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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박되어 있는 존재인 인간을 평생 그려왔죠

화가 황용엽

글 : 이선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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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래로 길게 늘인 몸에 극도로 단순화한 얼굴, 철조망을 친 듯 선들이 어지럽게 엉켜 있는 화면. 화가 황용엽의 그림을 한번 보고 나면 잘 잊히지 않는다. 독특한 그만의 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7월 25일부터 10월 1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황용엽: 인간의 길〉에서 만난 작가는 한눈에 그림 속 인물들을 떠올리게 했다.
일제와 6·25 전쟁 상처를 작품의 주제로

변형해서 그린 인물상이 왜 그 자신과 닮아 보일까? 황용엽이란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체험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이 자기연민에만 빠져 있지는 않다. 1931년에 태어나 일제와 남북북단, 6·25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은 후 인간 실존에 대해 탐구하며 형상화해온 작가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시대와 환경이 달라졌다 해도 어딘가에는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술관 카페에서 마주 앉은 작가는 어제 일인 듯 북한에서의 삶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1948년 열일곱 살 때 평양미술학교 2기로 입학했어요. 해방 후 학제개편으로 고등학교를 일찍 졸업했죠. 하지만 미술을 체제선전용으로만 활용하려는 데 심한 환멸을 느꼈습니다. 학교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그림만 그려야 했습니다. 한 선배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아비판을 받아야 했고,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 먹이는 모습으로 모성애를 표현해도 공격받았습니다.”

어느날, 캔버스에 유채, 130x162cm, 1990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그는 인민군 징병을 피해 몸을 숨기다 남쪽으로 내려와 국군에 입대했다.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위해서는 도저히 싸울 수 없었다. 전쟁경험은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가 된 듯하다. “내가 살려면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어”라고 바로 어제 일처럼 되뇐다. 감수성 예민한 화가가 겪었을 참상을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때 북한에 남은 가족과는 영영 다시 보지 못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면 돌아갈 줄 알고 떠나온 고향이었다. 남북분단의 비극은 지금도 그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는 현실이다. 다리부상을 당해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후 남한에서 먹고살기 위해 양키물건 장사 등을 했던 그는 초상화 그리기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하며 1953년부터 홍익대 미대에 다녔다. 북한과 남한의 미대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당시 홍익대 미대에는 김환기·이종우· 이봉상·이상범 등 쟁쟁한 분들이 교수진으로 계셨습니다.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어느 분도 자신의 화풍을 강요하지 않았죠.”

인간_ 캔버스에 유채, 60.6×50cm, 1985
그는 195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줄곧 인간만을 그려왔다. 하지만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변신을 거듭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고 그는 말한다. 1960년대까지 작품은 검붉은 물감을 두텁게 쌓아 올린 거친 마티에르에 변형된 인체를 보여준다.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연상시키면서도 한국적인 색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1970년대 초·중반에는 빨강과 파랑 등 원색적인 배경에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한 인물상이,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촘촘한 선으로 메운 어두운 회색이나 갈색 배경에 검은색 선묘로 간략하게 그린 인물상이 등장한다. 인물은 점차 사실적인 형태를 보이다 1990년대부터 길고 비쩍 마른 몸에 역삼각형 얼굴, 갈색 피부 등 그의 대표적인 인물상이 만들어졌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무수히 받아온 질문이 ‘왜 인간을 그리느냐, 그것도 왜 비정상으로 데포르마시옹(변형)하느냐’였습니다. 내가 왜 일그러진 인간을 그리는지는 알 수 없어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고 웃고 싶을 때 웃지 못하는 폐쇄적인 북한사회를 체험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정의 표현마저 빼앗겼다면 사람은 한낱 상자 속에 놓인 꼭두각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게 자유의 절규로 터져 나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수직선으로 촘촘히 그은 폐쇄적인 벽 속에 갇혀 있거나 거미줄이나 가시철조망 같은 뒤엉킨 선들에 갇혀 있다. 하얀색 천을 간신히 둘렀지만 나신에 가까운 모습은 고난받는 예수 그리스도나 수행자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는 “전흔에 시달리고 모든 것을 빼앗긴 채 헐벗은 사람들의 모습을 언제나 되새기게 된다. 나의 그림에 거미줄 모양의 선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박에서 기인한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시류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 개척

인간_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1976
‘속박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그의 경험은 일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어릴 적 평양 시내에서 머리에 망태를 뒤집어씌우고 포승으로 결박한 사람들을 일본경찰이 끌고 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 중에는 애국투사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도 머리에 뭔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1970년대 그의 작품에 대해 “유신체제 등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나타내는 게 아니냐?”고 보는 이도 있다. 1980년대 초 그의 작품은 파격적인 변화를 보인다. 차분하고 절제된 화면을 구사하던 이전 작품과 달리 원색 물감을 뚝뚝 떨어뜨린 거친 붓질로 포효하는 인간을 그렸다. “그림은 설명하는 게 아니다”라면서 구체적인 작품설명을 삼가던 그도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발언을 한다.

“1979년 가을에서 1980년 여름까지 6개월간 파리에 머물며 유럽 진출을 모색하고 있을 때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도가 제한되었지만, 유럽에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강제진압 장면을 그대로 볼 수 있었지요. 그 모습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그린 작품입니다. 화가는 시대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피카소도 스페인 내전 중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되는 장면을 ‘게르니카’로 남기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민중미술 진영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요하는 체제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념에 복무하는 예술에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관심은 언제나 속박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을 어떻게 현대화해서 보여주느냐였다”고 말한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참혹한 현실을 담으면서도 세련된 화면을 구사한다. 그는 줄곧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갔고, ‘시류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 영역을 고수해온 집념을 높이 산다’는 평을 들으며 1989년 제1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자가 되었다. 1990년대 들어 그의 작품은 더욱 무르익었다. 화면에 산과 언덕, 강줄기와 나무 등 자연이 등장하고, 인물들은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 있다기보다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작가는 “1991년 편지를 통해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누님과 동생이 고향땅에 그대로 살아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세기 넘게 저를 사로잡았던 마음의 굴레가 벗겨지는 느낌이었죠. 그때까지 극한 상황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인간 모습에 초점을 맞추던 저는 또 다른 실험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고분벽화와 민화, 도자기, 기와 무늬, 떡살무늬 등 한국적인 원형미에서 단순화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죠”라고 말한다. 문양처럼 그려 넣은 산이나 나무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인간_ 캔버스에 유채, 135×112cm, 1973
“2차대전 말 미군 공습이 잦아질 때 우리 가족은 평양에서 평남 강서군으로 이사했습니다. 강서고분이 있던 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죠.”

2000년대 들어 그의 작품 색채는 더욱 밝고 다채로워졌다. 작품 크기도 커져 가로 세로가 260cm, 194cm에 달할 정도다. 올해로 만 84세인 그는 지금도 하루 8시간 이상 꼬박 작업실에서 보낸다고 말한다.

“내 작업실에 누가 들어오는 것도 싫어하고, 청소도 못하게 하죠. 하루 종일 혼자 작업하다 전화라도 받을라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림을 계속 그리려면 체력을 유지해야 하니 한 주에 두 번 테니스를 칩니다. 평생 그림만 열심히 그려왔는데, 뭔가 남겨놓고 죽어야 할 것 아닌가요? 요즘은 이제까지 작업을 종합하면서 새롭게 모색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10년쯤 계속하면 뭔가 남길 만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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