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 황혜민·엄재용

마지막 〈라 바야데르〉 공연 앞둔 한국의 대표 발레 커플

글 : 오주현 기자  / 사진 : 김선아 

음악과 춤, 무대, 조명이 어우러진 종합예술, 발레. 무대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단연 주역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 ‘그랑파드되’는 공연의 백미이자 두 무용수의 호흡이 매우 중요하다. 아래에서 받치는 발레리노와 하늘 위에서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발레리나의 완벽한 호흡은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파트너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부부로 그랑파드되를 만들고 있는 유니버설발레단의 얼굴, 황혜민·엄재용 부부를 무대에서 만났다.

사진제공 : 유니버설발레단
14년간 파트너로 호흡을 맞춘 부부

유니버설발레단이 10월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선보이는 〈라 바야데르〉는 2010년 이후 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리는 작품이다. 불어로 ‘인도의 무희’를 뜻하는 이 공연은 발레 공연 중에서도 블록버스터 대작이라 불린다. 힌두사원의 아름다운 무희 니키아,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전사 솔로르 그리고 무희에게서 전사를 빼앗으려는 공주 감자티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다. 총 3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 2막은 드라마 연기가 주를 이루고, 3막은 정통 클래식 발레의 정수를 보여준다.

“5년 전에 이 공연을 할 때는 3막을 제일 자신 있게 할 수 있었어요. 그때는 완벽한 테크닉을 구현하는 게 쉬웠거든요. 나이가 드니 3막보다 1, 2막이 더 자신 있어요. 발레를 오래 한 만큼 더 섬세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_황혜민

14년 동안 파트너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이들에게 이번 공연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이다.

“워낙 대작이라서 자주 할 수 있는 공연이 아닙니다. 이번 〈라 바야데르〉라는 작품은 제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은퇴 시기는 40대 초반이거든요. 저희가 30대 후반이니 5년 뒤에는 아마 힘들겠죠. 그래서 이번 공연이 더 소중하게 다가와요.” _엄재용

리듬체조를 하던 황혜민과 아이스하키를 하던 엄재용은 각각 초등학교 3학년, 중학교 2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유니버설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봤어요. 태어나서 처음 본 발레 공연이었는데 반짝거리는 왕관을 쓰고 팔랑거리는 튀튀를 입은 발레리나가 너무 예뻐 보였죠. 그때 발레에 반해서 발레리나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_황혜민

“어머니가 발레 교수여서 주변에 발레에 관련된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를 볼 때마다 ‘재용아, 발레 안 해볼래?’라고 물으시는데 어린 시절에는 그 말이 싫어서 도망 다녔어요(웃음).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집에 있는 발레 비디오를 봤는데 바로 〈지젤〉이었어요. 전설적인 발레리노인 바리시니코프가 연기하는 발레를 본 순간 발레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_엄재용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간 황혜민은 3학년 여름방학 때 한국으로 돌아와 선화예중에서 엄재용을 처음 만났다.

“수업시간이었는데 클래스에 남자애들이 딱 세 명밖에 없었어요. 두 명은 계속 발레를 하던 아이들이어서 잘 따라 했고 재용이는 막 발레를 시작한 새내기였죠. 선생님이 다른 남자아이들에게는 순서를 알려주고 따라 하라고 하는데 재용이한테는 ‘재용아, 너는 아무렇게나 뛰어봐’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다리가 하얗고 길고 마른 애가 막 위로 뛰어오르던 게 기억이 나요.”_황혜민

엄재용은 선화예고에 입학한 후 1년 선배였던 황혜민에게 첫눈에 반했다. 황혜민은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엄재용은 워싱턴 키로프 아카데미로 향해야 했기에 이들의 인연은 잠시 끊기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2002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해 재회한 두 사람은 그로부터 1년 후인 2003년부터 발레계의 대표 무용수 커플이 되어 10년 동안 함께했다. 그리고 2012년 화촉을 밝혀 대한민국의 대표 부부 무용수가 되었다.

발레 인생의 거의 전부를 함께한 두 사람은 부부 이전에 친한 동료이자 친구다. 24시간 붙어 있는 부부는 같은 직업을 가졌기에 서로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지난해 말 허벅지 부상으로 올 상반기 공연을 모두 쉬어야 했던 엄재용에게 황혜민은 큰 힘이 되어주었다.

“얼마나 아픈지,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되는지 서로 아니까요. 부상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도움이 많이 됩니다.”_엄재용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무대


황혜민과 엄재용은 유니버설발레단의 얼굴이다. 지난 14년 동안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있으면서 관객들이 믿고 보는 무용수가 되었다.

“발레를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내가 왜 발레를 시작했지, 나는 발레 할 몸이 아니야’라고 생각하곤 해요(웃음). 그러다가도 공연이 끝나고 무대 위에 오르면 ‘발레 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이 바뀌죠.”_황혜민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은 박수를 친다. 전체 무용수를 향한 박수, 솔리스트를 위한 박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주역에게 가장 큰 박수와 환호성이 돌아간다.

“객석에서 시작된 박수 소리가 무대로 확 밀려 들어와요. 가끔 그 박수 소리가 가슴속까지 파고들 때가 있어요. 몇 천 명, 몇 백 명의 사람들이 나 하나를 위해서 박수를 쳐준다는 게 보통 행운이 아니잖아요. 내가 하는 몸짓으로 사람들을 웃고, 감동하고, 울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참 행복해요. 언젠가 공연이 끝난 후 희열감에 눈물이 나더라고요.”_엄재용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황혜민)와 솔로르(엄재용).
유니버설발레단의 문훈숙 단장이 무대 리허설 중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무대는 굉장히 특별한 곳이다. 너희 하나하나가 모두 특별한 사람이기에 이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무대는 아무에게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들이 설 수 있는 무대에서 주역으로서 막을 이끌어가야 하는 것은 무거운 책임감이 뒤따른다. 주역 무용수는 다른 무용수의 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뿜어내야 하므로 그 순간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과 땀, 노력이 필요하다. 수많은 레퍼토리의 주역을 맡은 이들의 발레는 연륜 있고 연기가 농익었다는 평을 받는다. ‘발레’라는 하나의 영역에서만 10년 이상을 보낸 이들은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였기에 저희는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어요. 주어진 역할 하나에 충실하면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나며 시야가 넓어져요. 처음부터 하고 싶은 게 많고, 여러 장르에 도전하다 보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분명 잃는 것도 생기거든요. 예를 들어, 발레 주역이면 발레단이 가지고 있는 모든 레퍼토리를 다 해보고 눈을 넓혀도 됩니다. 처음이 가늘면 금세 부러지게 되어 있어요. 처음을 두텁게 만들어놔야 해요.”_엄재용

이들의 꿈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무용수가 되는 것이다. 안나 파블로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처럼 발레를 생각하면 불현듯 떠오르는 무용수가 되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유니버설발레단의 전설적인 부부 무용수로 남고 싶다.

은퇴를 준비하고 있느냐고 묻자 이들은 “앞으로 남아 있는 무대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답했다. 지난 6월 은퇴한 ABT(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대표 수석무용수 줄리 켄트는 레퍼토리마다 마지막 주역을 맡으며 은퇴했다. 지금 황혜민과 엄재용에게 〈라 바야데르〉는 마지막 레퍼토리를 순회하는 시작점일 수도 있다. 황혜민은 인생의 마지막 니키아로, 엄재용은 인생의 마지막 솔라르로 자신들만의 ‘그랑파드되’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랑파드되 : 고전 발레에서 프리마 발레리나와 남성 제1무용수가 함께 춤추는 것을 뜻함.
  •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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