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장인 설경구

“곰처럼 우직하게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온 배우”

글 : 유슬기 TOPCLASS 기자  / 사진 : 하지영 

공식 행사장에서 설경구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홍보용 멘트는 거의 하지 않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도 애써 웃지 않는다. 하지만 차를 한 잔 두고 테이블에 마주 앉으면 달라진다. 짧은 질문에도 깊게 이야기하고, 작은 농담에도 크게 웃는다. ‘인터뷰한다’기보다는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다. 그의 작품이 ‘연기 잘한다’보다는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지난 추석에 개봉한 영화 〈서부전선〉에서 설경구는 엉겁결에 전쟁터에 끌려 나온 농사꾼 남복으로 살았다. 휴전을 3일 앞둔 1953년 7월이 배경이다. 곧 끝날 전쟁임을 전장의 군인들은 몰랐다. 그 숱한 병사들 중 가장 어리바리한 두 사람, 북한의 소년병 영광(여진구 분)과 남한의 소작농 남복이 만났다. 카메라가 돌기 전부터 그는 남복이 되어 현장을 어슬렁거렸다. 영광을 만나면 구수하게 욕부터 했다. 아들뻘 되는 후배지만 현장에서는 철저히 배우로 대했다. 설경구의 스케줄표에 ‘여진구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쓰여 있을 정도였다.

“내가 만난 배우 중 최고의 ‘여배우(여진구의 성을 따 부른 별명)’”라는 우스개도 그냥 농담이 아니었다.

“장소만 전쟁터지 두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촬영했어요. 농사꾼한테 군복 입히고, 남학생한테 군복을 입혀서 전쟁 한복판에 던져 놓은 거죠. 전쟁 때는 대다수가 그랬을 거예요. 아무 방어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내던져졌겠죠.”

설경구가 〈서부전선〉 시나리오를 받은 건 6년 전 일이다. 당시에는 한국전쟁 60주년이라 영화 〈고지전〉 〈포화속으로〉, 드라마 〈로드넘버원〉 등이 제작되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편승하고 싶지 않아 덮어두었다.

“작년 (이)은주 기일에 (이은주의 소속사이던) 나무액터스 모임에 갔는데 우연히 제작사 대표를 만났어요. 〈서부전선〉은 어떻게 돼가느냐고 물으니까 ‘냉동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그사이에 열세 살이던 여진구군이 열여덟이 됐어요. 진구가 영광을 해준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정말로 군대나 전쟁 경험이 없는 백지 상태이길 바랐거든요.”


배우는 속이 깊어야 해요

설경구의 마음이 해동된 또 하나의 이유는 시나리오 속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남복이가 던진 “살아야 사는 거여.” “언제는 우리가 알고 전쟁했나?” 등의 순박한 말들. 사실 설경구가 지금껏 맡아온 역할들이 그랬다. 질곡의 현대사, 그 역사의 한복판에 던져졌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박하사탕〉(1996)의 영호도, 〈실미도〉(2003)의 인찬도, 〈해운대〉(2009)의 만식도 그랬다.

“이제 6・25까지 했으니 해방 전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웃음). 배우가 본래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직업이에요. 체득이 안 된 상태에서 보여주면 티가 나요. 스스로도 이상하고 재미가 없고요. 곱씹어보면 〈서부전선〉이라는 영화도 감독이 주는 메시지라는 게 있어요. 전쟁은 누구에게도 해피엔딩이 아니에요.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휴먼 드라마, 코미디라고 소개되었지만 어쩌면 이 작품은 비극인지도 몰라요.”

현장은 어리바리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해적〉으로 800만 관객을 동원한 천성일 작가의 입봉작, 거기에 촬영감독도 〈두근두근 내인생〉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인 거의 ‘초짜’였다.

“제일 중요한 감독과 촬영감독이 초보였거든요. 처음에는 ‘이거 어쩌지’ 싶다가, 찍으면서는 ‘영화 자체가 두 어리바리의 이야기니까 이런 어설픈 분위기가 맞겠다’ 싶더라고요. 예민해지면 싫을 수 있거든요. 근데 안 미워요. “이 어리바리들아, 이 어리바리들아”를 입에 달고 살았죠.”

그는 현장에서 경험 많은 맏형 역할을 했다. 크랭크업 후에는 배우와 제작진이 뒤엉켜 너나 할 것 없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졸업식 같은 분위기였다”고 했다.

“나이를 먹었나 봐요. 예전이라면 날카롭게 굴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많이 웃어넘겼어요. 영화 배경이 7월인데, 촬영이 겨울까지 간 거예요. 제가 엔딩신을 빨리 찍자고 했어요.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추울 때 엔딩을 찍으면 감정이 안 나와요. 원래는 순서대로 찍는 걸 선호하는데 작품을 위해선 그게 아니었던 거죠. 찍고 얼마 안 지나 장소 헌팅 간 제작진에게서 ‘온 세상이 하얗습니다’라는 문자가 왔어요. 대설 특보가 난 거죠(웃음).”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많다. 그의 말마따나 〈서부전선〉의 주인공은 ‘설경구, 여진구, 소, 탱크’인데, 소는 말을 듣지 않고, 탱크는 속도가 안 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아쉬움은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출연한 영화를 보면 아쉬운 점을 더 많이 봐요. 이번에는 조연 배우들이 많이 나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정석원은 등장하자마자 사라졌어요. 감독한테 그랬어요. ‘차기작에서는 책임져야 한다’고요. 지창욱도 특별출연하러 하동까지 왔는데 사라졌어요. 다른 조연들도 너무 많이 잘렸어요. 그래도 다들 내색을 안 해요. 배우들이 속이 깊거든요.”


쪽팔리면 안 되니까요


〈서부전선〉의 설경구와 마주 앉은 설경구는 영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차기작인 〈살인자의 기억법〉을 위해서 체중을 감량하고 있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살인자 역할이다. 투박하던 남복은 온데간데없고 기름기 빠진 메마른 사내가 있다.

“저는 다이어트 중이 아니라 분장 중입니다. 다음 영화에 맞는 인물이 되려다 보니 분장이 좀 길어지고 있죠.”

설경구의 체중 조절기는 드라마틱하다. 〈역도산〉(2004)을 찍을 때는 30kg 가까이 찌웠다. 상대 배역과의 밸런스를 위해 촬영과 체중 증량을 병행했다. 그때 훼손된 몸은 조금만 식단을 잘못 조절해도 금방 찌는 체질로 바뀌었다. 〈감시자들〉(2013), 〈소원〉(2013)에서는 날씬하던 몸을 〈나의 독재자〉(2014)를 앞두고 다시 찌웠다. 현재는 〈서부전선〉에 대비해 10kg이 빠진 상황이다.

“배우가 아니었다면 체중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 배우가 작품을 하면서 쪽팔린 모습을 보이면 안 되거든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에 들어가는 것만큼 고역이 없어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은 그에게 일상이다. 인터뷰를 앞두고 새벽 6시에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줄넘기를 했단다. 전날 술자리로 인한 숙취를 풀고, 말끔한 모습으로 나오기 위해서였다. 그의 줄넘기는 〈박하사탕〉 때부터 이어져 온 습관이다. 올해로 13년이 된 셈인데, 그에게는 하나의 의식이 됐다.

지방 촬영을 가도 숙소의 벽을 보면서 줄넘기를 한다. 층간소음이 있을까 봐 아래층은 매니저 방으로 잡아둔다고 한다. 영화 〈소원〉을 찍을 때는 하루에 줄넘기를 5500개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당시 함께했던 이준익 감독과는 추석대전에 〈사도〉로 맞붙었다.

“〈사도〉 보고 이준익 감독에게 전화했어요. “너무 잘 봤어요. 영화가 많이 느셨네. 〈소원〉 때랑 또 달라” 그랬더니 “다르긴 뭐가 달라!” 하며 웃으시더라고요. 제가 참 인간적으로도 감독님을 좋아해요.”

이준익 감독은 “송강호가 호랑이처럼 연기하는 배우라면, 설경구는 곰처럼 연기하는 배우”라고 했다. 곰처럼 우직하게,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면서 걸어온 배우. 앞으로도 그의 족적은 다르지 않겠지만, 고민도 계속된다.

“감독은 장인이 될 수 있고 도자기를 굽더라도 장인이 될 수 있는데, 배우는 장인이 못 돼요. 자기를 소모시키는 직업이라 점점 카드가 궁색해져요. 그러면 감독한테 매달려 안 해본 걸 찾는 거죠. 김일성한테도 가고(〈나의 독재자〉), 알츠하이머 환자(〈살인자의 기억법〉)한테도 가고요. 강철중(〈공공의 적〉)이 잘됐다고 계속하면 강철중 닮은 시나리오만 와요.”

장인이 되고 싶으나 장인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의 몸부림이 그를 여기까지 있게 했다. 그럼에도 가끔씩 생각한다.

“문득문득 생각이 나요. ‘잠깐, 그 배우는 어디 있지? 지금 뭐하지?’ 그렇게 사라진 배우들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저도 마음을 다잡죠. 그게 언제든 천천히 ‘잘 내려와야겠다’고요.”
  •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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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   ( 2018-03-17 ) 찬성 : 22 반대 : 30
“곰처럼 우직하게,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면서 걸어온 배우.” 정말 배우님을 표현하기에 딱 맞는 문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솔하고 깊이 있는 인터뷰 감사합니다~ 늦게나마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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