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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이사를 했다. 기존에 살던 곳은 풀옵션이 장착된 6평짜리 원룸 오피스텔이었다면, 이번엔 옵션이 없는 10평짜리 빌라다. (물론 대출을 꼈다. 대출까지 낀 주제에) 어쩔 수 없이 가구들을 사야 했다. 냉장고부터 세탁기, 에어컨, 옷장, 책상, 책꽂이, 침대, 하다 못해 개침대까지 전부 사들였다. 배꼽에 배가 붙어 있는 격이다. (상상했다. 오, 징그럽다.)

이삿짐 센터를 부르지 않고 화이어볼 친구 아버지의 트럭을 빌려 화이어볼 친구 셋을 데리고 이삿짐을 옮겼다. 돈도 주지 않으면서 밥도 주지 않는 고객에게 화가 난 친구 하나가 분에 못 이겨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삼류 단역 엑스트라 새끼야, 밥도 안 처먹는 게 냉장고는 왜 이렇게 좋은 걸 샀냐?”

“〈냉장고를 부탁해〉 나갈 수도 있잖아.”

“취미가 실연인 새끼가 침대는 왜 이렇게 큰 걸 샀냐?”

“〈나 혼자 산다〉 나갈 수도 있잖아.”

“프론데? 뭔가 준비된 코미디언 느낌이야.”


도무지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없는 친구들과 티격태격 하면서 어쨌든 이사를 마쳤다. 새삼 엄마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들놈은 바쁘다는 핑계로 이삿날 나타나지도 않는데 이 집의 서너 배는 되는 집의 이사를 어떻게 그렇게 다니셨는지. “엄마 이 이사를 그동안 다 어떻게 했어 그래. 대단하네.” “이삿짐 센터 부르면 망고 땡. 데헷.” 새삼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와 친구들은 이삿짐 센터 사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고, 서로 얼굴을 보고서는 경쟁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을 명쾌하게 내릴 수 있었다. 크게 한 번 웃고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기로 했다. 정말 돈을 많이 벌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얼굴들이었다.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강아지와 단둘이 맞은 밤. 약간 섹시하게 땀범벅이 된 몸을 씻으려고 속옷만 입고 옷장을 뒤지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창이 크다는 이 집의 장점은 앞집의 장점이기도 했다.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나의 몸을 내가 방심한 사이에 훔쳐볼 수 있었다.

“앞집에 누군가 있어. 내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같아! 이것 패치 같은 그런 건가?”

“그냥 도둑이야.”

“지금 없어져버렸어!”

“피죽도 못 먹은 것 같은 네 몸을 봤기 때문이야.”


이사온 지 3일째,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빌라 단지와 큰 창에 점점 적응이 되면서 발가벗은 몸으로 각종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은폐엄폐하는 기술을 터득해가고 있다. 그냥 옷을 입으면 될 것을.

연고가 있는 동네도 아닌 탓에 주변 조사도 해야 하고, 강아지가 뛰어놀 수 있는 공원도 찾아봐야 하고, 아직 조립하지 못한 가구도 조립해야 하고, 그중 쓰지 못할 가구 환불도 하러 가야 하고, 집주인 몰래 잘라버린 주방 선반 문짝도 다시 달아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다. 이사라는 게 참 호락호락하지 않더라는 거다. 그래도 아직 이 집이 마음에 든다. 강아지 덕이도 좋아하는 눈치다. 전보다 배를 까뒤집는 횟수가 늘었고 그에 비례해서 난 좀 더 귀찮아졌다. 배를 긁어주지 않는다고 주인 뺨을 때리는 개를 키우고 있다. 팔자다.

초코과자를 건네니 이딴 거 집에 많다고 성을 내며 도로 던지는 네 살짜리 꼬마가 아랫집에 살고 있다. 팬티만 입고 다녀서 왜 팬티만 입고 다니냐고 물으니 집에 바지가 없다고 거짓말을 친다. 친해지기 힘든 타입이다. 언젠가는 친해질 테다. 그리고 이 초코과자를 꼭 먹일 것이다. 앞집에는 잘은 모르겠지만 방송국 PD가 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집에는 몰라도 앞집에는 꼭 떡을 돌릴 것이다. 5층에는 인심 좋은 집주인 할머니가 사시고, 2층에는 그분의 따님이 사시고, 그분의 따님의 따님이 바로 그 팬티소녀다. 그 셋은 많이 닮았다. 재밌다.

이 집에 금방 정이 들 것 같은 예감이다. 쌍욕만 안 했지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앞 건물의 부녀만 제외하면 동네도 고즈넉하니 조용하다. 이 집에서 크게 성공해서 나갔으면 좋겠다는 집주인 할머니, 덕이를 좋아해주는 동네 사람들만 봐도 예감이 좋다.

그리고 한 가지,

이사할 때는 웬만하면 이삿짐 센터 부르세요.

박정민은 영화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G코드의 탈출〉 〈키사라기 미키짱〉,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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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고등학생   ( 2017-01-25 ) 찬성 : 2 반대 : 0
따듯하다. 글도 사람도
   우편물   ( 2016-09-01 ) 찬성 : 4 반대 : 5
뭔가 글이 따뜻하다. 내가 빌라의 주민이 된 기분!
      ( 2016-02-21 ) 찬성 : 8 반대 : 4
역시 센스ㅎㅎ 유머러스도 탑재된 준비된 프로시네요 찡긋
   시나브로   ( 2015-12-19 ) 찬성 : 11 반대 : 6
ㅋㅋㅋㅋㅋ아 웃기다
 "초코과자를 꼭 먹일것이다 "
 ㅋㅋㅋㅋㅋㅋㅋ
   cchann   ( 2015-10-21 ) 찬성 : 36 반대 : 15
이삿짐 옮기는 과정 이야기가 너무 웃겨요ㅋㅋㅋㅋ
 좋은 이웃들과 함께 사는것 같아 다행이네요
 언희에서 소소한 일상글이 따뜻함도 느껴지고 제일 재밌어요ㅎㅎ 늘 잘 읽고 있습니다!
 
   구독   ( 2015-09-13 ) 찬성 : 11 반대 : 8
저도 어릴 때 이사 많이 다녔었는데, 이사하고나서 뭔가 새로우면서도 두렵기도 한 그 모호한 느낌이 참 좋았는데..
   23.9   ( 2015-09-03 ) 찬성 : 17 반대 : 14
그래도 낯섦 속의 설렘! 이사는 꿀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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