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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사랑에 대처하는 암늑대의 방식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양애경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사진제공 : 양애경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밤 산벚꽃나무 밑에서 네게 안길 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피나지 않을 만큼 한 입 가득 내 볼을 물어 떼면
너는

만약 네가 숫늑대라면
너는 알콜과 니코틴에 흐려지지 않은
맑은 씨앗을
내 안 깊숙이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해처럼 뜨거운 네 씨를
달처럼 차가운 네 씨를
날카롭게 몸 안에 껴안을 거다

우리가 흔들어놓은 벚꽃 둥치에서
서늘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져
달아오른 뺨을 식혀줄 거다

내 안에서 엉기고 꽃피면
(꽃들은 식물의 섹스지)
나는 언덕 위에서
햇볕을 쬐며 풀꽃들 속에 뒹굴 거다

그러다 사냥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진 내 곁을
네가 떠나버린다면
그래서 동굴 안에서 혼자 새끼를 낳게 한다면
나는 낳자마자 우리의 새끼들을 모두 삼켜버릴 거다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겠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내 곁을 지키면서
눈시울을 가느다랗게 하면서
내 뺨을 핥을 거다

후에 네가
수컷의 모험심을 만족시키려 떠난다면
나는 물끄러미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는
다른 수컷의 뺨을 깨물 거다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는 거니까

가장 나이 들고 현명한 암컷이 되는 것
뜨거운 눈으로 무리를 지키면서
새끼들의 가냘픈 다리가 굵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나는 거기까지 가는 거다
이 밤 이 산벚꽃나무 밑둥에서 출발하여
해 지는 언덕 밑에 자기 무리를 거느린
나이 든 암컷이 되기까지

양애경 시집 《내가 암늑대라면》, 고요아침, 2005



〈내가 암늑대라면〉은 ‘암늑대’를 내세운 아주 희귀한 사례라 눈길을 끌었다. 사랑을 둘러싼 오래된 신화를 늑대의 설화 구조 속에 녹여낸 시로 읽힌다. 묶인 개가 야성을 잃고 표류하는 잡종성의 표상이라면, 늑대는 순수한 동물성의 현존을 상징한다. 원형 심리학의 프레임 속에서 보자면, 늑대는 인간의 잠재의식 안에 숨은 동물성의 원형이고, 태곳적 생명의 표상이다. 이 시에서 ‘암늑대’는 문명에 의해 훼손되거나 마모되지 않은 여걸, 혹은 야성적 자아 그 자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우주와 교감하는 암늑대 예찬이자, 무리의 대모(大母)로 거듭나는 현명하고 늠름한 여성적 현존에 대한 찬가(讚歌)로 읽어야 할 것이다.

‘암늑대’는 암컷 부류의 폭넓은 상징이다. 암컷이란 어여쁜 유혹자이자 새끼에게 제 모든 것을 바치는 숭고한 모성의 존재다. 암컷 본성과 모성을 함께 지닌 인간 여성도 암컷의 범주에 들어간다. 자, 시의 설화 속으로 들어가보자. 밤 산벚나무 밑에서 암늑대와 숫늑대가 사랑을 나눈다. 암늑대는 “밤 산벚나무 밑에서 [숫늑대인] 네게 안길” 것이고,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애무하며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해처럼 뜨거운 네 씨를/달처럼 차가운 네 씨를” 몸 안으로 받는 행위다. 그 결과로 “내[암늑대] 안에서 그 씨들이 터져/자라고 엉기고 꽃”핀다. 이렇듯 사랑이란 특이 지점의 돌연한 솟구침이고, 둘이 맞은 돌이킬 수 없는 시련이자, 하나를 낳기 위한 둘의 결집이다. 사랑의 씨앗으로 나타난 아이가 바로 그 하나다. 하나는 둘을 잇고 더 단단하게 묶는 존재다.

암늑대는 ‘맑은 씨앗’을 제 안에 품지만, 숫늑대가 떠나버리면 홀로 동굴 안에 남아 새끼를 출산한다. 그런 경우라면, 암늑대는 새끼들을 낳자마자 다 삼켜버리겠다고 차갑게 다짐한다. 암늑대의 다짐에 오싹한 전율이 인다. 사랑이 지속되려면 되풀이해서 재선언되어야만 한다. 무수히, 시도 때도 없이, 거듭 말해지는 ‘너를 사랑해’라는 속삭임이 바로 사랑의 재선언이다. 그 말의 책임을 기꺼이 실천하는 행동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렇듯 사랑은 반복해서 재선언되는 한에서만 사랑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 말이 그치는 순간 사랑도 끝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경우, 번번히 그리고 급박하게, 사랑의 선언을 다시 해야만” 한다는 말로 그 사실을 지지한다. 사랑은 그 지속성으로 감정의 정동(情動)이 올바르다는 추인을 받는다. 지속성이 덧없이 깨질 때 사랑의 추인은 취소된다. 대신에 사랑은 균열과 파기를 통해 그것이 한시적이고, 우연적이며, 분출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사랑에 지속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랑이 항상적으로 시련과 위기를 더불어 데려오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나타난 뜻밖의 하나가 그 시련과 위기의 씨앗이다. 알랭 바디우는 적확한 어조로 “기적인 동시에 난관이기도 한 탄생 주위로 거개의 커플들에게 일종의 시련”이 찾아오고, “아이는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둘을 아이 주위로 재편성해야만”(《사랑 예찬》) 한다는 사실을 짚어낸다. 막 출산한 암늑대는 자신을 스스로 부양할 수가 없다. 누군가 먹이를 물어다가 부양하지 않는다면 암늑대는 새끼에게 수유할 수 없으며,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숫늑대가 표표히 제 갈 길을 가버린다면, 무시로 재선언되어야 한다는 사랑의 원칙은 깨져버린다. 암늑대 홀로 시련과 난관을 떠맡아야 함을 뜻한다. 암늑대는 이 원치 않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암늑대는 새끼를 삼키겠다고 한다. 그것은 굶주림을 해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부양 책임을, 넓게는 사랑을 저버리고 떠난 숫늑대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숫늑대의 새끼를 포기함으로써 숫늑대를 응징한다.

암늑대는 떠나간 숫늑대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을 메마르고 황폐하게 만드는 나쁜 사랑이기 때문이다. 암늑대는 다른 숫늑대를 만나 짝짓기를 할 거라고 말한다. 자기를 버린 수컷의 씨를 품는 짓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암늑대는 피가 묻은 송곳니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쁜 운명에 맞선다. 그때 동맥혈에서 억눌린 야성이 솟구치며 그와 함께 암늑대의 존엄성이 늠름하게 드러난다. 〈내가 암늑대라면〉은 암늑대를 통해 여성 내면에 숨은 시원(始原)의 힘과 야성을 확인하는 아름다운 시다. 돌아보면, 어디에나 야성을 잃지 않은 암늑대들이 있다. 암늑대가 가장 나이 들고 현명한 암컷이 되어 늑대 무리를 이끌고 새끼들을 돌보는 대모로 우뚝 설 때 감동이 인다. 이 시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여성이 사랑의 주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이끈다. 여성이 제 운명의 주도권을 거머쥐고 사랑을 이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항상 타자인 여성이 주체로 나서서 자신을 약탈하고 고갈시키는 가부장적 정치를 전복한다는 맥락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이 두드러진다.


양애경(1956~)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대전으로 이사해서 성장기를 보냈다. 대전여고를 다니며 ‘머들령’이라는 고교생 문학서클에 들어가 활동할 정도로 일찍이 문재를 드러냈다.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양애경의 시들은 불가피하게 월경의 피를 찍어 쓰는 여성시의 범주에 있을 때 자연스럽고 솔직하며, 진정성으로 빛난다. 그의 본성과 기질, 체험이 여성성의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그의 시들이 길어지고, 수더분한 말이 많아진 것도 그런 범주에서 이해한다. 시집으로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내가 암늑대라면》 등이 있다.
  • 201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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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백덕환   ( 2015-03-29 ) 찬성 : 24 반대 : 33
잠 못이루는밤 여기저기 뒤적거리다
 찐하고 고귀한
 양애경의 시 "내가 암늑대라면" 을
 몇번 반복해 읽고 잠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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