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물〉 이병헌 감독

자유로운 영혼이 숨 쉬는 시절 ‘청춘’

글 : 변희원 조선일보 기자  / 사진 : 김선아 

수필가 이양하는 5월의 신록(新綠)을 예찬(〈신록예찬〉)하면서 그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고 했다. 청춘이 신록이라면 스물은 그 신록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때다. 스물이면 인간의 몸은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성인이 되는 동시에, 처음 학교가 아닌 사회를 접하게 된다. 스무 살을 지나온 이라면 ‘스물’이란 단어에 가슴이 아련해지고, 그렇지 않은 이라면 가슴이 뛰기 마련이다.
이병헌(35) 영화 〈스물〉(3월 25일 개봉)은 개봉 전 예매율 40%를 달성했고, 4월 6일 현재 누적관객 226만을 동원했다. 개봉 일주일 만에 손익분기점(누적관객 150만 명)을 넘었다. ‘스물’이 주는 아련함과 설렘이 대중적으로 통한 셈이다.

이 감독은 “30대 중반이 돼서 생각해보니까 스무 살은 아련하고 재밌는 때였다. 그래서 스물이라고 하면 별거 아닌 이야기임에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 했다.

“캐릭터를 갖고 놀아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제일 잘 아는 게 남자 녀석들이니까, 제가 잘 놀 수 있는 멍석을 깐 거죠. 그런데 이 캐릭터들이 막 뛰어놀아도 스무 살이라면 관객들이 잘 봐줄 것 같았어요. 서른 살보다는 스무 살이 귀엽고 풋풋하잖아요.”

영화 〈스물〉에는 딱히 사건이랄 게 없다. 갓 스무 살이 된 세 남자의 이야기가 수다처럼 펼쳐진다. 치호(김우빈)는 하릴없이 집에서 가만히 지낸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는 부모에게 용돈을 달라고 온갖 투정을 부리면서 여자를 유혹하며 논다. 만화가가 되고 싶은 동우(이준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미대 입시를 준비한다. 셋 중 유일하게 대학에 간 경재(강하늘)는 공부를 잘하고 성공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다. 하지만 캠퍼스에서 만난 선배를 짝사랑하면서 그의 목표도 수정된다. 이들이 한심해 보인다면 각자의 스무 살을 되돌아보자. 어렸을 때처럼 현실을 무시하고 꿈을 꿀 수도 없었고, 연애라는 게 TV드라마처럼 달콤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스물에 페이스북을 창업했지만, 대부분의 스물은 치호와 동우・경재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감독은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이병헌 세 명이 떠들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치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가만히 지내는 것이나 스무 살에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동우, 그리고 지키지 못하지만 목표와 계획을 세우는 경재에 다 내 모습이 조금씩 들어가 있다.

하물며 술에 취하면 술잔을 빠는 경재의 술버릇까지 비슷하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스무 살의 저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대입(大入)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그냥 입대했어요. 그때 그렇게 군대를 가버린 건 조금 후회가 되네요. 저는 지금도 어설프지만 그때 더 심했어요. 어떤 창피한 짓을 했다, 이런 수준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요.”

제대 이후, 이 감독은 “대학 졸업장을 받아오면 카드빚을 없애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에 대학에 들어갔다. 제대 후 술을 마시면서 놀다가 카드빚이 생겼을 때였다. 대학에서 국제통상학을 전공했지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졸업하는 정도였다. “뭘 배웠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졸업 전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시나리오에 재미를 느끼고 영화 현장에서 일을 하고, 시나리오 습작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는 수첩에 별점을 매기며 볼 정도로 좋아했고, 영화 시나리오가 소설보다 재미있었다. 영화사에서 일하면서 감독들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면서 배워갔다. 이 감독은 “하고 싶은 일, 영화를 찾기 전까지 답답한 시간을 보냈다. 만약 하고 싶은 걸 찾느라 방황한 시간을 스물이라고 한다면 나의 스물은 꽤나 길었던 셈이다”라고 했다.


영화계에서 ‘말맛 잘 내는 작가’


그는 강형철 감독의 〈과속 스캔들〉 〈써니〉 〈타짜: 신의 손〉 등을 각색했고, 로맨틱 코미디 〈오늘의 연애〉의 각본을 썼다. 영화계에서 ‘말맛 잘 내는 작가’로 알려졌지만 정작 이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는 세 번이나 실패했다. 이런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가 2012년 서울독립영화제를 통해 관객을 만났다. 이 작품은 영화감독 준비생 이병헌과 영화계 입성을 꿈꾸는 그의 친구들 이야기로 촌철살인의 대사와 다큐멘터리라는 독특한 형식 때문에 영화제에서 매진을 기록하며 관객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막상 개봉했을 때 든 관객은 3500명. 흥행엔 실패했지만 이 영화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지금 〈스물〉의 제작사 대표를 만나게 됐다. 그는 제작사 대표에게 “내 시나리오와 영화를 전형적인 틀로 수정하길 원한다면 못 하겠다”고 했다. 그는 “원래 일기 쓰듯, 수다 떨 듯이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 상업영화에서 요구하는 틀에 맞춰서 쓰는 건 힘들다. 다행히 이번 영화 하면서 간섭을 안 받았다”고 했다.

“개봉 전부터 관객 반응이 좋다”는 말을 건네자 이 감독은 “〈힘내세요, 병헌씨〉 때 기대했다가 실망을 해서 이번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다음 영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만 관객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시나리오 열 편 쓰면 그중에 두세 편은 팔리는 편이다. 아직도 써놓은 게 많고, 만들고 싶은 영화도 많다”고 덧붙였다.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해요. 편하기도 하고요. 〈미스 리틀 선샤인〉이나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처럼 블랙 코미디를 즐겨 보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도 코미디 영화로 생각하고 봐요. 〈첨밀밀〉이나 〈그녀에게〉 같은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신파 멜로 영화도 해보고 싶네요. 공포 영화도 해보고 싶은데 귀신을 무서워해서 힘들고요. 눈 감고선 샤워도 못 할 정도로 겁이 많거든요.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보다 어떻게 웃겨야 할지 고민하는 게 훨씬 즐거우니까요.”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스물〉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 감독은 “시나리오 쓰면 혼자 연기도 해보고 혼자 웃기도 한다. 그렇게 혼자 잘 노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웃긴 대사를 쓰는 것도 “상황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캐릭터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상상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로 딱히 비결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영화를 만들면서 20대들을 꽤나 만났다.

그는 “아는 동생들과 제작사 대표를 통해 20대 초중반의 남녀들을 만났다. 인터뷰도 해봤고, 술도 같이 마셨다. 내게 요즘 20대들은 멀고도 셌다. 못 알아듣는 언어도 꽤나 많았고, 남녀 구분없이 어울려 노는 것도 낯설고, 섹드립(야한 농담이나 발언)도 많이 하고.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들이 고민하는 지점은 세대와 상관없이 비슷했다. 내가 하는 코미디에 이들이 웃을 것이란 자신감도 들었다”고 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꼽는 명장면은 세 친구가 모이는 중국집 ‘소소반점’에서 벌어지는 난투 장면이다. 싸움은 싸움이되, 제대로 싸우는 이들은 하나도 없는 코미디다. 슬로모션으로 진행된 이 장면에서 나오는 ‘에어 서플라이’의 ‘Without You’는 요즘 스물에 낯선 노래다.

“이 영화가 요즘 스물의 이야기로만 보일까 봐 고민했어요. 스물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음악으로 다른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Without You’는 네 살 터울의 누나 때문에 어렸을 때 좋아하던 노래예요.”

이 감독은 스물의 대부분을 군대에서 보냈다.

그에게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었다.

물론 군대를 안 가도 된다는 전제를 달았다. “지금의 기억을 갖고 돌아갈 수 있다면 당연히 가고 싶다”고 했다.

“일단 스무 살의 몸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리고 〈올드보이〉 같은 영화를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럼 칸 영화제에서 최연소 수상을 하고, 자비에 돌란 감독(〈마미〉로 2014년 칸 영화제 수상한 20대 캐나다 감독)처럼 천재 소리도 듣겠죠? 스무 살이면, 뭘 해도 예쁘지 않겠어요?”
  • 201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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