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여자, 북 칼럼니스트 박사

2년째 〈책 듣는 밤-독야청청〉 진행

글 : 한정림 객원기자  / 사진 : 김선아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한나는 어린 연인 마이클과 사랑을 나누기 전 그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이처럼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행위다. 침대 머리맡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북 칼럼니스트 박사(46)씨는 2년 전 어느 날, 자신의 sns에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고 싶어서 연애가 하고 싶어졌다”는 문장을 올렸다. 이를 본 홍대 앞 카페 제너럴닥터 측에서 장소를 제공할 테니 손님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떻겠느냐고 연락을 해왔다. 신기하게도 다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 친구가 〈책 듣는 밤-박사의 독야청청(讀夜聽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포스터를 만들어줬다. 또 다른 친구는 책 읽을 때 사용할 마이크와 앰프를 빌려줬다.

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밤, 제너럴닥터에서 첫 번째 〈책 듣는 밤-박사의 독야청청〉이 열렸다.

한번 하고 나니 또 해달라는 요청이 잇따랐다. 〈책 듣는 밤〉 앞에 ‘두 번째’ ‘세 번째’ 서수 수식어가 붙더니 어느 새 스물네 번째 〈책 듣는 밤〉을 맞이했다. 지난 2년 동안 술집, 갤러리, 미용실, 독립 서점, 마을 축제의 노천 시장 등 다양한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줬다. 〈책 듣는 밤〉에서는 한 번에 많게는 네 권, 적게는 한 권의 책을 읽어준다. 지금까지 읽은 책이 100여 권에 달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주제를 정하지 않고 했었어요. 한 달 동안 읽은 책 중에서 무작위로 골라서 읽었는데요. 주제를 정하니까 여러모로 낫더라고요. 주제에 흥미를 갖고 오는 분들도 있고요.”

중독・꿈・밤과 여행 등 주제를 잡고 책을 고른다. 때로는 한 작가에 대한 책을 고르기도 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경우가 그랬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책과 그에 대한 책으로 묶어 읽었다.

한 번 읽을 때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분~2시간 정도. 쉬지 않고 읽는 사람도 힘들지만 꼼짝없이 앉아서 듣기만 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싶다. 한 번에 10~20명의 사람들이 〈책 듣는 밤〉을 찾아온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열린 〈책 듣는 밤〉에서는 딱 한 편만 읽었어요.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이었죠. 아이들이 주인공인 환상소설인데 물에 빠져 죽은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예요. 어떤 큰 배가 침몰하면서 꼬마 형제랑 가정교사가 물에 빠져 죽어요. 이들이 기차에 타는데 어느 순간, 아이의 젖은 맨발에 뽀송뽀송한 흰 양말이 신겨져 있었다는 장면 묘사가 나오는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모든 사람이 바라던 거였잖아요. 죽은 아이들에게 뽀송뽀송한 흰 양말이라도 신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는 책으로 기도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책을 읽는 한 시간 내내 눈물 콧물 범벅이 됐다. 다 읽고 나니 청자 중 한 명이 “대신 울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책을 읽어주고 듣는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하거든요. 남이 읽어주는 책을 듣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남이 읽는 속도에 맞춰 또는 남의 해석에 따라 듣는다는 게 왜 재미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해요. 그런데 〈책 듣는 밤〉을 하면서 같이 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됐어요. 서로가 감정을 공유하면서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하고 싶은 일로 채운 나날들

주제와 개최 장소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책 듣는 밤〉 포스터. 이명석 작가가 만들어준 것이다.
어린 시절, 세상 사람 절반은 화가인 줄 알았다. 외갓집 식구 대부분이 화가였다. 외증조부가 근대 화단의 대표적인 화가 청전 이상범이다.

미술학원 선생님이었던 엄마한테 그림을 배웠다. 자질도 뛰어났다. 중학생이 되어 그림이 아닌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엄마의 실망은 컸다.

“엄마의 미술학원에는 책이 많았어요. 사립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도서실에서 매일 동화책과 SF소설을 빌려다 봤죠.”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장래희망 칸에 ‘시인’이라고 적었다. ‘글 쓰는 스킬을 배울 필요는 없다. 좋은 글은 나의 재능에 달렸다. 나에게 필요한 건 철학’이라는 생각으로 문예창작과가 아닌 인도철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잡지사 기자, 여행가, 작가로 살았다. 〈빈 칸 책〉 시리즈를 비롯해 열 권 이상의 책을 썼다.

‘박사’라는 인상적인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는 그의 졸업식 날, “대학 나왔으니 굶어 죽진 않을 거다. 앞으론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삶의 모토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자’다. 정체성은 ‘OO하는 작가’다. 여기서 ‘작가’는 물론 ‘글 쓰는 작가’를 뜻한다. ‘OO’ 안에는 캘리그래피, 그림, 전각, 마작 등의 단어가 들어간다.

“글 쓰는 것 외에는 모두 아마추어 수준인데 좋게 봐주는 건 제가 글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요즘엔 북 칼럼을 쓰는 작가로 살고 있다. 《도서관 이야기》와 《네이버》라는 잡지에 정기적으로 서평을 게재하고 있고, SBS 라디오 프로그램 〈책하고 놀자〉, 경북교통방송에 출연해 책을 소개한다. EBS 라디오〈북카페〉에서는 낭독자로 책을 읽어준다.

“어느 날 후배가 책 시장은 침몰하는 배와 같으니 얼른 뛰어내리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앞으로 ‘책’으로 먹고사는 게 가능한 일이냐며 북 칼럼 대신 드라마 칼럼이나 섹스 칼럼을 쓰라고 했죠.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요.”


박사씨가 한 달에 읽는 책의 양은 약 50 권. 이 중 완독하는 책은 20권 정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어야 가능한 숫자다. 그의 다독에 대해 황현산 문학평론가는 “그렇게 많은 책을 읽는데 생명에 지장이 없느냐”며 걱정의 말을 건넨 적도 있다.

읽고 있는 책의 좋은 문장과 구절은 수시로 sns에 올린다. 그 책만이 갖고 있는 재미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서다.

“책은 영화나 다른 매체와 달라서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 평소 꾸준히 읽어두는 수밖에 없어요. 〈책 듣는 밤〉의 주제를 잡고 읽기 시작한다고 치면 다 읽지도 못할뿐더러 어떤 책이 어느 주제에 맞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에게 다독의 비결에 대해 물었다.

“다독이 꼭 좋은 걸까요? 책을 많이 읽으면 인생이 바뀐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독에 집착하다 보면 빨리 읽을 수 있는 책만 골라서 읽게 돼요. 그러다 보면 시간과 공들여 읽어야 하는 책은 외면하게 되죠. 하지만 그런 책이 ‘내 인생의 책’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좋은 독서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독서는 자기 속도를 맞추는 게 가장 좋아요. 책을 읽는 속도는 곧 생각의 속도니까요.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데 빨리 읽어야 하니까 책장만 휙휙 넘겨버리면 본인에게도 남는 게 없고, 책에게도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 듣는 밤 - 박사의 독야청청(讀夜聽聽) 페이스북 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groups/baxabook/
  •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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