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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것은 어디서 다 본 것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송승언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언젠가 우리는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모르는 채. 각자의 손에 각자의 팝콘과 콜라를 들고. 이제 어두운 실내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의자를 찾아서 두리번거리지. 각자의 연인에게 보호받으며. 동공을 크게 열고, 숨을 잠깐 멈추고.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볼 것이다. 우리가 함께 본 적이 있는. 어둠 속에서 사건들은 빛나고. 얼굴의 그늘을 밝히고. 우리가 잊힌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팝콘 한 움큼 쥐려다 서로의 팝콘 통을 잘못 뒤적거리고. 손이 엇갈릴 수도 있겠지. 영화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는 채. 깊이 없는 어둠으로부터. 너와 나는 혼자 나올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그때 너와 나는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보게 된다. 한 손에 빈 콜라병을 들고서.

송승언 시집 《철과 오크》, 문학과지성사, 2015



이것은 연애시인가? 아니다.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은 가정법 아래 쓰인 시, 실제 만난 것이 아니라 우연의 겹침 속에서 만날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 쓰인 시다. 각자 연인이 있는데, 우연히 같은 극장에서 같은 시간대에 같은 영화를 본다. 같은 극장, 같은 시간대, 같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두 사람은 상대를 모른다. 각자는 거리를 유지하고 제 몸에 제 존재를 은신한 채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 사랑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초대하는 일이다. 어디로? 내가 있는 곳, 내가 되어지는 곳,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아니라 나로 머물며 내 존재성이 생성되는 바로 그 자리로! 이 시에서 그런 초대는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자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모르는 채 극장 바깥으로 나간다. 두 사람은 극장 바깥에서 비로소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바라본다.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이것은 연애시인가? 그렇다. 그러나 이 사랑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도 있는 개연적인 사랑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인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백일몽을 그린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그 여자가 존재하는 상황에 참여해서 그 여자의 존재성을 활발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고, 그 여자가 부재할 수도 있는 가능성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연애는 상대 존재를 낳는 산파술이다. 연애를 하는 데는 많은 사회적 비용이 지불된다. 사람들이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연애는 분명 존재 역량의 소모가 가장 많은 일 중의 하나다. 연애는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는 일이고, 여러 가지 소모와 불편이 따르지만, 사랑에 빠진 이들은 자발적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생명 자원이, 물질이건 시간이건 유한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면, 사랑에 집중하는 이 무분별한 투자는 놀라울 만큼 비합리적이다.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동물에게 사랑은 없고 생식을 위한 교미만이 있다. 오직 사람만이 사랑을 하고, 사랑을 위해 온갖 불편과 장애를 기꺼이 감수한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이란 불편한 삶의 가장 세련된 형태다.”(프레디리크 시프테,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사랑은 두 존재의 열림 속에서만 가능하다. 두 입술이 만나 입을 맞출 때, 입술은 열린다. 이때 열림은 존재 교환의 가능성을 향한 열림이다. “열림은 교환을 허용하고, 움직임을 보장하며, 소유나 소비의 포화를 막”는데, 이것은 “재현될 수 없고, 객체로 만들어질 수도 없으며, 어떤 위치 또는 존재로 재생산될 수도 없는 상태”, 즉 망각 안에 머무른다.(뤼스 이리가라이, 《근원적 열정》) 교환의 가능성은 반쯤 열린 두 입술에서 시작한다. 입술은 귀, 질, 항문과 더불어 닫힌 피부 존재에게는 드문 열린 곳이다. 열린 데는 대개 성감대가 집중적으로 발달한 곳이다. 이곳이 사랑의 입구들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 입구로 들어와 존재 안쪽까지 파고 들어간다. 반면 애무의 손길 아래서 입구가 없는 몸은 다시 태어나고, 부분이 뭉개진 전체로서 몸의 포옹은 개별화된 몸의 경계를 확정 짓는 데 기여한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일이 제 “묘혈 파기”라면 극장에서 영화보기는 타자의 “꿈속 들여다보기”쯤 될 테다. 우리는 극장에서 오락의 즐거움을 위해 비용을 지불하고 한두 시간 정도를 보낸다. 영화에 더 집중하려고 “동공을 크게 열고, 숨을 잠깐 멈추”기도 할 것이다. 영화란 의지와 약동의 세계가 아니라 몽환과 허구의 세계다. 영화는 인간의 판타지와 감각적 기쁨을 담은 소우주다. 우리가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거창한 의미가 아니라 감각적 재미와 놀라움, 더러는 공포이거나 웃음이다. 때로는 우주에 대한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모험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꿈속 현실을 진짜 현실인 것처럼 속아주며 울고 웃는다. 그렇게 영화 속에 들어가 현실의 중압감을 벗고 잠시나마 존재의 이완을 겪으며 무질서하게 흩어진 삶의 역동적인 리듬을 되찾는다.

송승언의 시적 화자는 사랑을 아주 희미하게 갈구하지만, 그것에 실패한다. 그 실패에 대해 “내가 온 벤치에 너는 오지 않고 있었다”거나, “우리는 여전히 둘일까 목이 막혔다 개별적인 나무에서 개별적인 꽃이 피었다”(〈여름〉)고 적는다. 서로 모르는 채 한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온 남자와 여자는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본다. 이들이 극장에서 본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이미지, 현실의 판타지일 것이다. 그들은 극장 내부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다. 조금 전만 해도 관객으로 채워져 있던 극장 내부가 텅 비어 있으니까. “텅 빈 극장”이란 우리가 살다 죽는 사회적 환경에 대한 표상일 수도 있고, 영구적 의미를 생성하지 못하는 인생 그 자체에 대한 표상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타오른다. 이 타오름의 중심에 있는 게 욕망이다. 이 타오름 속에서만 우리는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시선의 명징성 아래서 종종 과잉의 상실이 일어난다. 그 상실 중에서 가장 큰 게 죽음이다. 깨어서 무엇인가를 볼 때 이 행위는 살아 있음을 담보로 한다. 시선의 명징성은 죽음에 대한 견고한 거부이기도 하다. “보는” 것들 너머에 많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따라서 “보는” 것들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송승언은 우리를 감싸는 환경, 즉 “보는” 것들의 세계를 “해변”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해변에 버려졌다/알 수 없는 해변이었다”(〈유형지에서〉)고 쓴다. 이곳은 “모든 게 흰빛으로 망각되는” 유형지다. 우리의 삶은 이 유형지 속에 내팽개쳐진 채 존재한다. “이곳에 나를 버린 게 누구인지/생각하지 않았다 탈출을/꿈꾸지 않았다 알 수 없는//해변을 걸었다”(〈유형지에서〉).

이 유형지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우리는 깨어 있고, 알 수 없는 해변은 넘쳐나는 빛을 받아 빛난다.


송승언(1986~)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1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철과 오크》는 그의 첫 시집이다. 송승언은 낯선 언어, 낯선 감각으로 우리 문단에 막 들어선 젊은 세대 시인 중 하나다. 그의 시에는 ‘거대 서사’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고, 거대 서사에서 쪼개져 나온 작은 삶들이 우글거린다. 다시 말해 사소한 생활, 사소한 감정을 시로 쓴다. 그는 “지엽적인 삶”에 의식을 집중하는데, 그 삶은 살지도 죽지도 않은 채 그냥 무한히 자라나는 삶이다. 이 “지엽적인 삶”에는 영웅적인 승리도 인생의 막을 내려야 하는 큰 실패도 없다. 밋밋한 삶과 그에 따르는 권태와 지루함만이 있다. 그런 “지엽적인 삶” 주변으로 모호한 이미지들이 바글거린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고, 여름과 겨울이 차례로 닥치는 공원, 교실, 숲, 과수원, 야영지, 극장 등등에 “지엽적인 삶”이 만드는 이미지들이 번식하고 퍼져 나간다. 어쩌면 그는 그 모호한 이미지 채집자일지도 모른다.
  • 201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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