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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고 위태로운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기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화가 이진주

가슴을 드러낸 여성이 마스크를 쓴 채 한 손에 든 까만 열매를 들여다보고 있다. 다른 한 손에는 생선 대가리가 놓여 있고, 가슴에는 유축기가 달려 있다. 화병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검은 새, 르네 마그리트 화집과 식칼, 가위, 모기향 등 서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이 함께 놓여 있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공사장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고, 한 여성이 머리에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저울 위에 올라가 있다. 뿌리 뽑힌 채 누워 있는 나무와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는 트렁크, 쌓아올린 나무 의자도 보인다.

작가 홈페이지 : www.artistjinju.com
마음속 풍경을 쏟아내다

‘무슨 이야기일까?’ 보는 이로 하여금 궁금하게 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이다. 섬뜩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로 그림을 마주하면 섬세하고 정교한 묘사에 우선 매료된다. 동양화 안료와 세필로 맑고 담담하게 그려내 시적 우아함까지 느껴진다. 그림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다층적이고 묵직하고 내면을 후벼 파지만, 그럼에도 ‘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묘한 그림이다. 같은 내용을 찐득한 유화물감을 사용해 강한 붓 터치로 그려냈다면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근 송은미술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은 화가 이진주를 파주시 헤이리마을에서 만났다. 그는 스튜디오 화이트블럭 입주 작가로 지난해 봄부터 이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아들딸이 다니는 유치원도, 집도 바로 근처에 있다고 했다. 오후 4시 반이 지나자 일곱 살, 다섯 살인 작가의 아들딸이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집요하게 내면을 파고드는 작업과 어린 아들딸을 돌보는 일상을 어떻게 병행할 수 있을까?

“첫애가 백일이 되자마자 아기침대와 함께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로 들어갔어요. 전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남편인 이정배 작가가 ‘왜 못 한다고만 생각하느냐. 그럴수록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고 용기를 불어넣어줬죠. 1년 넘게 했던 수유는 제게 특별하고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수유하는 동안 계속 몸이 메마르고 갈증이 났습니다. 저와 아기 사이에 유기적인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죠. 물이 순환하고 감정이 순환하는. 수유하느라 깜깜한 방에 갇혀 있을 때는 온몸이 친친 철사줄로 매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온갖 이미지, 감정, 영감들이 솟아올랐고, 그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드로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이 모이더니 이야기로 응축되고 화면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들이 얽히고설키면서 화면은 점점 더 정교하고 복잡해졌죠.”

그의 그림은 그로테스크한 풍경 속에 서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사물들이 흩어져 있어 무척 낯설고 기묘하게 느껴진다.

정밀하게 묘사했지만 실제 있을 법한 장면은 아니다. 그의 마음속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림이 무슨 의미인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묻는 사람도 많다.

“그릴 때마다 하나하나 이야기가 있긴 해요. 물웅덩이나 먹다 남긴 사과, 빨간 실처럼 중첩되어 나오는 이미지들도 있고요. 각각의 이미지들이 뜻하는 바가 뭔지 사전처럼 정리해보려고 한 적도 있지만 금방 포기했습니다. 의미를 생각하며 그렸다기보다 직관적으로 포착되는 이미지를 나중에 ‘그런 의미였겠구나’ 생각하거든요. 그걸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고 고정시키자니 갑갑했어요. ‘이것만은 아닌데’라는 느낌이 들었죠. 가능한 한 의미를 규정하지 않고 보는 사람마다 최대한 자유롭게 해석하게 하고 싶어요.”

낮의 겹_ 천에 채색, 160×170cm, 2014
2006년의 첫 개인전 ‘무늬에 중독되다’부터 2008년 ‘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 2010년 ‘기억의 방법’, 2011년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그리고 2014년 뉴욕 전시까지 그의 개인전은 고스란히 그의 심리적 궤적을 드러낸다. 홍익대 동양화과에 입학하면서 부산에서 상경,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던 작가는 20대 때 직간접으로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대학 친구들이 퍽치기를 당해 갑자기 숨지거나 강도를 만나고, 제가 살고 있던 자취방에 누군가 침입하려고 해 오돌오돌 떨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접고 집으로 내려갈 수도 없으니 이곳에서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습니다.”

2006년 첫 개인전에서 그는 여성들이 입는 옷의 화려한 패턴만을 보여줬다.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겪고 있을 때, 감정을 쏟아내고 몰입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렸던 그림입니다. 이전에는 인물 위주로 그렸지만 이때는 실체를 무늬 속에 감추고 포장했죠. 껍질 속에 숨어서 위로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스스로 초라하고 헛헛하다고 느낄 때 공들여 화장하고 예쁜 옷을 골라 입는 심리와 같았죠.”

경계_ Korean Color on Fabric, 104×117cm, 2012
2007년에는 경기도 고양시 행주로 작업실을 옮겼고, 그곳에서 오래된 기억과 자꾸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홍대 앞에서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데도 전원적인 풍경과 생뚱맞은 가건물이 뒤섞여 기묘한 느낌을 풍기는 곳이었습니다. 비슷한 환경이어서 그랬는지 아주 어릴 적 낙동강 근처 시골에서 살았던 기억이 자꾸 나는 거예요. 네 살 때 오빠 따라 개구리 잡으러 갔다 길을 잃고 이상한 아저씨에게 잠시 납치되었던 일이. 그 아저씨가 큰 개미가 섞여 있는 까만 열매를 먹으라며 내밀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겁니다.”

네 살 때 기억은 끈덕지게 그를 붙들었다.

“유년기에 입었던 정신적 외상을 감당할 수 없어서 무의식으로 밀어내 왜곡 저장하다 비슷한 환경에 처했을 때 문득 떠올리는 것을 프로이트는 ‘사후작용’이라 했습니다. 저의 경우 아예 잊은 것은 아니지만 세세하게 기억하고 싶진 않았죠. 그런데 행주에서 지내는 동안 불편해서 외면하려 했던 그 기억에 대해 탐구하고 싶어졌습니다. 심리학이나 신경과학, 기억의 회로에 대해 공부하고, 베르그송과 프루스트의 책을 읽었죠. 내가 세상에 대한 불안, 트라우마와 하나 되어 있을 때는 상황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지만, 그때는 조금이나마 거리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비로소 직면하고 탐구하고 발화시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죠. 물론 여전히 말도 못 건네는 감정이나 기억들이 있긴 하지만.”

2008년 개인전에서 발표한 작품 〈수줍은 악몽〉에서는 오른손이 잘린 한 여성이 울고 있다.

“사건사고를 연달아 겪고 나서 강박 같은 게 생겼어요. 자유로를 달리면서도 ‘교통사고가 나면 어쩌지? 다른 데는 장애가 생기더라도 오른팔은 살려야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삶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죠. 롤러코스터를 타다 떨어지는 꿈에서 다른 곳은 멀쩡한데 두 손만 없어져 끔찍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기억과 현실 사이 내면의 자아를 표현


2009년 첫아이를 낳았던 그는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하고 다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간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이 많아졌지만, 그 때문에 내 안의 욕구와 열정들을 찬찬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의 뉴스를 실시간으로 접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점점 더 실감하잖아요? 가족을 이룬 다음에는 저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세상으로 시선이 확장되었고요. 삶은 불안정하고 힘들지만 그럴수록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시선이나 태도를 달리하면 원동력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그의 그림은 빛과 그림자를 거의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사물을 골고루 조명한다.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부분은 아예 과감하게 생략하고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이 때문에 작가가 어느 무엇에도 압도당하지 않고 이미지들을 세심하게 통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가는 강렬하기보다는 담담한 색채로 자신의 심상을 캔버스로 옮겨놓았다.

“이미지가 떠오르는 대로 드로잉을 하지만 그걸 바로 화면에 옮기지는 않아요. 나름대로 숙성시키고 내적 검열하는 시간을 갖죠. 거르고 거르는 과정을 거쳐 남겨지는 이미지들, 이야기들을 가지고 작품을 구성합니다.”

열림과 닫힘_ 천에 채색, 124.5×222.5cm, 2014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스타킹만 신은 반라에 머리카락도 없다.

“옷이나 헤어스타일은 그 인물의 인상이나 역할, 상황을 너무 강하게 드러냅니다. 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기억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내면의 자아를 표현하는 대리인이기에 특정한 시공간에 갇히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심지어 풍경까지 모호하게 되었죠. 나머지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그리기란 치유 과정이기도 하느냐고 물었다.

“치유가 뭘까요? 그 기억을 떠올려도 편안하고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 올까요? 기억의 얼룩들, 상처들, 감정들은 어딘가 남아 있지 않을까요?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불가해한 삶에 대해 그저 외면하는 게 아니라 조금 담담하게 천천히 바라보고 다가서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의 그림에 매료되는 이유가 관람자 개개인이 그림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섞어 넣으며 담담히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봄 아라리오갤러리 전속작가가 된 그는 올해 화이트블럭아트센터에서 기획전, 내년에는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 201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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