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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으로 우리 시대 현실을 조명

화가 김호석

“어릴 적 할아버지를 따라 사당에 가면 영정 속 고조부의 눈동자가 저를 좇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살아서 저를 보고 계신 것 같았죠. 할아버지는 ‘먹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를 그려낼 수 있지만, 그중 최고는 정신을 그리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다섯 살 때인 그때부터 제 꿈은 줄곧 화가였습니다.”
화가 김호석의 고조부는 1910년 일본의 강제합병에 항거하다 순국(殉國)한 우국지사 김영상으로, 사당에 있던 초상은 조선과 근대를 잇는 인물화가 채용신의 작품이었다. 고종황제의 어진을 그렸던 채용신은 나라가 기울자 전라도로 낙향, 우국지사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채용신이 저희 집에 머물며 작업하는 동안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꼼꼼히 살펴보셨던 할아버지는 제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습니다. 기법보다 예술가 정신을 강조하셨죠. 할아버지는 일본을 이기려면 후손들에게 조선의 얼과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우리나라의 역사, 인물, 풍속 등으로 엮은 천자문인 《대동천자문》을 쓰신 유학자셨습니다. 저도 다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웠고요. 제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할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분도 할아버지입니다. 부엉이를 그리겠다면 부엉이를, 종달새를 그리겠다면 종달새를 잡아주시고는 제가 스케치하는 모습을 지켜보셨죠. 제가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으면 선비화가를 모셔와 사군자와 산수화 등 한국의 전통그림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내 그림은 할아버지의 유산

물고기는 알고 있다_ 종이에 수묵담채, 125×110cm, 2014
8월 16일까지 고려대 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호석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할아버지의 유산”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오늘의 현실을 조명하고 바꾸어나가기를 꿈꾸어왔다. 1979년 중앙미술대전 장려상을 받으며 데뷔한 후 1999년 32세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면서 대규모 개인전을 했던 그는 “이번 개인전은 그때 이후 작품들을 집대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최근작에서는 여백이 더 넓어졌다. 생선의 머리 혹은 꼬리, 밤송이 두 개, 파리 한 쌍, 쥐 한 마리, 미꾸라지 몇 마리 등이 덩그러니 화면에 놓여 있고 나머지는 여백이다. 모두 깊은 사유에서 출발한 그림들로, 이야기의 본질에만 충실하겠다는 당당함과 자신감을 내보인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갔더니 대구탕거리를 할인해서 팔더라고요.

한 마리에 머리가 두 개 붙어 있어 좋아했죠. 사실은 머리 한가운데를 갈라 펼쳐놓은 거더라고요. 한 마리의 머리인데 오른쪽과 왼쪽이 어찌 그리 다른 표정을 하고 있던지. 우리 내면, 그리고 사회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선한 기운과 악한 기운이 다투고 있고, 사회에서는 빛과 어두움이 싸움을 벌이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에서도 선함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내음으로 기억되다_ 종이에 수묵채색, 137×135cm, 2014
우리 국민 모두를 슬픔에 잠기게 했던 지난해 세월호 사건 때 그는 작업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팽목항으로, 아이들이 다니던 단원고로, 추모관으로 달려갔다. 팽목항에서 만난 한 유가족이 낚시도구를 챙기더니 바닷가로 갔다. ‘저건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자식을 집어삼킨 바다의 물고기를 잡아 회를 쳐서 먹겠다는 것인가?’ 분노가 치솟았다. 그 분노는 얼마 안 가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그 유가족은 잡아들인 물고기의 눈을 스마트폰 불빛으로 한참 비춰보더니 다시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내 자식이 어디에 있는지 너는 아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그는 그때의 장면을 물고기와 호랑나비가 만나는 모습으로 그렸다. 물속의 진실을 알고 있는 물고기와 물 밖의 진실을 알고 있는 호랑나비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단원고 교문 앞에 놓여 있던 붕어빵 두 개. 이제 친구에게 그 붕어빵을 전해줄 수 없는 한 학생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추모관에 갔더니 사진 속 죽은 자식의 얼굴과 애타게 사진을 바라보는 부모의 얼굴이 붕어빵처럼 닮았다. 그는 두 개의 붕어빵으로 이 장면들을 담았다.

기억의 빈자리_ 종이에 수묵, 125×110cm, 2015
〈자식인 줄 알았는데 허공이었다〉에는 허공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의 두 팔이 등장한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가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 먹먹함과 마주하게 하는 그림이다. 〈성모〉는 이불 홑청을 널고 있는 파마머리 노파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서울 현저동을 지나다 한 할머니가 깨금발을 한 채 옥상에서 이불 홑청을 너는 모습을 봤어요. 세월의 무게로 몸은 말을 듣지 않지만 양팔을 좍 벌려 홑청을 널고 있었습니다. 따뜻함을 선물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성스럽게 느껴졌지요. 손에 낀 커다란 반지와 시계는 자식이 준 선물이라 한시도 빼놓지 않는 것이겠지요.”

자식인 줄 알았는데 허공이었다_ 종이에 수묵채색, 186×94cm, 2015
그는 “원칙도 소신도 없는 우리 사회의 병폐가 해소되려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 중에는 엄마와 자식 사이 한없이 따뜻하고 친밀하며 애틋한 관계가 드러나는 그림이 많다. 〈내음으로 기억되다〉에는 배달된 장정 소포를 보자마자 입대한 아들의 물건을 꺼내 냄새를 맡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급한 마음에 신발도 벗지 않고 뛰어 들어온 엄마는 아들의 체취를 들이마시며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어리광〉에서는 그 아들이 휴가 나와 엄마 등에 기대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엄마는 ‘어휴 징그러워’라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지만 행복에 겨운 표정이다. 2013년에 그려진 〈어리광〉을 보면서 1995년 작품 〈어휴 이뻐〉가 떠올랐다.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엄마가 서너 살 됨직한 아들을 숨 막히도록 꽉 끌어안은 모습이다. 두 작품을 모두 알고 있다면 ‘그 아이가 성장해 군대 갈 나이가 되었군’ 짐작하지 않을까? 인물, 풍경, 동물, 역사인물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룬 그의 작품 중 특히 가족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따뜻한 인간애가 물씬 느껴지기 때문이다.

“제 가족을 그리려 했다기보다 가족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희망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1년 열두 달 함께 생활하며 미묘한 감정변화를 포착할 수 있기에 가족을 모델로 삼기가 좋긴 하지요.”


서구화에 밀려 희미해진 우리 것 찾기

어리광_ 종이에 수묵채색, 142×142cm, 2013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해도 한지와 먹으로 작업하는 작가가 드문 요즘, 그는 전통에 더욱 파고들었다. 조선시대 회화뿐 아니라 고구려 벽화, 고려 불화, 암각화의 표현 양식, 필법, 회화정신을 연구하고 작품 속에 녹여내려 했다.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암각화 연구로 동국대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 속에 있는 유목민 유전자의 기백을 확인하기 위해 1990년대 초부터 몽골초원으로 달려갔고, 암각화 연구로 이어졌다. 그의 그림에는 한 번에 그은 먹선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백묘법, 화면 뒤쪽을 채색해 은은하게 색이 배어나오게 하는 배채법, 먹이 번지는 효과를 살린 발묵법 등이 자유자재로 구사된다. 인물을 그릴 때 옷은 백묘법으로 간략하게, 얼굴은 배채법으로 피부표현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는 식이다. 여기에 발묵과 여백이 정서적인 여운을 더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액자 속에 넣어 전시하지 않는다. 보는 이가 재료의 특성, 그림의 속살까지 느끼게 하고 싶어서다. 그림 재료도 까다롭게 선택한다. 한지는 닥나무 중에서도 특히 경주의 머구닥으로 주문 제작하고, 한국·중국·일본의 18~19세기 먹을 경매로 입수한다. 쥐 수염으로 만든 붓인 서수필(鼠鬚筆)을 쓰기도 한다.

“머구닥으로 한지를 만들면 번지지 않고 자유자재로 효과를 살릴 수 있어요. 종이가 질기고 반질반질 윤기가 나고 보존성이 좋지요. 서수필은 추사 김정희도 최고의 붓이라고 했습니다. 서수필은 낭창낭창 탄력이 있어 선이 끊어지지 않고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지요. 쥐잡기운동을 했던 중학교 시절, 뽑아놓았던 쥐 수염으로 붓을 주문 제작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날의 화엄_ 종이에 수묵채색, 365×160cm, 1998
그가 궁극적으로 되살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선비정신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또 서구화의 물결에 떠밀려 희미해진 우리 목소리를 찾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 현실에 맞춰 선비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모색해온 게 제 그림의 여정이라 할 수 있지요.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의(大義)를 취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항상 생각합니다.”

그는 이번 전시 후 옛사람들의 자취를 따라 화첩을 들고 전국을 유랑하고 싶다고 말한다. 진선미를 뛰어넘어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이상이 무엇인지 찾고 싶어서다.
  • 2015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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