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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삶을 찾는 게 내 그림의 여정

화가·일러스트레이션 작가 노석미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노석미 작가의 작업실 겸 집은 서울 근교라기보다는 강원도 홍천이나 횡성에 더 가까운 산골에 있었다. 고양이그림 판자가 붙어 있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니 별세계가 펼쳐졌다. 나지막한 산들에 둘러싸인 양지바른 땅의 작은 정원에는 작약·양귀비·장미·데이지꽃·캐머마일꽃 등이 한껏 청춘을 구가하고 있었다. 옆의 낮은 땅은 작가가 푸성귀를 길러 먹는 밭이다. 차를 마시는 동안 고양이들이 살금살금 우아한 걸음걸이로 지나갔다. 작가는 “네 마리 모두 늙은 고양이라 우리 집이 고양이들의 실버타운이 됐다”고 말한다. 고양이는 작가의 그림과 책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우리 모두 우주의 먼지와 같은 존재

서울내기 작가는 16년 전인 20대 후반에 서울을 탈출했다. 적은 비용으로 작업실을 마련해야 했던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처음 들어갔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농가주택 화장실에는 아래로 뚫린 구멍이 없었다. 용변을 보면 재를 뿌려가며 차곡차곡 쟁여 놓았다 벽에 뚫린 구멍으로 밀어 넣어 밭의 거름으로 쓰는 구조였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시골생활을 그는 겁 없이 감행했다. 그 후 포천읍·동두천시를 거쳐 30대 후반에 지금의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서울탈출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서울에 있을 때는 언제나 시끌벅적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시골로 옮겨간 후 처음 6개월은 적응하기 어려웠죠. 저녁 7시면 버스가 끊기고, 9시면 주변 불빛이 모두 꺼져 깜깜했습니다.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죠. 외롭고 심심했어요. 한 번도 그렇게 혼자 있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내가 그림 하나 그리겠다고 왜 이러고 있나’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작업량도 많아졌고요. 그게 본격적으로 제 작업을 시작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돈 때문에 여기저기 기웃거리지는 않겠다. 내가 하고 싶은 작품만 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그러려면 가난을 감수해야겠더라고요. 돈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어서인지 ‘있으면 쓰고 없으면 굶지’라는 배짱이었습니다. 삶의 조건 중 첫 번째가 돈이 아니었던 거지요. 대신 스스로 만족하며 잘살고 싶었습니다. 사람마다 만족감의 기준이 다른데, 저는 마음이 편한지 아닌지가 기준이 됩니다. 나 생긴 대로 사는 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20대 때 아무 조건 없이 서울의 좋은 작업실을 내주겠다는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했어요. 누구한테 빚진 기분으로 작업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비닐하우스를 치고 살아도 내 힘으로 사는 게 속 편했어요.”


그는 “시골에 살면서 점차 자연을 발견하게 되고 동식물에 대해 깊은 애정이 생겼다”고 한다.

“짧게 살다 가는 동식물의 전체 생애를 관찰하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내 삶도 관조하게 되고, 길고 짧은 차이는 있어도 우리 모두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느낍니다. 그러면 삶에 대한 애정이 더 커져요. 자잘한 일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지요.”

Green cat_ 130.3×97cm, acrylic on canvas, 2008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모습 그대로 명쾌하게 살려는 작가의 태도가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노석미 작가의 작품은 극도로 간결하다. 단순한 구도, 단순한 형태에 선명한 색대비가 경쾌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그는 그림의 대상을 멀리에서 찾지 않는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대하는 자연, 함께 사는 고양이, 그림을 그리든 밭을 일구든 케이크를 굽든 언제나 노동을 하고 있는 그의 손 등 그와 가장 가까운 대상을 등장시킨다. 그렇다고 대상을 사실적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무엇을 그렸는지 불분명한 그림도 있다. 자신이 느낀 대로 그리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작가는 어린이 포스터 같은 형태로 그림에 문자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거위 머리와 ‘나는 왜 당신과 만난 것일까요?’, 산속의 집들과 ‘억울한 마음에 한번 가보기는 했죠’, 꽃이 꽂힌 화병과 ‘나도 한때는 순진하고 상냥했는데’라는 글귀가 함께 등장하는 그림이다. 그림과 글 사이 관계는 알쏭달쏭하다.

정원에서(In the garden)_ 145.5×112.1cm, acrylic on canvas, 2014
“어린이가 그린 포스터를 보고 독특하다 생각해 시작한 작품입니다. 문학을 좋아해 평소 소설을 많이 읽습니다. 그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텍스트 두 가지를 모두 보여주고 싶어 이런 형식을 취했죠. 이미지와 텍스트는 연결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합니다. 둘이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현상이 재미있어요.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반응하니까요. ‘대체 뭘 그린 거냐?’고 묻는 분도 있지만,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뭘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라’고 하죠. 모든 예술에는 메타포(은유)가 들어가니까요.”

그의 그림은 과감한 색대비로 눈길을 끈다. 〈정원에서〉는 검정색 하늘과 파란색 땅, 녹색 나무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나무 뒤에 등지고 서 있는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정물〉에는 흰 탁자 위에 빨강·파랑·연노랑·검정·고동색 등 총천연색 물건이 놓여 있다. 각각의 정물을 구분하는 것은 색깔이다. 〈빛나는 손톱〉은 녹색 자연을 배경으로 연푸른 손을 클로즈업해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색감이 돋보인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원색, 보색대비는 작가의 거침없는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형태보다 색 중시, 색으로 감성 표현

정물(Still life)_ 100×80.3cm, acrylic on canvas, 2014
“저는 형태보다 색을 중시해 색으로 제 감성을 표현하는 편입니다. 색감은 타고나는 것 같아요. 어릴 때 어머니가 우리 옷을 직접 뜨개질해 입히셨는데, 미술공부를 해본 적 없는 어머니의 색실 배합이 남달랐어요.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파격적인 보색대비로 남다른 감각을 보이셨죠. 색마다 본래 지니고 있는 감성이 있지만, 색과 색이 만나면 변화무쌍하게 바뀝니다. 공부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라 생각해요.”

홍익대 회화과 90학번인 그는 그림도 누구한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대학시절 모두가 무채색으로 추상화를 그릴 때 저는 원색으로 그렸어요. ‘훌륭한 미술가가 되겠다’며 어릴 적부터 꿈을 키워온 친구들이 많았지만, 저는 ‘미술이 싫어지면 안할 거야. 질리고 싫은 일을 뭐 하러 해?’라고 했죠.”

바다와 여자(Woman and sea)_ 5.5×27.3cm, acrylic on canvas, 2008
그렇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미술을 놓아본 적이 없다. 꾸준히 개인전을 열고,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하고, 그림과 글이 함께 있는 책을 내고, 잡지나 책의 일러스트를 담당하고, 기업과 협업을 하면서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올해에도 3~4월 서울에서의 개인전에 이어 10월 부산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고, 지난 2월에 출간한 《그린다는 것》을 비롯해 책도 두세 권 펴낼 예정이다.

“예술가는 동시대 사람들이 느끼고 고민하는 바를 표현하고, 그들의 일상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미지를 복사해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하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친구와 자잘한 아트상품을 만들어 홍대 앞에서 팔기도 했죠. 그게 홍대 플리마켓의 시작이었어요. 매체에 일러스트를 기고한 후 제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아직은 미술관 문턱이 높아 전시장에 오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작가도 있지만, 저는 이렇게 여러 경로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왜 당신과 만난 것일까요?(How come I happened to meet you?)_ 25×19cm, acrylic on paper, 2006
그는 미국·스웨덴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미국과 스웨덴 전시의 제목은 ‘You are so brave!’(용감도 하시네요)였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를 찾았던 미국의 화가 친구, 중국 여행길에 우연히 만났던 스웨덴 친구가 주선한 개인전이었어요. 미국 개인전에는 우리나라 전시 때보다 많은 관람객이 찾아와 ‘네가 아티스트냐?’며 따뜻하게 포옹해주더라고요. 스웨덴 전시는 문화재단에서 일하게 된 친구가 주선한 팝업 전시였는데, 제 작품을 본 화랑 관계자가 다시 전시초청을 해 두 군데에서 했죠.”

빛나는 손톱(Shiny nails)_ 162.2×130.3cm, acrylic on canvas, 2008
지난해 전시 일로 북유럽에 간 김에 그는 오로라를 보겠다고 18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북극지방을 찾았다.

“하루 중 해가 떠 있는 시간이 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어요. 어둡고 춥고 우울했죠.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눈밭에서 추위에 떨며 오로라를 기다리지만, 못 보고 가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4박5일 동안 오로라를 두 번 봤는데, 상당히 운이 좋은 거라고 해요. 오로라가 나타나는 순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일제히 카메라를 들이대죠. 그런데 실제 오로라는 사진처럼 아름답지 않아요. 초록색이 감도는 게 싸한 느낌이 들지요. 북유럽에서 왜 호러문화가 발달했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래도 움직이는 오로라를 제 눈으로 보니 신기했습니다.”

그가 촬영한 스마트폰에는 오로라가 나타나지 않았다. 노출을 길게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 속을 파고들던 추위, 촉감 등 그곳에서의 느낌은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한다. 낯선 환경에 거침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수확이다. 이 도전적인 작가는 특히 젊은 팬이 많다. 그의 그림을 사기 위해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모았다는 사연도 접했다 한다. 젊은 층이 왜 그의 작품, 메시지를 그렇게 좋아할까? ‘나답게 사는 법’을 보여주기 때문 아닐까?

“남에게 보여주기 전에 내가 먼저 내 작품의 독자이자 관람객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계속 나를 들여다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본래의 자신을 외면하고 자꾸 다른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려 들 때 힘들어지죠. 지금은 40대 중반인 제가 하고 싶은 말, 그리고 싶은 욕구를 표현합니다. 그때그때에 충실한 거지요. 그것뿐이에요.”
  • 201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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