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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내 마음속 풍경으로 그렸죠

화가 석철주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바탕으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석철주 작가가 그린 우리 시대의 〈신몽유도원도〉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의 풍경이 꿈속처럼 아련하다. 전통 산수화의 맥을 이었지만, 그는 한지에 먹이 아니라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그린다. 그런데 서양의 아크릴화와도 완전히 다르다. 2005년 처음 〈신몽유도원도〉를 선보일 때 그는 바탕을 원색으로 칠한 후 그 위에 흰색 물감으로 윤곽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흰색 물감이 마르기 전에 스프레이건으로 캔버스를 향해 물을 쏘았다. “물에 많이 지워진 부분과 적게 지워진 부분 사이에 층이 생기면서 산세가 나타났습니다. 물 때문에 우연에 의한 효과가 커지지요. 그게 동양화의 사의(寫意)적인 풍경을 보여주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대표 산수화가 청전 이상범의 마지막 제자

최근 작품은 흰색 물감을 칠한 후 그 위에 풍경을 그려놓고 물을 쏘았다. 물에 지워져 드러난 흰색은 산 위를 덮은 눈이 되고, 운무가 되고, 계곡이나 개울물이 된다. 붓으로 산과 나무, 꽃 등 형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려 넣으면서 사의적인 풍경에 사생적인 측면이 더해졌다. 그는 그 위에 다시 젤로 촘촘하게 망을 그려 넣었다. 한층 아슴푸레해진 풍경은 방충망을 통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디지털 화면의 최소 단위인 픽셀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희뿌연 풍경은 꿈속에서 떠도는 듯, 무의식을 헤집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동양화의 전통에 뿌리를 두되 이렇게 거침없이 과감한 시도를 해왔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에 옛날과 똑같은 방법을 고수할 수는 없습니다. 동양화가 가진 정신세계를 토대로 하되 표현기법은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료나 기법에 얽매이기보다 동양화가 가진 정신세계를 저만의 기법과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서양화처럼 캔버스에 원하는 색을 칠해서 완성되는 그림이 아니라, 캔버스에 스미어 번지고 배어나오는 깊은 맛을 내고 싶었습니다.”

원색 아크릴물감을 사용하지만 한지에 먹이 번진 듯한 느낌을 주는 게 이 때문이다. 그는 근현대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산수화가로 꼽히는 청전 이상범 선생에게 배운 마지막 제자다.

“어릴 적 서촌에서 살았어요. 같은 동네에 청전 이상범 선생님이 살고 계셨죠. 중학생 때까지 키워온 야구선수의 꿈을 접은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저를 이상범 선생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신몽유도원도15-20〉, 캔버스에 아크릴릭ㆍ젤, 130x194cm, 2015
이상범 선생은 그에게 문인화 채본을 그려주고 연습해 오라고 했다. 툭 던져주고 알아서 깨치라는 식이었다. 열심히 그려서 가져가면 하나하나 지적해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철주 주라’면서 며느리에게 맡겨놓으신 채본을 마지막으로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 중 제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그림을 대하는 자세였습니다. 선생님은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쓰러지시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벼루에 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죠.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술가란 저런 거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모습을 닮고 싶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것은 몰라도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작업한다’는 점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상범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는 선생의 아들이 운영하는 화실에 다니고 천경자 선생의 제자인 유지원 작가에게 채색화를 배우고, 스물일곱 살 때 추계예대에 입학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1971년 스물한 살 때 대한민국 전람회(국전)에 입선한 이래 1979년과 1980년, 1981년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하고,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하며 미술기자상, 한국미술작가상, 한국평론가협회 창작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는 “1990년 추계예대 교수가 되기 전까지는 그림으로 생활이 해결되지 않아 해보지 않은 장사가 없고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고 말한다. 미 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요들송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본업은 그림이었다.


한국적인 정서와 이야기로 전통을 잇다

〈매화서옥도09-18〉, 캔버스에 먹ㆍ아크릴, 130x300cm, 2009
이상범 선생에게 수업을 받은 데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그의 과제는 언제나 ‘한국미술을 어떻게 우리 시대에 맞게 현대화하느냐’였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시도했다. 1990년 발표한 작품은 화면 전체를 커다란 항아리가 덩그러니 채우고 있다. 토분을 섞은 아크릴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으로만 보자면 동양화인지 서양화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한국적인 소재나 재료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철학과 정서, 이야기를 통해 전통을 잇고 싶었습니다. 제게는 그게 어릴 적 기억,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죠. 어릴 때 우리 집 문을 열면 겸재의 〈인왕제색도〉 같은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장독대에 올라가 고추잠자리를 잡거나 연을 날리곤 했죠. 장독을 매일 정갈하게 닦으셨던 어머니는 장독 위에 정화수 한 그릇 올려놓고 달빛 아래에서 소원을 비셨습니다. 저에게는 그 모습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한국적인 미감’이었고,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장독에 담아놓은 장들은 시간이 갈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잖아요? 저도 깊은 맛이 배어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그리려면 그 대상을 완전히 소화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장독을 엄청나게 수집하고, 장독에 대한 역사도 공부했다. 장독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토분을 바르고 아크릴물감을 칠했다. 옛 도공이 그랬든 손가락으로 문질러 문양을 그렸다.

“재료와 기법은 다르지만, 수묵화의 정신세계는 그대로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재료가 아크릴 물감이었던 거지요.”

〈달항아리15-4〉, 캔버스에 아크릴릭ㆍ젤, 130x130cm, 2015
그는 장독에 이어 실패와 골무와 같은 안방의 물건들을 그리면서 헝겊과 실 등 오브제를 활용했고, 그다음 들판의 풀을 그렸다. 아크릴물감으로 바탕색을 칠한 후 죽필로 긁어내 안의 색이 우러나오게 하면서 풀과 화분을 묘사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무릎을 다쳤고, 어머니 등에 업혀 치료받으러 다녔습니다. 상처 입은 곳에 새살이 돋듯, 긁어서 드러난 색을 통해 치유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워서 드러내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바탕색 위에 검은색이나 흰색을 칠한 후 물감이 마르기 전 맹물에 적신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물감을 칠하는 게 아니라 지워 안의 색이 드러나게 하는 그림이다. 그리고 〈신몽유도원도〉로 우리 시대의 산수화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산수화의 대가에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가 산수화를 그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등산가이드,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웬만한 산은 다 누볐습니다. 스케치도 많이 했죠. 하지만 대학교수가 되고부터는 산을 잘 다니지 않게 되더라고요. 하루에 8~10시간씩 쭈그리고 앉아 그림만 그리다보니 15년 전 연골이 파열되었습니다. 더 이상 산에 갈 수 없다 생각하니 산이 그리워졌습니다. ‘이전에 눈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봤던 산의 풍경을 그리자’고 생각했고, 그게 〈신몽유도원도〉가 되었죠.”

작가는 “현대미술, 세계 미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전통을 알아야 나 자신을 찾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세계 속에서 한국미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끊임없는 작품 활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작가다.
  • 2016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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