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최수진

〈쓰루더도어〉로 무대의 지평을 넓히다

글 : 유슬기 TOPCLASS 기자  / 사진 : 하지영 

누군가를 소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인맥이다. 누구의 동생, 누군가의 언니, 어머니가 누구, 아버지가 누구… 하는 식이다.
뮤지컬 〈쓰루더도어(Through the Door)〉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배우 최수진을 소개하는 데 그런 꼬리표는 사족이 되겠구나.
동생의 그늘이 더는 그를 가리지 못했다. 무대에서 반짝이는 배우, 최수진을 만났다.
“최배우. 만날 옆방에서 연습하는 거 훔쳐 듣다가 무대에서 하는 거 보니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 정도 연습해야 언니처럼 잘할 수 있구나.”

뮤지컬 〈쓰루더도어〉를 보고 난 뒤 소녀시대 수영이 SNS에 남긴 글이다. 한집에 사는 자매는 옆방에서 연습하는 소리, 늦은 밤 발소리를 죽이고 집에 들어오는 소리 등을 공유한다. 최수진은 연습실에 가는 대신 주로 집에서 연습한다고 했다. 연습실을 오고가는 시간, 대기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을뿐더러 집안에 전문적인 모니터 요원(?)이 두 사람이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성악을 하시니까 노래를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세요. 소리를 내는 법이나 가사를 전달하는 방법 등에 대해 조언을 해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죠.”

성악 하는 어머니와 어린 시절 아이돌로 데뷔한 동생을 보며 자랐지만 ‘배우’의 꿈을 입 밖으로 내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범한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 역시 인문계로 진학했다. “앞으로는 중국통이 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할 정도로 순종적인 딸이었다. 그랬던 딸이 뮤지컬 한 편을 보고 달라졌다.

“〈토요일 밤의 열기〉라는 작품이었어요. 배우들이 무대 위를 누비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 객석에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배우가 될 준비를 시작했죠. 아버지 몰래요.”

몰래 레슨을 받고, 몰래 연습했다. 레슨실로 들어가기 전에 연습실에 모여 있던 배우들의 기에 눌려 ‘내가 과연 저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작품 한 편을 마칠 때마다 가족 같은 사람들을 얻었다. 그들과 함께한 무대 뒤편의 모습,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그의 애정은 최수진의 SNS를 가득 채우고 있다.

“사람을 좋아해요. 돌아보면 인복도 많았고요. 어머니가 ‘나가서 그 사람들이랑 살아라’고 하실 정도로요. 참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일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들의 아이디어로 채워진 공연


〈쓰루더도어〉는 영국의 작가 주디 프리드와 미국의 작곡가 로렌스 마크 와이트가 협업한 작품이다. 2008~2009년에는 런던에서 쇼케이스를 갖고, 2011년에서는 뉴욕에서 리딩 연습을 거친 뒤 2015년 서울에서 초연 무대를 올린 독특한 작품이기도 하다. 기존 라이선스 작품과는 달리 배우와 스태프들이 만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커서 매번 새로운 무대에 서는 느낌이라고 했다.

“초연이라 좋았던 점은 저희가 채워갈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는 거예요. 서로 아이디어를 내다 보면 더 풍성해지는 면이 있거든요. 저희끼리 얘기한 부분이 관객에게 반응이 오면 더 보람이 있죠.”

미국과 영국에 원작자가 있는데, 남자 주인공 레니가 여자 주인공 샬롯에게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라는 애드리브를 선보이거나, 레니의 비열한 직장 상사가 한국에서만 가능한 ‘속어(어유~ 귀여운 XX)’를 쓰는 건 이런 아이디어의 실현이다.

한때는 뜨겁게 사랑했지만 이제는 바쁜 일상에 매몰돼 사랑보다 현실을 살게 된 7년차 부부 레니와 샬롯, 샬롯은 6년째 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소설가다. 어느 날 다용도실 문을 여니, 그가 만든 소설 속 세계가 펼쳐져 있다. 주인공인 카일 왕자는 자신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샬롯에게 사랑을 느낀다.

“어려운 삼각관계라 고민을 많이 했어요. 최수진으로서는 고민이 많았는데, 차라리 샬롯으로 나쁜 여자가 되는 게 더 설득력이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샬롯은 자신이 쓴 동화 같은 세계를 꿈꾼 거니까요.”


어떻게 보면 ‘딱 욕먹기 좋은’ 상황, 그럼에도 샬롯의 감정과 행동이 이해가 된다. 얄밉기는커녕 사랑스럽다. 최수진은 그 공을 상대 배우에게 돌린다.

“샬롯이 욕을 먹지 않은 건 레니가 더 나쁘게 해줬기 때문이에요. 정말 영리한 배우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가 돋보이려면 그러지 않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서로 살려주려고 하니까 고맙죠.”

최수진은 공연장 가는 발걸음이 즐겁다. 다양한 노래를 많이 하는 것도 좋고, 작품이 밝고 해피엔딩인 것도 좋다. 샬롯이 행복해지면 함께 행복해지는 기분이 든다. 〈살인마 잭〉을 시작으로 〈벽을 뚫는 남자〉 〈싱잉인더레인〉 〈올슉업〉 등 다양한 작품을 해왔다. 첫 작품부터 주연을 맡은 건 운이 좋았지만 그만큼 감당해야 할 무게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래요. 하루는 잘했는데 또 못하는 날도 있거든요. 그런 기복을 느끼면 갈등이 돼요. 내가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작품을 할 때마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쓰루더도어〉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어요. 나쁜 평가가 덜하긴 했지만, 그런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정도로 제가 자라기도 했고요.”


샬롯이 웃으면 나도 좋아


나쁜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건 동생에게 배웠다. “악플 하나하나를 신경 쓰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정정당당하게 오디션을 보고 합격한 작품에 ‘동생 덕에 배역을 땄다’는 오해를 받을 때도 의연해지려고 했다. 대신 작품에 집중했다. 배우가 그 작품을 잘 해석해내면 더 이상 필요 없는 구설에 시달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객석이 다 채워지지 않은 공연도 있었지만, ‘음악 하는 사람에게는 천사가 함께한다’는 동료 배우의 말에 힘을 냈다.

“어떤 작품을 다시 하고 싶으냐고 누가 물으면 〈김종욱 찾기〉를 다시 하고 싶어요. 그전에는 여자보다는 멀티맨이나 김종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면, 제가 했던 시즌에는 여자의 드라마와 이야기에 더 집중했거든요. 어떤 공연이든 커튼콜을 할 때가 너무 좋아요. 공연하기 전에는 너무 힘든데 커튼콜을 하면 다 잊어요. 특히 모든 작품이 ‘마지막 공연’이 있기 때문에 ‘막공’을 하고 나면 또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되고요.”

실제로 〈쓰루더도어〉의 커튼콜에서 최수진은 신나게 춤을 췄다. 커튼콜 마지막에 등장한 샬롯은 짧게 ‘오늘 공연도 무사히 마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린 뒤, 흥겹게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배우들은 흡사 오누이처럼 보였다.

“저도 배우가 아니었다면 ‘덕후’가 되었을 것 같아요(웃음). 어떤 배우를 좋아하면 그 배우의 공연을 여러 번 보기도 하거든요. 처음에는 사람들과 정 붙이는 게 어려웠어요. 서로 탐색하고 실없는 이야기 주고받는 시간이 참 힘들었는데, 지금은 이 사람들과도 곧 가족처럼 친해질 거라는 걸 아니까 괜찮아요.”

어떤 배우의 ‘덕후’였느냐고 물으니 연습생 시절, 배우 윤공주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 이름만으로도 작품에 기대를 갖게 됐었다고. 이날 〈쓰루더도어〉의 객석을 보니 ‘최수진 덕후’도 제법 눈에 띄었다. 최수진의 이름을 보고 무대를 찾은 이들이다. 마지막으로 ‘로맨스’에 대해 물었다. 샬롯이 ‘문을 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니까.

“남자친구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사랑은 앞뒤 안 가리고 해야 한다고요. 좋아하는 사람인데, 연락을 할까 말까, 찾아갈까 말까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위치에 있든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다 했을 때 후회가 없는 것 같아요. 그게 로맨스 아닐까요?”
  • 201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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