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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일상을 그린다

‘현대의 풍속화가’ 최석운

“전시장에서 내 그림을 보던 사람이 ‘풋’ 하고 웃는 거예요. 그때 답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화가 최석운의 그림 앞에서는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을 해독하기 위해 복잡한 현대미술 사조도, 난해한 미학이론도 동원할 필요가 없다. 우리 일상에서 끄집어낸 장면으로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는, 친근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혹은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면서 곁눈질로 서로 엿보는 남녀, 한껏 차려입은 여자가 다리를 쩍 벌린 채 열창하는 노래방, 지하철에서 서로 기댄 채 입을 벌리고 잠이 든 남녀, 공중목욕탕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곁눈질하는 남자들,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알록달록 치장했지만 삐져나오는 뱃살과 브래지어 끈을 감출 수 없는 여성 등 그의 그림에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인물이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서로 부둥켜안고 입맞춤하는 장면에서조차 선남선녀의 모습이 아니다. 뱃살이 튀어나온 남녀가 누가 볼까 화급히 입을 맞추고, 그 장면을 누렁이가 담벼락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과장된 표현으로 능청스럽게 그려내는 그는 ‘현대의 풍속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현대인의 위선에 대한 풍자와 해학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만난 화가는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솔직하고 소탈한 입담에 계속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은근하게 드러나는 인간미와 상대에 대한 배려가 내내 웃음 짓게 했다. 그의 그림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최.석.운이라는 이름 석 자가 세간에 알려지기까지 그는 쉽지 않은 세월을 건너왔다. 외가에 맡겨졌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고 혼자 버텨내야 했다고 말한다. “아주 나쁜 길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림 덕에 그러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뭐든 그리고 만들기를 좋아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미술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미술은 재미있고 좋았죠. 중학교 때부터 유화·수채화에 조각까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미술실을 떠나지 않았죠. 그림을 그리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바닷가에서_ 104×85cm, Acrylic on canvas, 2014
그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격동기였다. 한국의 사회상에 깊이 관여하면서 표현하던 80년대 미술 경향에서 그 역시 자유롭지 않았다. 서구에서 들어온 사조들로 현대미술이 점점 어려워지고,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무력감을 느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고민에 빠져 있던 그는 자신의 주변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무렵인 1987년 그리기 시작한 〈낮잠〉 연작에는 낮잠에 빠져 있는 인물 주위를 돌아다니는 바퀴벌레와 쥐가 등장한다.

“작업실에 바퀴벌레가 오갔어요. 햇빛에 비친 반투명 날개가 너무 예뻐 실로 묶어 애완용으로 데리고 있기도 했지요.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는데 바퀴벌레가 내 몸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고,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그렸죠.”

입을 벌리고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는 인물에게 다가오는 쥐나 바퀴벌레는 개인의 삶을 파고들어오는 어떤 힘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의 그림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음을 경험한 그는 ‘내 삶, 일상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시절 《서양미술사》를 읽고 난 뒤 ‘이걸 흉내 내면 안 되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미술, 한국미술은 무엇일까?’ 고민했죠. 그러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 미술의 가능성을 탐색한 김홍도·신윤복·장승업 등 조선후기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복날_ 132×162cm, Oil on canvas, 1993
1992년 그는 유년기를 보내고 청년작가로 활동했던 부산을 떠나 경기도 양평에 자신을 유폐시켰다.

“20여 가구가 사는 산골에 조그만 폐가를 얻어 살았습니다. 당시 여느 시골처럼 고령의 노인들만 사는 마을이었어요. 간혹 우편물을 전하러 오는 우체부가 기다려지고, 동네개가 어슬렁거려도 반가울 정도였죠. 암흑천지가 되는 밤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겨울에는 먹이를 찾아 내려온 고라니·멧돼지 같은 짐승이 밤새 집 주변을 돌아다녔고, 여름이면 장수하늘소와 나방이 봉창을 두드렸죠. 6개월 정도 지나니 모든 게 자연의 소리로 들리더라고요.”

30대 초반의 그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림 그리기밖에 없었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만큼 절박했기에, 골방에 혼자 있으면서 스스로 단련했기에 진정성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복날〉에는 개를 나무에 매달아놓고 때려잡는 풍경이 등장한다. 두 남자가 개를 도륙하는 장면을 도시에서 자동차를 타고 온 여성, 고삐에 매인 소, 나뭇가지 위에 있는 새가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그 개를 삶을 솥에 다른 개가 다리를 쩍 벌리고 오줌을 싸며 그야말로 ‘개판’을 만들어버린다. 김홍도의 풍속화 같은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지하철_ 91×117cm, Acrylic on canvas, 1997
그는 농촌의 일상을 가감 없이 그려냈다고 한다. 〈지하철〉은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명의 남녀가 서로 곁눈질하는 모습으로, 남녀 사이 성적 긴장감을 탁월하게 그려낸 신윤복의 풍속화를 떠올리게 한다. 〈키스〉는 담벼락 앞에서 입을 맞추는 남녀의 모습이 신윤복의 〈월야밀회(月夜密會)〉를 연상시킨다. 그의 그림에서는 뚱뚱하고 못생기고 촌스러운 인물이 주인공이다. “잘생기고 세련된 인물에는 관심이 가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평범한 우리네 삶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다. 울긋불긋 강렬한 원색에 단순한 화면, 기교 없는 고졸한 그림이 조선시대 민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는 투박한 모습과 촌스러운 색 대비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 속 인물의 곁눈질은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등 도시에서는 어디에서나 훔쳐보기가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훔쳐보고는 보지 않은 척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습니다. 눈동자 하나로 자기중심, 자기세계가 없는 위선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미술 외 다른 장르와도 활발한 교류 시도

휴식_ 112×163cm, Acrylic on canvas, 2001
그의 그림들이 마냥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1992년 작 〈짖는 개〉에서는 검정개가 눈사람을 향해 짖고 있다. 검정개는 사실 눈사람한테라도 말을 걸고 싶은 화가 자신이다. 〈화가의 방〉에서는 수감자처럼 홀로 구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화가가 등장한다. 마루에서 웅크린 채 자고 있는 인물이나 쪼그리고 앉아 상념에 잠긴 인물, 등을 보이고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인물에서는 쓸쓸함이 느껴진다. 바다 혹은 사막에 누워 있는 인물은 자연과 하나가 된, 오롯이 혼자인 존재를 보여준다. 술자리에서는 너털웃음과 입담으로 좌중을 사로잡고 따뜻한 인간미로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어온 화가이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쓸쓸함, 본원적인 외로움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남편이다. 매일 오전 8시쯤 고등학생 딸을 등교시키면서 작업실로 출근해 하루 꼬박 작업실을 지킨다.

“작품이 꽤 팔려 양평에 작업실 딸린 2층집을 마련하면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결혼 1년 만에 외환위기가 터져 엄청 고생을 했어요. 나란히 누워 있는 식구들을 보면 정신이 번쩍 났지. 그런데 생활이 조금 안정되니까 이제 내 그림에 대해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짖는 개_ 32×41cm, Acrylic on canvas, 1992
그는 다시 절박하게 그림에 매달리기 위해 작업실을 옮겨 다니기도 한다.

“작업실은 이제 익숙한 공간이 되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2008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석 달 동안 알찬 시간을 보냈죠. 가족까지 두고 왔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매달리게 되더라고요. 익숙지 않고 안정적이지 않은 현장에서 오히려 평소와는 다른 거친 작업을 하다 보니 그림 내용뿐 아니라 형식까지 달라졌죠. 그 후 제주도와 중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요즘은 미술이 아닌 다른 장르와 교류가 많아지면서 답사여행을 다니며 스케치하기도 했죠.”

올해 1월에도 그는 한 달 동안 친구인 중국인 화가의 작업실에서 지내다 왔다. 8년 전 한국에서 처음 만나 친해진 사이로, 중국 오지를 같이 다니기도 하고 함께 작업도 한다. 그러면서 화면이 좀 더 거칠어졌다는 그는 젊은 시절의 야성이 엿보인다고 말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밀어붙여왔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럽지. 이제 내 그림인생의 절반 정도 왔다 생각해요.

앞으로도 남은 시간이 많죠. 내 그림에 대해 여러 가지로 모색해야겠지요.”

화가 최석운

1960년 경북 성주생 .
부산대, 홍익대 미술대학원 회화 전공 졸업.
샘터화랑, 가람화랑, 아라리오갤러리, 금호미술관, 포스코미술관 등에서 개인전 30여 회, KIAF, 베이징 아트페어, LA 아트페어, 멜버른 아트페어와 다수 국내외 단체전 참여.

글 이선주 / 사진 이성원
  • 201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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