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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맨의 추억

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어릴 때부터 영화 보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시작은 누구나 그렇듯 엄마 손을 붙잡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빌려 본 후뢰시맨, 바이오맨, 우뢰매, 파워레인저 등의 이른바 전대물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친구와 ‘누가 세네’ ‘누가 멋있네’ 하며 제대로 싸우려면 전대물(지구를 구하거나 악당을 물리치는 장르) 관람은 필수였다. 난 개인적으로 바이오맨이 좋았다. 색깔이 좀 더 곱고 이름이 좀 더 보드랍다는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영웅은 바이오맨이야.” “꺼져. 후뢰시맨이거든.” “병신아, 걔넨 우주 멀리 아주 멀리 사라졌잖아.” “꺼져. 후뢰시맨은 지구방위대야.” “병신아, 바이오맨은 우주특공대야.” “…” “그리고 또 하나 말해줄까? 바이오맨 핑크는 개.이.뻐.” 식으로 후뢰시맨과 바이오맨의 자웅을 겨루다가 결국, 그 친구와 나는 옥상에서 몸의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와중 우연찮게 〈클리프행어〉라는 영화를 엄마와 같이 보다가 처음으로 영화다운 ‘영화’를 접했고 (바이오맨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바이오맨은 엄청 세다. 헐크도 이긴다.) 난 더 이상 비디오 가게에서 전대물을 집지 않았다. 여러 가지 영화를 봤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몇 가지 기억나는 거라고는 한창 짐 캐리에 빠져 있던 때 봤던 〈마스크〉 〈에이스 벤츄라〉 〈덤앤더머〉, 그리고 불치병에 걸려 죽는 친구와 그 친구 옆을 지키는 어린아이의 우정을 다룬 〈굿바이 마이 프렌드〉 정도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내게 극장에 가자고 했다. 영화 같은 건 도통 보지 않는 아버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난 처음으로 영화관이라는 곳에 가보게 됐던 거다. 〈쉬리〉. 중학교 1학년의 눈에 이 영화의 내용은 ‘남한 경찰 한석규가 간첩 최민식을 때려잡으려고 보니, 약혼녀 김윤진도 간첩이라서 좀 고민해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둘 다 때려잡자. 대한민국 만세’ 정도였다. 그저 영화를 보고 기억에 남았던 건 김윤진의 극 중 이름이 이방희였다는 것과 여간첩 하나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폭탄을 먹고 터져 죽는다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쉬리〉를 본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는 급우들에게 극장에 다녀왔다는 것을 자랑함과 동시에 그 영화에는 유방이(이방희) 나오는데 다른 내용은 말해줄 수 없다며 주머니에 있던 노마에프를 꺼내 먹고 터져 죽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떤 놈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쉬리〉에는 정말 유방이 나온다며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하며 또 터져 죽었다. 간첩신고는 111이다.

그렇게 극장을 뚫은 나는 같은 해 엄마가 아닌 친구와 극장을 다시 찾았다. 〈러브레터〉. 영화가 시작되고 잔잔한 음악과 하얀 설원이 펼쳐지며 주인공들이 사랑을 속삭일 때 친구와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며 도대체 무슨 내용이냐고 속삭였다. “야, 여자 둘이 얼굴이 똑같애! 엔쥔가?” “아니 병신아, 그게 아니고 저 여자는 고딩 때 여친이고 저 여자는 어른 때 여친이자..잖…? 이중인격!!??” “엔쥐야 엔쥐. 흐히히히. 병신 같애.”

“아 그냥 인기가요나 볼걸!”

〈러브레터〉를 보기엔, 우리는 러브레터는커녕 교환일기도 못 써본 인기 없는 중학생이었다.

그 후 나는 얼마간 조폭 코미디 영화에 열광했다.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가문의 영광〉 등의 영화 티켓이 불같이 팔려나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런 류의 영화는 보통, 싸움을 엄청 잘하는 착한 조폭 보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악당 조폭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결국엔 정의감에 모두 다 줘패버린다는 플롯을 갖고 있었다. 혹자들은 이런 조폭 코미디 영화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는 현상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키아누 리브스보다 박신양이 강했고, 캐머런 디아즈보다 신은경이 섹시했다. 결정적으로 중학생이던 내게 이런 영화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웃고 즐기기 좋았으며 결말은 통쾌했고, 결정적으로 ‘대부분 박상면이 나왔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나는 한 드라마에서 박상면 선배를 만났고, 평생 웃을 걸 다 웃었던 것 같다.

영화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많은 영화를 보려고 노력했던 것도 같다. 고등학교 시절 기숙사에서 나와 몰래 교실에서 비디오를 보기도 하고, 한자리에서 네댓 편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영화가 보고 싶어 영화제 자원 봉사를 한 적도 있었다. 자연스레 영화를 전공했고 연기를 하게 됐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영화가 전공이 되고 연기가 직업이 되다 보니 영화를 즐기기보단 판단하고 평가하면서 보는 일이 벌어졌다.

모든 일이 다 그럴 것이다. 자신의 전공에 있어서는 대부분 관대한 시각을 갖기가 어렵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레 틈을 찾고 흠을 찾는다.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이건 이래서 좋다’보다는 ‘이건 이래서 별로다’를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별로인 게 적으면 좋은 거고 별로인 게 많으면 그야말로 별로인, 가히 네거티브한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깐깐해지고 재수 없어지더라는 거다. 다시 예전에 엄마 손 붙들고 극장에 가던 그 설렘을 꺼내 들며 이 글을 쓴다.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마치 예전에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야, 박신양 겁나 세지 않냐?” “아 박상면 때문에 극장에서 배꼽 분실함” 하며 떡볶이나 먹으러 가던 그때처럼 영화를 보려고 한다. 사실 그 시절이 그리워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스크린의 배우와 같이 호흡하면서 영화를 보던 그 시절엔 나도 좀 귀여웠던 것 같기도 하다(지금도 귀엽긴 하다). 러브레터보단 에스이에스가 더 좋던 그 시절, 그래도 영화를 순수하게 봤었다. 남북의 이념 대립과 조국 통일의 한계를 등지고 유방으로 대동단결했던 중학교 1학년들은 어느새 서른이 되어 아직도 유방타령을 하고 있고, 그러고 보니 어쩌면 순수하게 영화 보기가 어려운 일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이 글을 보고 나서 ‘내가 그때 〈쉬리〉만 안 봤어도 귀여운 정민이가 판검사가 됐을 텐데’ 하며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기껏 7000원 내고 좋은 영화 보여줬더니 아들 새끼가 유방거리고 앉아 있네’라는 생각은 더더욱 안 했으면 좋겠다. ‘쉬리’라는 야동을 보고 와서 자랑하던 타락한 내 친구에 비하면 난 네 살 먹은 어린애니까.)

박정민은 영화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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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카와이   ( 2016-08-09 ) 찬성 : 2 반대 : 2
정민오빠 언제나 귀여우세여...
      ( 2016-02-21 ) 찬성 : 9 반대 : 8
저도 아빠가 모 영화, 드라마만 안봤어도 국어선생님이 되었을텐데. 라는 후회 안하도록 열심히, 잘 하고 싶어요!
   23.9   ( 2015-04-14 ) 찬성 : 60 반대 : 32
즐기던 일이 내 일이 되었을때 전문성을 득하는 대신에 순수함을 잃게된다는 부분이 깊게 공감되네요. 대신에 그렇게 변하는 자신이 싫지않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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