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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은 너무 오래 기다리지 못한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박연준 〈우산〉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 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박연준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창비, 2007)



장마가 끝났으니, 더는 비가 내리는 날은 없다. 사람들은 우산을 잡동사니들을 두는 창고나 신발장 같은 데 처박고, 이 무릎도 심장도 대뇌도 없는 것을 금세 잊어버린다. 가을의 날들은 대체로 우산이 필요 없는 쾌청한 날씨가 이어진다. 하늘은 푸르고 대기는 건조해서 우산이 필요한 사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우산은 눈앞에서 치워졌고, 그렇게 사라진 우산 따위를 애써 기억해내는 일도 없다. 우산은 현실 속에서 작은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나온 하찮은 도구다.

우산을 잘 살펴본 적이 있는가? 어느 날 나는 공연히 우산을 펴보고 그 구조를 꼼꼼하게 뜯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우산의 정교함에 감탄하며 나는 현대 철학자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산은 놀랍다. 관절이 모두 작동하는 모습과 천이 정확히 잡아당겨지는 모습, 가느다란 철제 구조물이 화관처럼 벌어지는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우산이 펼쳐지는 모습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위 온대 지역 전 주민에게 대번에 가장 교육적인 장면을 연출한다.”(로제 폴 드루아, 《사물들과 함께하는 51가지 철학 체험》) 우산이 동그랗게 만 척추들을 펴고, 천조각의 주름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비 올 때만 가능한 일이다. 우산은 “이따금 한 번씩은 비를 맞아야/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펴는 사물이다.
비 오지 않는 철에 우산은 벽에 매달리거나 구석에서 방치된 채 비의 기억들을 반추할 뿐이다.

이 시는 ‘우산’에 대한 시라기보다는 ‘기다림’과 ‘기억’에 관한 시다. 20대 조카아이가 직장을 그만두고 새 직장을 구하는데, 취직의 벽은 드높아서 막막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의 처지는 비 오지 않는 계절 벽에 매달려 있는 우산이나 마찬가지다. 조카아이가 초조하고 불안에 빠지는 것은 느슨한 기다림이 삶을 누추하고 불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직 뒤 여기저기 회사들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그 회사들이 연락 주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실직자란 본질에서 용도 폐기된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잉여 집단이다. 제철의 쓰임을 위해 벽에 매달린 검정 우산처럼 기다림의 하염없음 속에서 존재의 공회전을 한다. 무엇보다도 기다림은 지루한데, 그것은 기다리는 자의 시간이 더디 흐르는 까닭이다. 기다리는 자들은 기다림의 시간 안에 유폐당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기다림이 합당하지 않고 부당하다고 느낀다. 누군가 처리해야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기다림은 한없이 늘어지는 것이다. 그때 기다리는 자들은 늘어지고 정체되는 시간 속에서 취약하고 무력한 상태로 방치된다. 기다림이 중요한 삶의 자원인 시간을 갉아먹는 것이란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시인은 우산이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고 한다. 기다림이 우산을 낡고 못 쓰게 만들 테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벽에 걸린 채 잊힌 검정 우산처럼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외진 곳에서 헐벗은 채 기다림이란 형벌을 앓고 있는 걸까? 시인은 기다림에 대해 이렇게 쓴 바 있다. “기다리는 일은/허공을 손톱으로 조심조심 긁는 일/어디까지 파였는지/상처가 깊은지/가늠할 수도 없이”(〈환청〉,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기다림이 고통스럽지만, 그것의 무위(無爲)와 수동성이 항상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다림의 단조로움, 초조함, 지루함을 평정심으로 제압하고 역동적인 찰나로 바꾸는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명상과 인내심은 기다리는 재능을 키우고, 기다림을 역동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이다. 기다림이라는 넓은 천위에 명상과 인내심이라는 수(繡)를 놓으라. 합당한 기다림은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 가장 좋은 시절은 가장 늦게 오는 법이니까.

우산은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머리 위에 지붕을 만든다. 우리는 지붕 아래서 비·천둥·번개·눈·바람 따위를 피한다. 지붕 아래 공간은 불순한 기후를 피해 숨을 수 있는 임시 피난처다. 우산은 갑작스러운 필요에 대응하는 아주 작은 피난처인 셈이다. 사실 우산은 단순하지만 미학적으로 매우 놀라운 도구-사물이다. 작게 접힌 척추를 늘이며 화관(花冠)같이 제 존재를 활짝 펼쳐내는 우산은 우아한 한 송이 꽃이다. 그러나 비 오지 않은 날들의 우산이란 얼마나 난처한 사물인가! 그때 우산은 제 존재 가치를 그 무엇으로도 증명해 보일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님이다. 우산은 “휴대용 지붕, 자신만의 하늘,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속에서 걷게 해주고, 안심시켜주고, 머리 위에서 무한하게 펼쳐진 뿌연 빛을 막아내는 이동식 피난처”(로제 폴 드루아)일 따름이다. 그 용도가 폐기된 채 무뚝뚝한 벽에 걸려 있는 검정 우산은 이미 우리 삶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우산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는지를 보라.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우산은 온몸을 접은 채 제 몸을 두드렸던 비들을 추억한다. 우산은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우산의 기억에 의지해 우리는 삶의 잃어버린 기억의 고리를 이을 수 있다. 삶이 기억과 추억을 겹쳐 쌓으며 만들어진 것이란 사실을 떠올린다면 검정 우산 하나가 우리 삶에 기여하는 바는 실로 크다. 지난여름 갑자기 쏟아진 빗속에서 우리는 우산의 보호를 받았다. 이 박애주의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휴대용 지붕을 만들어주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삶을 발명해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인류가 우산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산들이 우리 삶을 발명한다는 사실을.


박연준(1980~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중앙일보에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하며 등단했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등과 산문집 《소란》이 있다. 시인은 “꽃을 사육하는 아버지”와 “검은 복면을 쓴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다. “사람들이 나의 탄생을 나무라고 있어요”(〈나의 탄생 2〉)라는 고백에 따르면 ‘나’의 탄생은 자랑스럽거나 축복받은, 혹은 아름답고 견고한 탄생은 아니었다. 그래서 “엄마는 빨간 핸드백을 남기고 떠났어요/나는 가끔씩 핸드백 속으로 기어들어가 놀았어요”(〈일곱살, 달밤〉)라는 스산한 기억들이 문득 나타난다. 이 아이는 조로(早老)하고 싶었던 소녀 시절을 지나, 제 안에 열 개의 개구쟁이들과 “뱀이 된 아버지”의 병과 싸우는 투사와 한 송이로 피어났다가 시드는 사자를 품은 채 시인으로 호명당한다. 그리고 명민한 시인이 되어 “펄펄 흩날리는 키스들아/나를 해독해보렴”(〈빨간 구름〉)이라고 노래한다.
  • 201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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