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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그게 언제든

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집에 무전기가 하나 있다. “칙칙, 거기 누구 없나요.”

칙칙….

1997년, 그러니까 중탑초등학교 5학년 재학시절이었다. 앞서 그보다 1년 반 전, 반 대항 축구시합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결승 자살골을 넣고 주욱 바보똥개 소리를 듣던 중이었고, 바보는 그렇다 쳐도 똥개는 너무하지 않나 싶어, 늘 잘나갈 수 있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새 학년이 되자 8절 도화지에 자기 이름으로 된 삼행시를 써서 자기 사진과 함께 교실 뒤 게시판에 붙이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었다. 집에 가서 앨범을 뒤지고 뒤져, 여자애들이 다 뒤질 만한 뒤지게 귀여운 어릴 적 사진을 찾아냈다. 그리고 “박박 밀었어요/ 정말 아팠어요/ 민족이 무너질 것처럼 아팠어요”라는 당시 부모님과 목욕탕에 같이 가는 초등학생의 비애를 코믹하게 담은 역설적 삼행시를 써 넣었다.

소위 대박이 났다.

반의 여자아이들은 내 과제물 앞에서 떠나지를 못했다.

“얜 누구야? 처음 보는데? 전학생이야? 짱귀엽.”

“토니안 닮았다. 완전 캔디하게 생겼어.”

“삼행시 좀 봐. 심지어 의식도 있고 적당한 반항심도 엿보여. 섹시해.”

등등의 반응이었달까. 이뿐만이 아니었다. 체육시간에 송태섭 스타일의 농구 실력을 뽐내자 같은 반 미경이는 환호했고, 야구시합에서 라이벌 준행이를 삼진으로 처리한 그 순간은 ‘내가 제일 잘나가’의 화룡점정이었다. 덕분에 절대적 인기의 척도라는 1학기 반장선거에서 여성 유권자들의 절대적 지지로 반장 타이틀을 가볍게 석권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감사의 의미로 학급문고에 만화 삼국지 60권을 기부하여 아이들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나의 고환 친구들은 아직도 삼국지 60권으로 반장을 샀다고 하지만, 반장이 되고 책을 기부한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정확히 밝히는 바다.) 뿐만 아니라 반장답게 반에서 수학익힘책을 가장 빨리 풀었고, 학기 중 시험에서도 늘 1등이었다. 잘나간다는 애들만 할 수 있다는 반 대표 계주선수이기도 했고, 집에 586컴퓨터를 들여 친구들에게 신세계를 접하게도 해줬다. 그랬다. 내가 제일 잘나갔다. 1997년도였다.


2015년이다.

“칼로 난 상처에 굳은살이 배기 시작하니, 이번엔 날카로운 창이 푹 하고 들어온다. 적응이 되었다고 다독였는데, 또 한 번 기습을 당한다. 고통이란 건 제갈량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쩜 그리 늘 예상치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습격을 해온단 말인가. 배가 부른 병사들은 하나 둘씩 도망가고, 조금씩 내 안의 군대가 해산되다 보니, 어느새 왜놈들이 쳐들어와 있다. 지킬 수 없었다. 난 또 한 번 꼭두새벽 집 구석에서 맥주 몇 잔에 무릎을 꿇고 꺼이꺼이 운다. 그리고 또 결심한다.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

괜스레 양화대교 어귀에 앉아서 이 따위의 글을 쓰며 또 괜스레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듣는다. 우리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도 아닌데 재차 괜히 눈물이 나기도 한다.

몸에 화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작은 터치에도 고약한 심술이 발동한다. 속에는 욕이 주렁주렁인데, 그걸 참아야 하니 인맥은 앙상해진다. 때문에 편한 사람들에게 퍼부어버리고, 그때마다 분이 풀리기는커녕 배로 쌓이곤 한다. 한숨만 푹푹 내쉬는 요즘, 그 한숨에 우리 집 개는 멀찍이 떨어져 눈치만 본다. 그 한숨에 엄마, 아버지도 “쟤가 옛날엔 안 그랬는데” 하며 같이 한숨을 쉰다. 미안한 마음이다. 미안한 마음, 단지 그뿐이다. 그러면서 애써 좋았던 때를 생각하니, 가장 걱정 없이 행복했던 날을 생각하니 1997년이 떠오른다. 앞서 자만하듯 단어들을 나열했지만, 사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이 위안이더라는 거다.

“칙칙, 아저씨 나 여기 1997년인데요. 인기 짱 많아요.”

“그렇구나.”

“칙칙, 근데 아저씨 삼국지 43권이 없어졌어요. 누가 훔쳐간 듯.”

“안됐구나.”

“칙칙, 근데 아저씨 왜 그러고 살아요.”

정도의 대답만 돌아오는 무전기다. 무전기가 싸구려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조금 비싼 걸 샀으면 이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칙칙, 여기는 2030년이다.”

“…?”

“삼국지 43권이 침대 밑에 있었다.”

“…?”

“그리고 이곳은 행복하다.”

그게 언제든, 그게 누구든 문득 심장 언저리가 ‘물렁’해지는 응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아마 당신들도 그럴 것이다. 늘 달고 사는 여섯 글자가 필요할 터이다.

그 말 우선 내가 해드리겠다. 나중에 갚아라.

“칙칙… 다 잘될 겁니다.”

*이 정도면 〈응답하라 1997〉에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 〈응답하라 1988〉에 성보라의 쓰레기 남친으로 3분 나와서 약 3000개의 욕을 먹었다. 이 지면을 빌려 성보라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점 사과한다. 예쁘고 똑똑한 보라한테 왜 그랬는지 따져 묻겠다.

“칙칙, 1988 박정민 응답하라, 오버. 너 왜 그랬냐. 오버.”

“칙칙, 응애응애.”

“칙칙, 누구냐 넌.”

“칙칙, 두 살이다. 응애응애.”

박정민은 영화 〈오피스〉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G코드의 탈출〉 〈키사라기 미키짱〉,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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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SunYoung Kim   ( 2017-02-13 ) 찬성 : 0 반대 : 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귀엽네요
   우편물   ( 2016-09-01 ) 찬성 : 0 반대 : 2
무전기가 1997년에서 2030년으로 넘어가는 부분 너무 좋아요!
 배우님 응답하라 다음 시즌에 출연하셨으면 좋겠다.
   오수현   ( 2016-08-04 ) 찬성 : 0 반대 : 0
바보같지만 이글보고 많이 울었어요...동주로 배우님 알게 되었는데 글도 너무 잘쓰시고 잘생기셨고 연기도 잘하세요ㅠㅠㅠㅠ사랑해요ㅠㅠㅠㅠ다 잘될거라는 말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났네요...요즘 힘들어서 꿈이 뭔지도 모르겠고....배우님 이제 나아지셨고 괜찮아 지셨길 빌어요!ㅎㅎㅎㅎ배우님 덕분에 힘나네요 사랑하고 영원히 배우님의 팬하겠습니다!!
   오수현   ( 2016-08-04 ) 찬성 : 2 반대 : 0
와...어떻게 이런글을 쓸수 있죠...?
      ( 2016-02-21 ) 찬성 : 6 반대 : 7
3분 나와서 3000개의 악플ㅋㅋ 그만큼 잘 해주신거죠 ㅎㅎ
   ㅎㅎㅎ   ( 2016-02-10 ) 찬성 : 30 반대 : 4
쓴맛 보고 슬픔에 겨워 토악질하듯 써내는 게 글이라는 문장을 본 기억이 있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글을 쓸 수 없다고.. 다른 글들도 몇 편 봤는데 그런 게 느껴져요. 연기하고 글 쓰는 데 필요한 최적의 감수성을 지니셨습니다! 게다가 현학적 문투로 떡칠을 한 거북한 문장이 아닌 술술 읽히는 쉬운 글이어서 고맙습니다. 쉽고 재밌게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압니다. 읽는 사람을 배려하는 글이 진짜 글 아니겠습니꺼.. 앞으로도 계속 써주시고 연기도 계속 해주시고. 꾸준한 오라버니 너무 매력적이에요♥ 올해는 강렬한 단맛에 한번 질려 봅시다요!
   시나브로   ( 2016-01-18 ) 찬성 : 16 반대 : 8
이번달도 잘 읽고가요
 동주 기대하겠숩니당 히히
   미나리   ( 2016-01-10 ) 찬성 : 13 반대 : 7
칙칙... 다 잘될겁니다..
   Keem   ( 2016-01-10 ) 찬성 : 16 반대 : 1
드디어 나왔네욥 헤레래
      ( 2016-01-09 ) 찬성 : 14 반대 : 5
항상 읽으면서 웃고 행복합니다. 공감이 많이 되는 글이라 그런 것 같아요 배우로서도 응원하고 글쓴이로서도 응원하고 좋아합니다 박배우 화이팅
   영화   ( 2015-12-21 ) 찬성 : 56 반대 : 65
수능이 끝난 고삼에게 배우 박정민의 글은 참. 달더군요. 짧은 18여년간의 인생에서 만났던 가장 대단했던 시험인 수능을 쪼옥쪽 말아먹고 쓴맛을 느낀 저에겐 배우님의 글은 한약을 마신 뒤 엄마가 건네 준 사탕같았지요. 대단하진 않지만 없어서 물로만 입을 헹궜다면 개운하지 못 했을 것 같은 존재말이에요. 배우님이 글을 연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루 이틀 그렇게 날로 표현하는 시간도 못되게, 저는 배우님 글들을 단 몇시간만에 읽었네요. 읽는 내내 이 사람 의외다!란 생각을 안고서요. 사실 댓글 그런거 다는 성격 아닌데.. 배우님이 좋아서. 아니 배우 박정민보단 글쓰는 박정민, 그 자체가 참 저는 좋았어서.. 뭐랄까.. "이 글들을 읽고 '수능망치고 수시도 다 떨어진 고삼'인 제 미래에 대한 암울한 감정들이 사라졌어요!" 라고 할 만큼의 휘몰아치는 감정의 변화를 느끼진 않았지만, 무언가 살풋 제 안에 내려앉는 감정.이 참 좋았네요. 앞으로 배우님 글 목록 페이지에 북마크를 해놓고 수시로 들어와 새 글을 기다릴 거구요. 종종 이 글에도 들어와 이 댓글도 되새겨보려구요. 언젠간 배우님을 만나게 된다면 궁굼했던 것들도 여쭈어 볼거에요오. 꾸준히 글로써 저를 토닥여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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