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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속도로 변화하는 도시를 기록하다

작가 정희우

서울이란 도시를 낯선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언제나 ‘공사 중’인 이 도시를? 조금이라도 낡거나 오래되면 참지 못해 결국 허물어내고 경쟁하듯 더 높은 건물을 세우고 마는. 수시로 이정표가 바뀌어 지도검색 앱의 업데이트로도 따라가기 힘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도시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생명체처럼 느껴진 적이 있는가? 정희우는 도시를 기록하는 작가다.
그가 도시를 소재로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였다.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후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무대디자인 회사, 영화제 일에 2년간의 대학교수 생활을 거친 다음이었다.
“소모적인 일들에 지쳐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고 1년은 그냥 놀아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0대 중반, 제 삶을 다시 점검하는 시기였죠. 거리를 두니 저를 둘러싼 환경이 다시 보이더라고요.”

그는 경희대 후문 쪽에서 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83년, 강남 대치동으로 이사했다. 그의 성장기는 강남개발의 역사와 함께했다. 강남이 계속 넓어지고 번화해지고 높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성장했다.


강남은 도시의 모델 같은 곳

시간을 담은 지도_신사역 사거리_장지에 수묵채색, 168×140cm, 2011
“강남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나이 지긋하신 분뿐 아니라 10대, 20대도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저곳이 옛날에는 어땠다’라며. 변화주기가 그만큼 빨랐던 거지요. 지명은 저보다 나이가 많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학교 오가는 길에 사거리를 지나다 보면 청바지 회사 ‘뱅뱅’의 커다란 간판이 금방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그곳을 ‘뱅뱅사거리’라 부르기 시작할 때는 ‘참 웃기다’ 생각했는데, 그게 지명이 되더라고요. 어릴 때는 ‘세상이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가 보다’ 했지만, 나이 들어 객관적인 눈으로 보니 ‘나는 정말 희한한 세상에서 살았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서구 중심의 근대화, 산업화를 강요당했던 아시아의 역사까지 미치더라고요. 강남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델 같은 곳이잖아요? 지금은 어느 지역이나 강남처럼 되려는 것 같으니까요.”

그가 태어난 1973년에 강남의 반포주공아파트가 입주를 시작하고, 다음 해인 1974년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들어섰다. 그가 스무 살이던 1993년 즈음 강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으니 도시와 사람의 성장속도가 같았던 셈이다.

“강남이 성장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니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이런 급속한 변화를 지켜본 증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증인 역할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뱅뱅사거리 근처에 작업실을 얻은 그는 건물 하나하나를 보폭으로 측량해 그림지도로 옮기기 시작했다. 강남의 ‘지금, 여기’를 걸어 다니면서 기록하고자 했다. 구글어스 등 다른 방법을 동원해봐도 직접 걷는 것만큼 정확하지는 않았다 한다. 뱅뱅사거리에서 시작한 그림은 양옆으로 계속 연장됐다. 신사역에서 양재역까지 강남대로 4.2km를 138×167cm 장지 12장에 옮기는 데 4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저 이곳이 중요한 것 같다’는 촉으로 시작했는데, 도시개발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강남대로가 정말 의미 있는 이정표더라고요. 강남대로의 시발점인 한남대교 북단부터 강남개발이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려놓고 보니 뒤에 개발될수록 건물들이 더 높아지는 게 한눈에 보였습니다. 막대그래프처럼.”

담지도_잠원한신타운1_종이에 먹, 74×144cm, 2013
장지에 먹과 채색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사용해서인지 그의 작품 속 강남대로는 담박하고 맑게 느껴진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배경은 제가 유학생활을 했던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도로로, 실제로는 그저 삭막한 장소거든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공간으로 그려져요. 스토리를 덧입힘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는 거지요. 우리가 사는 공간에 새로운 공기, 색채를 불어넣는 게 예술가의 역할 아닐까요?”

4년간의 작업을 2011년 개인전 〈시간을 담은 지도〉로 보여준 그는 2012년 〈Peeling The City〉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건물은 앞에서, 도로는 위에서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강남대로 작업을 했습니다. 강남대로에 있는 거의 모든 빌딩 옥상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지요. 위에서 내려다보면 화살표 표시나 ‘천천히’ ‘좌회전 금지’ 같은 도로 위 글씨들이 눈에 확 들어와요. 거인이 써놓은 낙서 같죠. 아스팔트는 차가 다니는 도로, 군데군데 있는 맨홀 뚜껑은 그 밑에 통신설비나 하수배관이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도시란 사람들이 일정한 약속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고, 도시의 바닥에 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표식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상에 물먹은 종이를 붙인 후 먹을 묻힌 솜방망이를 두드려 문양이나 글씨, 형태가 나타나게 하는 전통기법인 탁본으로 도시의 이런 표식들을 벗겨냈다(peeling the city).

“서양화의 전통에서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빛이나 시선의 방향에 따라 대상이 달리 보이지요. 반면 동양화는 대상 자체에 집중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든 대상을 똑같이 찍어내는 탁본은 동양화의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시점(視點)에 따라 대상이 달리 보이지 않습니까? 사진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탁본을 더 쉽게 하는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도시 표식들을 탁본으로 채집

Peeling The City_벙어리맨홀_ 종이에 먹, 92×143cm, 2012
다음 작업으로 그는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 담장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나무 간판들을 탁본으로 찍어냈다.

“아파트에 관한 책을 읽다 ‘아파트 단지와 외부세계를 격리하는 담이 문제’라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최근에 짓는 아파트 단지 담은 조경 등을 활용해 좀 더 교묘하게 단절을 꾀합니다. 1970~80년대 지어진 아파트 단지 담벼락은 이제 재건축 등으로 사라질 운명이지요. 사회적 의미로 보자면 아파트 단지 담장이 볼썽사나울지 몰라도 개인의 역사에서는 덕수궁 돌담길 이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걸음마를 배우고, 학교를 오가고, 남자친구와 함께 거닐 때 옆에 있었던, 추억이 담긴 공간일 테니까요. 곧 과거 속으로 사라질지 모를 이곳의 흔적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곁에 있으면서도 눈여겨보지 않던 담장들은 탁본을 통해 제각각 주인공이 됐다. 그의 탁본 작품을 보면 ‘담장의 문양이 이렇게 다양했던가?’ ‘이렇게 우아했던가?’ 감탄하게 된다. 붉은 벽돌이나 시멘트벽, 쇠창살로 된 3차원의 담장이 2차원의 흑백으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문양에 더 집중하게 되고, 한지와 먹이라는 재료의 특성상 고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기하학적인 추상작품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일시적 점거자_부분_ 종이에 먹, 2013
강남뿐 아니라 여의도, 이촌동 등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을 다니며 담장을 탁본으로 떠낸 그는 지난해 종로를 휩쓸고 다녔다. 서울의 유서 깊은 상업지역인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종로거리를 걸으며 나무 간판을 찾았다. 종로 1가와 2가는 이미 과거의 흔적이 지워져 나무 간판을 찾기 어려웠고, 종로 3가에서 6가에 이르는 길에서 30여 개를 찾아 탁본으로 떠낼 수 있었다. 대부분 간판은 네온이나 LED 간판으로 바뀌어 있었고, 나무 간판 자체도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90년대까지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깎아냈다면, 2000년대부터는 컴퓨터의 활자체를 바탕으로 기계로 깎아낸 간판이었다. 정희우 작가의 작업실은 지금도 강남 한복판, 논현동에 있다. 그러나 작가가 작업실을 지키고 있을 때는 별로 없다. 지금도 빠르게 바뀌고 있는 도시에서 과거의 유물이 될 것들을 채집하러 현장을 누비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지럽고 삭막한 도시환경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어요. 하지만 제가 성장했고 지금도 살고 있는 환경과 저를 분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작가의 정체성이 되니까요. 이 도시를 최대한 중립적,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지요.”

2008년 이후 거의 매년 개인전을 열어온 그는 9월 30일까지 ‘스페이스K 대구’에서 열리는 기획전 〈도시수집가〉, 10월 ‘가회동 60’ 갤러리의 기획전 〈무현금(無鉉琴)〉에 참여한다.

“‘무현금’은 종박물관, 철박물관 장인들과 협업으로 하는 작업입니다. 이제까지와는 방향이 조금 달라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 201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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