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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시작되고 무르익는 순간

설치와 퍼포먼스로 자연과 교감하는 화가 임동식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
이해인 〈봄 편지〉


이해인 시처럼 봄이 우리 속으로 왔다. 굳었던 땅이 부풀어 오르고 공기에 봄 내음이 퍼지더니 어느새 사방에서 꽃망울이 터진다. 황량했던 천지를 갖가지 색으로 칠해나가는 봄처럼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생명력을 느끼는 때가 있을까. 임동식의 그림은 이렇게 봄이 시작되고 무르익는 순간을 포착한다. 말간 어린아이 얼굴처럼 연초록 잎이 얼굴을 내밀고 연분홍 꽃이 막 피어나는 모습, 봄비가 토닥토닥 대지를 잠재우는 장면이다. 그는 야단스러운 광경이나 자극적인 색 없이 봄의 아스라한 풍경을 그려낸다.
‘자연에 나를 던진다’

충남 공주에서 작업하는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 그의 그림 속 풍경이 펼쳐졌다.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동글동글한 산이 이어지고, 그사이 금강이 느긋하게 흘렀다. 임동식 작가의 풍경화 제목에는 ‘친구가 권유한’이란 수식이 붙는다. 그릴 생각이 없던 풍경화를 친구 권유로 시작했다는 고백이다. 공주시 교동에 있는 임동식 작가의 작업실은 친구가 살던 옛집으로, 임 작가가 대폭 레노베이션해서 쓰고 있었다. 점심시간 때쯤 작가의 친구 우평남씨가 찾아왔다. 임 작가는 우씨도 최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친구의 재능이 대단하다”고 자랑한다.

공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임동식 작가는 홍익대 회화과 졸업 후 독일 유학, 함부르크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다시 공주에 자리 잡았다. 설치, 퍼포먼스, 마을공동체미술 등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하던 그가 평면, 그것도 풍경화로 돌아온 것은 순전히 친구 덕이었다. 1945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비슷한 지역에서 성장하면서도 서로 만난 적은 없었다. 시골의사의 아들인 임동식씨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미술을 시작했다면, 우평남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농사일 돕기, 양복점 점원, 택시기사, 버스기사, 덤프트럭 기사. 어물전과 식당 사장 등 갖가지 일을 해왔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임 작가가 우연히 식당을 찾았다 우 사장의 ‘작품’을 보면서였다.

“썩은 소나무 뿌리 중 송진이 많아 썩지 않는 부분을 끄집어낸 후 약간만 다듬어 식당에 전시해놓았더군요. 그 어느 작품보다 감명을 받았습니다.”

친구가 권유한 봄비 나리는 곰나루_ 91.5×234cm, Oil on canvas, 2009~2012
작가는 일찍이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자연미술을 주창해왔다. 홍익대 졸업 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며 공주로 내려와 금강 백사장에서 〈금강현대미술제〉를 시작하고, ‘자연에 나를 던진다’는 의미로 ‘야투(野投)’를 결성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중반은 개념미술, 옵티컬아트, 팝아트 등 서양 현대미술의 온갖 사조가 쏟아져 들어오던 때였습니다. ‘그들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 땅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미술을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본래의 나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야외 스케치를 하면서 처음 미술을 시작했던 곳, 냇가에서 물장구치고 산등성이에서 바람을 쐬며 자연에서 감명받았던 기억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습니다.”

독일에 살던 여동생의 권유로 독일유학을 가서도 그가 지향하는 바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몸에서 나는 수염줄기와 땅에서 나는 풀잎줄기를 끈으로 연결해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거나, 꽃송이가 피어나는 과정을 손동작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했다. 수선화 밭을 지나다 고개 숙인 꽃들이 자신에게 경례하는 것 같아 모자를 벗고 꽃들에게 머리를 숙였던 기억은 퍼포먼스로, 다시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공주시 신풍면의 궁벽진 농촌마을인 원골에 들어갔다. 감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맨손으로 집을 짓고, 집 주변에는 꽃을 심었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아이들 공부를 봐주면서 주민들과 가까워진 그는 ‘예즉농(藝則農), 농즉예(農則藝)’를 내세우며 주민과 작가가 함께 참여하는 마을미술을 시작했다. 밭농사·논농사 등 자연과 교감하는 행위 모두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다시 자신의 미술이 나갈 바를 고민하고 있을 때 우 사장이 풍경화를 권유했다.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풍경화

원골에 심은 꽃을 그리다_ 65×91cm, Oil on canvas, 2011~2012
“친구는 그림 안 그려? 가만 보면 친구는 생각이 너무 많아. 우린 일할 때 생각 안 해. 나보고 자연예술가 어쩌고 하지 말고, 산 밑에서 풍경화 그런 것 그리지.”

작가는 “‘친구가 여기 좋으니까 여기 그려라!’ 하면 내가 그리겠다”고 말했다. 우 사장은 임 작가를 차에 싣고 자신이 감명받았던 풍경 속으로 데려갔다. 임 작가가 그곳에서 스케치하는 동안 우 사장은 버섯이나 약초를 캐러 다녔다.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임 작가는 가장 전통적인 형태인 풍경화로 돌아가면서 처음에는 ‘내가 뭘 하고 있는가?’ 반신반의했다 한다. 그런데 그 그림이 그를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유명작가가 되는 게 임 작가의 바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가 권유한 쌍버드나무 보이는 풍경_ 72.5×91cm Oil on canvas 2011~2012
마곡사 입구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임 작가가 처음 풍경화를 시작했던 고목 앞으로 갔다. 수백 년 된 고목에서 남다른 힘이 느껴졌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날,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이 고목을 스케치했던 그는 ‘친구가 권유한 풍경’이란 제목을 붙여 대전 롯데갤러리에서 전시했다. 이 그림 네 점을 커다란 음식점을 하는 도예가가 사들였고, 우연히 이 음식점에 들른 이화익갤러리 대표 눈에 띄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화익갤러리 소속작가가 된 그는 전시기회도 많아지고, 작품도 꽤 팔리는 작가가 되었다.

그의 풍경화가 공주 부근의 자연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그곳의 지형적인 특징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우리 산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져주는 자연이다.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이 “언젠가 한 번쯤 갔던 곳 같다”고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풍경에 작가가 꿈꾸는 모습을 가미해 그리기도 한다.

“지금은 온갖 건물에 모텔이 들어섰지만, 이전 모습을 생각하며 그리기도 합니다.”

친구가 권유한 양쪽 방향_ 91.5×234cm, Oil on canvas, 2009~2012
끝없이 펼쳐진 농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귀농전년〉과 당당히 서 있는 〈귀농당년〉은 농사예찬을 보여주는 것 같고, 양복 입은 남자가 하얀 옷 입은 나무꾼을 나무들 사이로 바라보는 〈산벚꽃 필 무렵 나무꾼을 바라보다〉는 도시인이 된 사람이 옛 기억과 조우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설치와 퍼포먼스를 통해 자연과 교감하려 했던 그는 이제 그림으로 자연과 동화된 세계를 전하려는 게 아닐까.

그의 풍경화는 유화 안료를 쓰되 기름을 거의 섞지 않고 세필로 그려 섬세하면서도 담백하게 느껴진다. 작은 입자의 물감을 층층이 쌓아 올리면서 자연의 공기층까지 묘사하려 했다는 그는 “그 입자성이 유발하는 심리적 파장, 정신성이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친구가 권유한 쌍버드나무 보이는 풍경〉에서 버드나무는 아직 잎으로 덮이지 않아 가지들이 골격미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풀이 파릇파릇 돋고 키 작은 나무가 연분홍 꽃을 피워 곧 무르익을 봄을 예고한다. 〈친구가 권유한 양쪽 방향〉에서는 금강을 끼고 양쪽으로 산과 과수원, 밭이 펼쳐지는 시원한 풍경이다. 연초록 나무들로 덮인 동그스름한 산과 연분홍 꽃을 피운 복숭아나무들, 논과 밭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가로세로 91.5×234cm 널따란 캔버스 전면에 비가 내리고 있다. 토닥토닥 땅에 와서 닿는 서정적인 봄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임 작가는 “흰 물감으로 그린 비는 화면 전체에 골고루 눈이 가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원골에 심은 꽃을 그리다〉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수선화가 화면 전면에 등장한다. 수선화에도 경례하던 화가.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 배어나오는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 201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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