몸, 젊고 아름다운 몸이었다면 그 기억은 더 강렬하고, 그것이 강렬할수록 “몸의 애인”이 부재한다는 실감은 죽을 만큼 애틋해진다. 이 시에서도 사랑의 기억은 몸과 연관된다. 이를테면 섹스, 비곗살, 멀미 따위는 오직 몸의 기억을 통해 살려낼 수 있는 것들이다.

헤어진 애인은 몸이 없는 사람이다. 지금 여기에 없기에 몸이 없는 것이다. ‘나’는 있지만 부재하는 애인에게는 몸이 없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없는 몸이 있어서 내 몸을 할애하여 채워주고 싶다/당신의 없음을 없애고 싶다”(〈물-집〉)라는 구절이 가능하다. 몸이 없으니 애인과는 몸의 사랑이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성이 불현듯 사랑에 대한 혐오와 자학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사랑을 하고 나면 괴물이 된다”(〈회음의 부적〉)라는 고백은 처연한데, 자신을 괴물이라고 말하는 자기 비하는 자학의 한 형식이다.

한 번의 사랑은 지나가면, 남은 것은 그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시인은 “한 번의 연애가 끝나면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살아남은 애인들을 위한 이별 노래〉)라고 썼다. 이 시집에는 사랑의 시가 여러 편이다. 아니 시집 전체가 단 한 편의 사랑의 시다. 그 단 한 편이 여러 편으로 다르게 변주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왔다가 가버린 사랑이 단 한 번인지, 혹은 여러 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 바깥으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많은 사랑의 실패를 겪고도 여전히 그 사랑 안에 있다.

〈야수〉라는 시에서 “내가 당신으로 아프겠소/나를 사랑하지 마시오”라고 말한다. 나를 사랑하지 말라는 시구가 왜 나를 사랑해달라는 애소로 들릴까? 그 구절이 바로 “내가 당신으로 아프겠다”는 수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름답다.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름다움을 나에게 주시오/내가 당신을 잡아먹을 것이오”라고 한다. 이 시의 핵심적 진실은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으니/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요”라는 구절에 있다.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에 빠졌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가 없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요라는 자기 모순의 시구는, ‘사랑이 벌써 끝났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라는 무의식의 욕망을 드러낸다. 떠나고 없는 사랑을 붙잡고 있는 이의 애절함이 제 애절함으로 빚어낸 게,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하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기 모순의 사랑이다.


이이체(1988~ )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성공회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연세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에서 공부 중이다. 2008년 월간 《현대시》에 〈나무라디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첫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2011)에 이어 최근 두 번째 시집 《인간이 버린 사랑》을 펴냈다. 방금 도착한 그의 두 번째 시집을 읽으며, 이 시집의 많은 말들과 구(句)들이 사랑에 실패한 자의 독백임을 알아챈다. 시인은 “사랑은 나와 당신의 마지막 구절을/영원히 되풀이 하는 일”이고, “사랑은 이 저물어가는 필연의 세계에/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랑한 뒤에 남는 것은 상처다. 시인은 그것을 바꿔 “흉터는 모두 한 편의 시”라고 말한다(〈인간이 버린 사랑〉).
  • 2016년 06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 article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문혜진 〈몰이꾼과 저격수〉

[2017년 07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안미옥 〈한 사람이 있는 정오〉

[2017년 06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허은실 〈이마〉

[2017년 05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서효인 〈경기 북부〉

[2017년 04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김소형 〈두 조각〉

[2017년 03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안미린 〈반투명〉

[2017년 02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병일 〈진흙 여관〉

[2017년 01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려원 〈사과 한쪽의 구름〉

[2016년 12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임봄 〈백색어사전〉

[2016년 11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유계영 〈에그〉

[2016년 10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오은 〈그 무렵 소리들〉

[2016년 09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유진목 〈신체의 방〉

[2016년 08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기성 〈포옹〉

[2016년 07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안주철 〈밥 먹는 풍경〉

[2016년 05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김민정 〈김정미도 아닌데 ‘시방’ 이건 너무하잖아요*〉

[2016년 04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안희연 〈몽유 산책〉

[2016년 03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하린 〈늑대보호구역〉

[2016년 02월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이원 〈목소리들〉

[2016년 01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송재학 〈햇빛은 어딘가 통과하는 게 아름답다〉

[2015년 12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공광규〈수종사 뒤꼍에서〉

[2015년 11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박연준 〈우산〉

[2015년 10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이상국 〈혜화역 4번 출구〉

[2015년 09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손세실리아 〈낌새〉

[2015년 08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송승언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2015년 07월호]

시 읽기의 즐거움 전파하는 장석주 시인

[2015년 06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고영 〈달걀〉

[2015년 05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민구 〈움직이는달〉

[2015년 04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양애경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2015년 03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2015년 02월호]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성동혁 〈여름 정원〉

[2015년 01월호]

하단메뉴

상호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김창기
편집인 : 김창기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성동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