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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페이’는 없다

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20대 초반, 누구나 그렇듯 돈이 좀 필요하다. 급식을 주지 않고, 편의점에선 내게 술을 팔고, 대학교는 동네에 있지 않으며, 여자도 사귀어보고 싶고, 그렇게 여자를 사귀고, 그 여자 몰래 클럽도 좀 가야 하고, 아 이건 아니고, 뭐 어쨌든 어느 정도의 돈은 좀 필요하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학비를 벌기 위해, 어떤 이는 술값을 벌기 위해, 뭐 어찌 됐든 다수의 20대들은 자기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첫 아르바이트는 과외였다. 운이 좋게 들어간 명문대 타이틀 덕분에 과외 자리를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학생은 잠실의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주상복합 아파트에 사는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였는데, 합기도를 좋아했고 합기도만 좋아했다. 도복을 입고 수업을 한 적도 있었다. 처음엔 열과 성을 다해 아이를 가르쳤지만 아이는 합기도만 좋아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팝송 가르치기였다. 가장 좋아하는 팝송이었던 제시카의 ‘굿바이’(영화 〈약속〉의 OST이며, 에어 서플라이의 곡이다.)를 외우게 했고 그 가사들을 해석해가며 문법을 가르쳤다. 아이는 합기도만 좋아했다. 한 달 내내 ‘굿바이’를 외우지 않는 아이에게 나는 ‘굿바이’를 가르쳤고, 얼마 후 아이는 중간고사를 쳤고 중간고사에는 당연히 ‘굿바이’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나는 그 집과 굿바이 했다는 슬픈 첫 아르바이트 이야기다.

다음은 신문배달이었다. 보급소에서 가장 배달량이 많은 구역을 맡았다. 그리고 소장님 없이 혼자 배달을 시작한 날, 아차 싶었다. 난 귀신을 무서워한다. 그걸 잊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주택가 골목은 뭐가 튀어나와도 심한 게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매일 마주치는 순댓국집 자외선 소독기의 보랏빛 공포는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를 않았다. 혹시라도 어느 코너에서 예상치 못한 인간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소리를 질렀고, 그 인간은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담 너머 개는 미친 듯이 짖었다. 그렇게 몇 개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자외선 소독기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소장님을 찾아갔다.

“소장님, 저 일 그만하려고요.”

“안. 돼.”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문사에서 퇴직의 자유도 없다는 생각에 분했다. 그리고 큰 결심을 했다. 신문을 다 돌리고 난 어느 새벽, 집 앞 놀이터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러곤 모랫바닥을 굴러다녔다. 그렇게 만신창이 꼴로 보급소에 복귀해선,

“소장님, 저 다쳤어요. 오토바이 타다 넘어졌어요.”

“…”

“죄송합니다.”

“…”

“이번 달 월급은 안 받을게요.”

“가봐.”

자외선 귀신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 100만원을 지불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까워 미치겠다. 어쨌든 그렇게 철없던 스무 살의 두 번째 아르바이트는 그렇게 끝났다.

다음은 팬시점 아르바이트였다. 동네에 있는 대형서점 안에 새로 생긴 팬시점이었다. 문제는 본점이 부산에 있었고, 이곳에 점장은 없었다. 그 말은 곧, 내가 점장과 마찬가지라는 얘기였는데, 포장, 청소, 진열, 관리, 신청, 판매, 결산 등 전부 혼자 해야 했다.

“이건 착취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판매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를 지급할 건데요?”

“착취해주세요.”

그렇게 새로운 아르바이트가 시작됐다. 장사가 그리 잘되지 않아 지인들을 불러 하나씩 강매를 시키고 있던 어느 날, 검은 양복을 입은 건달무리와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들 그리고 아기들이 팬시점에 들이닥쳤다. 보아하니 ‘바다에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분들 같았다. (당시 ‘바다 이야기’라는 불법 도박업체가 꽤 성행하고 있었다.)

“우리 애기, 여기 있는 거 다 집어!”

“…(훔쳐 가시면 안 되는데.)”

“우와, 이 시계랑 다이어리 너무 귀엽다. 여보 난 이거, 이거, 이거, 저거, 요거!!”

“…(귀여워도 훔쳐 가시면 안 되는데.)”

“아빠빠풉빠빠뿌뽀뽀뽀! 뿌! 뿌!! (아빠 이 인형 졸귀졸귀! 사! 사줘!)”

“…(돈 내야 돼. 애기야.)”

매대가 텅텅 비었다. 태풍이 불어닥친 것 같았다. 바다 아저씨가 다가온다. 이렇게 공격이 들어오면 이런 식으로 방어한 후 아기를 인질로 잡겠어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아저씨가 돈뭉치 같은 것을 내민다. 자세히 보니 상품권이다. ‘바다에서 이야기하는’ 곳에서 현금 대신 유통되는 상품권이었는데, 동네에서 이 상품권을 유일하게 취급하는 우리 가게로 몰려든 것이었다. 어찌 됐건 그달 통장에는 엄청난 사장님의 신뢰액수가 찍혔고, 서울에 있는 한 지점을 동시에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바다 아저씨’들은 단속에 걸렸고, 팬시점은 점점 망하기 시작했고, 나도 설자리를 잃었다.


핫도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핫도그를 잘못 만들면 그 핫도그를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잘못 만든 후 괜히 구석으로 가져가 꺽꺽대며 서러운 눈물이 젖은 빵을 먹는 연기를 하곤 했다. 건설현장에서는 같이 일하는 아저씨들의 무용담을 들어주는 게 더 일이었고, 초등학생 보습학원 운전기사 겸 총무 겸 과학 선생님을 할 때는 ‘저 인간이 기사 아저씨야, 프런트 양반이야, 아니면 선생님이야’ 하며 흔들리는 아이들의 눈동자를 견뎌내는 게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많이도 했다. 덕분에 선물 포장을 잘하게 됐고, 오토바이를 잘 타게 됐고, 지붕 개보수도 할 수 있게 됐고, 문서 정리, 장부 정리를 포함 각종 정리에 능숙하게 됐고, 초등학생들을 따끔하게 혼낼 줄도 알게 됐다. 그렇게 번 돈으로 힙합 바지도 사고, 패션 모자도 사고, mp3도 사고, 여자친구 선물도 샀던 것 같다. 공무원인 아버지, 맞벌이로 돈을 버시는 어머니 덕분에 부족한 것 없이 자랐지만 힙합 바지는 안 사주셨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고, 그렇게 산 힙합 바지를 입고 여친 몰래 클럽 가서 논 건 비밀이다.

어쨌든 지금 서로 다른 목적으로 열심히 남의 돈을 버는 20대가 많을 것이다. 그들을 고용하는 이들에게 부탁드린다. 부디 그 20대의 고귀한 능력을 쉽게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은 30대에 빛나기 위해 20대에 5000원이 겨우 넘는 시급과 타협하는 거다. 결코 그들의 능력이 시급 5000원짜리가 아니란 걸 알아두었으면 한다. 결코 그들을 찍으면 간단하게 가격이 매겨지는 바코드로 생각하지 마시길 바란다. 그들이 바코드밖에 못 찍어서 바코드를 찍고 있는게 아니다.

열정 페이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라. 수많은 20대가 그 입을 찢어버릴지도 모른다.

박정민은 영화 〈신촌좀비만화〉 〈들개〉 〈전설의 주먹〉 〈파수꾼〉, 연극 〈G코드의 탈출〉 〈키사라기 미키짱〉,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춘기 메들리〉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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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박소현   ( 2016-03-27 ) 찬성 : 17 반대 : 10
수 없이 많은 알바를 하며 힘들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배운 것도 많아 그 시간이 헛되지 만은 않는 거 같아요. 그래도! 열정 페이는 안됩니다!
      ( 2016-02-21 ) 찬성 : 8 반대 : 4
정말 다채로운 경험을 하셨네요 그 20대의 경험들이 결국 현재의 밑거름이 되었군요. 열정페이에 대한 의견도 무릎을 탁 칩니다. 게다가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문사에서 퇴직의 자유도 없다는 생각에 분했다. 초반 이 문장은 정말 공감했어요!
   23.9   ( 2015-03-18 ) 찬성 : 12 반대 : 9
열정페이니 재능기부니.. 둘 다 내 열정이고 내 재능인데 왜 당신네들이 함부로 가져다쓰시려는지!
   tathi37   ( 2015-03-16 ) 찬성 : 43 반대 : 59
오랜만에 기다리며 읽는 글
 위로 받고 잘 읽고 있습니다.
 오래오래 연기도 글도 세상 밖으로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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