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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상상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힘

화가 유선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인간이 살 것 같지 않은 이상적인 풍경은 예로부터 동양이나 서양이나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소재였다. 유선태 작가의 그림에도 첩첩이 높은 산에 호수나 계곡, 폭포가 등장하고, 숲 속 풍경이 우리를 고요하고 아늑한 정경으로 이끈다. 그의 그림은 그러나 풍경에서 끝나지 않는다. 책과 축음기, 사과, 이젤, 타자기, 음악부호인 포르테 등이 전면에 등장하거나 공중에 둥둥 떠 있다. 일상의 익숙한 이미지들을 엉뚱한 곳에 가져다놓아 낯설게 만드는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 기법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는 “초현실주의를 의식하며 그리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자전거 탄 인물은 작가의 분신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장흥아틀리에에서 유선태 작가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그림들이 해독되는 듯했다. 그가 그린 풍경 속에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작은 인간이 등장한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틈만 나면 산과 들을 찾아다녔어요. 두 시간여 자전거로 달려가서는 자연 속에 가만히 앉아 있곤 했습니다. 강가나 냇가, 호숫가에서 물을 응시하며 앉아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어요. 간혹 뱀만 후다닥 나타났다 사라질 뿐, 사람 그림자도 없는 곳이었죠. 강 가운데에 있는 섬에서 텐트를 쳐놓고 낚시하고 밥해 먹으면서 사나흘씩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새벽 물안개에 싸이면 섬이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죠.”

말과 글(그림 속의 그림)_ 117×91cm, Acrylic on canvas, 2014
수업시간에도 교과서에 실린 그림 한 장에 빠져 혼자 딴 세상에 가 있곤 하던 소년은 미술 말고는 하고 싶은 게 없었다.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 제8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20여 년 유럽에서 활동해오던 그가 한국에서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부터. 요즘은 주로 한국에 기반을 두고 가족이 있는 파리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끊임없이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고 마는 자전거가 인간의 숙명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저 역시 항상 목말라 있습니다. 제 그림을 볼 때마다 부족하다고 느껴요.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다시 붓을 잡고 그리게 됩니다. 죽을 때까지 완성은 없는 거지요. 내 그림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버려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욱 빠져들고, 좋아하고,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지요. 다음 그림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저는 무슨 ‘주의’에 매이는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이란 이 그림에서 다음 그림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것은 작가의 마음속 진실을 찾아나가는 과정, 자신을 솔직하게 똑바로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말과 글(옛길을 따라)_ 162×130cm, Acrylic on canvas, 2014
작가의 마음속을 그린 듯한 그림은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이끌며 꿈꾸게 한다. 사춘기 시절 빨려 들어가듯 자연 속으로 들어가 온전한 평화를 누렸던 작가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풍경, 혹은 동서양 화가가 그렸던 장엄한 풍경을 화폭에 그려 넣는다. 특정 장소가 아니므로 보는 이마다 각자 마음속 풍경으로 찾아들게 하는 장치다. 그는 자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풍경이나 책, 이젤, 사과, 축음기, 저울 같은 오브제들을 “그림을 만드는 요소들”이라고 설명한다. 작곡가가 음표를 그리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듯 그는 이 요소들을 이리저리 다양하게 조합하면서 그림 속 세상을 창조해낸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인간은 새롭게 창조된 세상을 누비며 완상하는 작가 자신이다. 그렇다면 책이나 축음기 같은 물건들은 왜 공중에 떠 있을까?

“파리에서나 서울에서나 옛날 물건을 보러 벼룩시장을 자주 찾아요.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된 물건을 볼 때 버려진 물건, 시간에 의해 밀려난 물건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정지된 시간 속에 무중력 상태로 둥실 떠 있는 물건을 집어 드는 느낌이죠. 시간을 과연 과거·현재·미래로 딱 잘라 구획할 수 있을까요? 그림을 그리다 붓을 물에 씻을 때면 중·고등학교 시절 강가에서 들었던 물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해요. 과거·현재·미래는 이렇게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 틈입하고 있지 않을까요?”


동서양 미술의 전통 가운데서 균형 유지

왼쪽부터
말과 글(예술의 숲)_ 162.2×130.3cm, Acrylic on canvas, 2010
말과 글(온고이지신)_ 162.2×130.3cm, Acrylic on canvas, 2011
그는 헌책방에서 오래된 책들에 폭 싸여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고, 혼자 사는 집에서 60개가 넘는 화분에 고무나무·풍란·다육식물 등을 기른다. 식물을 키우며 삶과 죽음, 생명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의 그림에도 빼곡하게 들어찬 책과 화분이 등장한다.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오래된 축음기나 저울, 타자기 등은 설치작품으로, 다시 그림으로 재탄생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이렇게 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들이다.

“항공박람회에서 프로펠러를 처음 본 마르셀 뒤샹은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만들어내겠는가?’라고 했다 합니다. 축음기 역시 과학과 기능, 아름다움이 집결된 형태 아닐까요? 포르테 부호는 부드러운 곡선이 유연하면서 균형미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지요. 사과는 감성을 자극해 보는 이를 그림 속 여행으로 안내하는 존재입니다.”

말과 글(30년의 이야기)_ 181×227cm, Acrylic on canvas, 2014
그의 그림에는 물음표 모양(혹은 좌우가 뒤바뀌어)의 독특한 나무가 계속 등장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말과 글-아뜰리에 풍경〉에서 벽면을 노랗게 칠한 방에는 책, 이젤, 화분, 축음기 등 그가 즐겨 그리는 그림 요소들이 놓여 있거나 떠다니고, 출구는 그가 그려온 풍경으로 이어진다. 〈말과 글-하나를 위한 25〉에서는 자신의 대표작품 25점을 한 화면에 다시 그려 넣었다. 그동안의 작업을 되돌아보는 작품이다. 〈말과 글-예술의 숲〉에는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서양 거장들의 작품이 등장하고, 〈말과 글-옛 그림의 향기〉 〈말과 글-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말과 글-동양의 정신〉에는 강희안 등 동양 작가들의 작품이 등장한다. 유럽에 거주하면서 서양화 재료와 기법으로 작업했지만, 동서양 미술의 전통 가운데서 균형을 유지하며 정체성과 작업방향을 찾으려 했던 작가의 고민이 엿보이는 작품들이다.

“청전 이상범 선생이나 소정 변관식 선생의 산수화를 좋아해요. 동양화의 준법(입체감 표현 기법)에도 관심이 많고요.”

말과 글(책 속의 풍경)_ detail
‘말과 글’ 시리즈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전면에 ‘말과 글’이라고 조그맣게 써놓은 글씨가 보인다. 동양화의 준법을 생각하며 서예같이 흘려 쓴다고 한다.

“10년 전 늦가을, 양평에서 작업하고 있을 때였어요. 아틀리에 앞 아름드리 나무의 잎이 모두 떨어져 있더라고요. 말이 모두 떨어지고 오로지 침묵뿐인 듯 느껴졌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말과 글로 회자되잖아요? 말과 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요.”

말과 글(책 속의 풍경)_ 91×117cm, Acrylic on canvas, 2013
유럽에서는 평면과 입체작업을 오가며 작업해왔다는 그는 “한국은 화가와 설치작가를 구분하는 풍토가 강해 그림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입체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그림 속의 자전거 탄 인물이 입체가 되어 밖으로 나와 지구본 위, 나팔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그림 속 풍경을 향해 달려가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이렇게 서양과 동양, 현실과 초현실, 평면과 입체,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조화와 균형을 꿈꾼다. 예술과 삶 역시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예술을 특별한 사람의 성스러운 직업으로 너무 미화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예술 역시 육체적인 노동을 겸하는 현실적인 일일 뿐입니다. 극히 소수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치열한 직업이지요.”

그가 파리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딸 이야기를 할 때에는 강한 부성애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의 아내 역시 파리 제8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화가. 아내와 함께 한국에서 수차례 부부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그는 “이제 아내가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고 싶다”고 한다. 올해에도 여러 아트페어에 참여한다는 그는 현재 그동안의 작업을 집대성해 작품집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고,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가나아트센터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지금도 미술 외에는 달리 하고 싶은 게 없고, 그리고 싶은 게 너무 많다는 작가는 “현실을 상상 속으로 밀어 넣는 힘, 상상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힘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그의 그림은 그렇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로 하여금 꿈꾸게,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한다.
  • 201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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