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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신주쿠양산박(新宿梁山泊)’ 김수진 대표

재일 한국인의 희망이 되고 싶다

글 : 한정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재일교포 극단 ‘신주쿠양산박’을 이끄는 김수진씨는 195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김해 김씨 양반가의 후손인 아버지는 온갖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두 형제를 조선 학교에 보냈다. 집에서는 우리말만 쓰게 했다. 언젠가는 통일된 조국에 돌아가서 살기 위한 준비라고 했다. 전자공학과를 간 것도 통일 조국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기여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극 한 편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남자가 무슨 배우냐, 연극이 뭐야.” 연극을 깔보던 이 청년은 반평생을 무대 위에서 보내게 된다.

사진제공 : 스튜디오 반
조센징과 반쪽발이 사이에서

전철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 한국 이름 석 자와 저고리는 차별의 표적이 되었다.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가라테를 배웠다. 그에게 일본은 분노의 대상이었다.

열일곱, 열여덟 살이 되자 많은 친구들이 북으로 가는 만경봉호에 올랐다. 홀로 남겨진 수진은 외로웠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얼마 후 북으로 간 친지,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 내용이 재일 조선인 사회의 주요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병원, 음식 학교가 모두 무료이며 인민이 사회와 국가의 중심”이라고 선전했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지상 낙원은 없었다

“재일동포라고 하면 북(한)쪽, 재일교포라고 하면 남(한)쪽이라 생각하죠. 재일이라는 존재는 남북으로 갈린 한반도 그 자체입니다.”

일본 대학에 가기 위해 야간학교를 다니며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일본에서 조선 학교 출신은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카이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다. 통일 조국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싶었다. 돈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 학교 시절 친구가 꼭 봐야 할 연극이 있다고 했다. 김지하 원작의 〈진오귀〉였다. 마음속 분노가 눈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일본인에게는 ‘조센징’으로 한국인에게는 ‘반쪽발이’로 불린, 그의 한 서린 마음을 진오귀굿이 달래주었다.


차별 없는 무대에 서다

‘신주쿠양산박ʼ의 연극철학은 땀 흘리는 노동에서 시작한다.
텐트 설치, 무대 작업 모두 대표를 비롯한 단원들이 직접 한다.
돈 많이 버는 기술자보다 돈 못 벌어도 좋으니 무대에 서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니나가와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일본 현대연극의 거장 니나가와 유키오에게 연극을 배웠다. 일본인이 아니라고 차별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선 국적은 상관없었다. 연기만 잘하면 됐다. 그런데 ‘김수진’이라는 이름으로는 제국극장에 설 수 없다고 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가라 주로 연극의 주제는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 채 5개월 때 낙태된 아이들이에요. 그래서 다들 한쪽 눈이 없거나 팔이 없거나 몸이 성치 않아요. 아빠, 엄마, 왜 우릴 버렸나요.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양수를 가르며 저세상에서 오는 거예요. 가라 주로의 연극에서 내 모습을 봤죠. 재일 한국인은 일본과 조국, 두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낙태된 민족이니까요.”

니나가와 스튜디오를 나와 일본 앙그라(언더그라운드) 연극의 대표적인 기수인 가라 주로가 이끄는 상황극장에 들어갔다.

“일본 사회에서 한국 국적으로는 절대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언더그라운드로 갈 수밖에 없었죠. 실험정신이 강한 앙그라 연극은 깨끗하고 예쁜 걸 그리질 않아요. 본래 사람은 선하고 모범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독하고 악한 존재죠.”

1987년 정의신, 김구미자 등의 재일 한국인 연극인과 함께 극단 ‘신주쿠양산박(新宿梁山泊)’을 창단했다. 극단 이름은 스승인 가라 주로의 상황극장이 있던 신주쿠와 《수호전(水滸傳)》에서 송강(松江) 등 108명의 호걸이 모여 농민봉기를 일으킨 중국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지명인 양산박에서 따왔다.

창단 이래 30년 동안 신주쿠양산박은 연극을 통해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의 존재를 알렸다.

“아내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김수진은 절대 귀화하면 안 된다고요. 일본 연극계에서 성공한 ‘재일 한국인’으로 남아야 한대요.”


한·일(韓日) 사이에 놓은 사다리

왕십리역 앞 광장에 세워진 극단 신주쿠양산박의 텐트극장. 김수진 대표와 단원 20여 명이 이틀 동안 직접 설치했다.
1989년 신주쿠양산박은 ‘재일교포 극단’으로 공연 허가를 받아 한국을 찾았다. 이후 오태석, 노경식 등 한국 작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한·일 연극 교류에 이바지해 왔다.

스승인 가라 주로가 김지하 원작의 〈금관의 예수〉와 계엄령하 한국 취재를 바탕으로 쓴 〈두 도시 이야기〉를 서강대에서 공연해 한·일 연극 교류의 물꼬를 텄고 제자 김수진이 이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 3월에는 왕십리역 앞 광장에 텐트극장을 설치하고 일주일간 오태석 원작의 〈도라지〉와 재일 한국인 100년 역사를 담은 〈백년, 바람의 동료들〉 두 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텐트극장의 매력은 천막의 일부가 걷히면서 꿈의 공간인 무대와 극장 밖 현실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데 있어요. 관객은 객석에 앉아서 자신이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죠.”

〈도라지〉와 〈백년, 바람의 동료들〉 두 작품 모두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무대 뒤 천막이 걷히면서 거대한 왕십리역사가 무대 안으로 들어오고 무대 위 배우들은 극장 밖으로 나가 길놀이를 한다.

“텐트 공연은 10년 만이지만 한국에는 거의 매년 왔어요. 이번에는 텐트를 기증하고 갈 겁니다. 배우 김응수씨를 대표 자리에 앉혀 ‘종로양산박’을 만들 건데 우리 텐트가 한·일 연극인이 모이는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신주쿠양산박의 텐트극장은 지진이나 태풍 등에도 안전하도록 만들었다. 텐트 제작비는 500만엔(약 5000만원). 설치는 20여 명의 단원이 직접 한다. 설치에 걸리는 기간은 단 이틀이다.

“전혀 아깝지 않아요. 텐트극장 설치는 우리밖에 못하거든요. 여기 놓고 가야 다시 올 수 있는 핑계가 생기죠.”

김수진 대표는 얼마 전 일본인 아내와 함께 JSK라는 회사를 차렸다. 회사 이름 JSK에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놓인 사다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오사카에 생긴 코리아국제학원 후원부터 코리안타운을 찾는 일본인을 위한 문화사업 등을 기획하는 회사다.

“우리는 사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전쟁이 나면 다리부터 공격해서 파괴하지만 사다리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요.”


지금 하고 싶은 게 바로 나의 꿈

재일 한국인 가수 조박씨의 노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백년, 바람의 동료들〉은 재일의 역사 100년을 담은 작품이다.
‘일본 연극계에서 성공한 재일 한국인’이라는 아내의 평이 틀리지 않았다. 김 대표는 올 한 해를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한·일 양국을 오갈 예정이다.

일본에서는 투병 중인 스승 니나가와 유키오를 대신해 배우 미야자와 리에와 모리타 고가 출연하는 〈비닐의 성〉을 연출한다. 한국에서는 부산 영화의 전당과 함께 손잡고 관광객 대상의 공연을 구상하고 있다. 한국 영화사로부터 구리 료헤이의 단편소설 〈우동 한 그릇〉의 영화 연출을 부탁받아 하반기에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을 시작한다.

화가 이중섭의 이야기를 담은 신주쿠양산박의 공연 〈길 떠나는 가족〉도 예정돼 있다.

“제 삶에 후회는 없어요. 항상 지금 하고 싶은 걸 했고 그게 바로 제 꿈이었습니다. 연극은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 신주쿠양산박이 50주년이 될 때까지.”
  • 2016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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