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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당하고 버려진 것들에 대한 경의

화가 이상원

“우리가 그렇게 살았거든요. 시대를 잘못 만나 무지하게 고생했죠. 배고프고, 무시당하고. 그게 작품에 반영되는가봐요. 그러고 보면 꼭 우리 같아. 우리 분신 같다고요.”
강원도 춘천시 지암리에 새로 문을 연 이상원미술관을 찾으면서도 이상원 작가를 직접 만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작가가 인터뷰 요청을 대부분 거절하는 데다 컨테이너 작업실에서 두문불출,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했다. 마침 미술관을 찾았을 때 지인들과 함께 있는 작가와 마주쳤다. 1935년생.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 등 험난한 격동기를 통과해온 우리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세대다. 그런데 그에게서 은퇴한 노인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창작혼을 활활 불태우는 영원한 청년화가가 거기 있었다.
미술관 1~4층 전시실에 걸린 이상원 작가의 대표작 60여 점은 그의 삶, 그리고 예술을 웅변하고 있었다. 가로 혹은 세로가 160, 170㎝ 혹은 330㎝에 달하는 대작들. 그 큰 화면을 세필로 꼼꼼하게 채워 넣은 극사실화로, 그 인물 혹은 그 대상을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그림을 보면 우선 뛰어난 묘사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보다 더 리얼하게 대상을 그려낸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을 서양의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혹은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의 틀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들도 이어졌다. 그러나 대상을 정밀하게 복제하는 하이퍼리얼리즘이 주관을 극도로 배제한 반면, 그의 작품은 깊은 감정적 여운을 남긴다. 우리나라든 외국이든 그의 그림을 보고 우는 관람객도 많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화려하고 예쁜 인물이나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바퀴자국이 깊게 파인 흙바닥, 추수가 끝난 논바닥, 버려진 포대, 던져져 있는 그물망, 해진 마대, 신산한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노인의 얼굴 등 용도폐기된 물건이나 우리가 외면해온 모습들을 그는 집요하게 그려낸다. 하얗게 센 머리에 쪼글쪼글 주름으로 가득한 검은 얼굴.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듯 시름 가득한 그 얼굴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 혹은 부모님의 삶을 반추하고 인간의 본질과 맞닥뜨린다. 물고기 중에서도 못생기기로 이름난 삼세기를 그린 작가는 “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작가는 “무시하면 안 된다. 무시하면 벌 받는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늙은 호박을 그린 작품을 보여주면서는 “이게 뭐로 보이느냐?”고 묻는다. “우주로 보이지 않나요? 이렇게 하찮은 식물에 우주가 담겼다고요”라면서. 그의 붓질을 통해 그동안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던 사물, 인물들은 경이로운 존재로 재탄생한다.


영화 간판, 미군 초상 그리다 40대에 국전 입선

동해인_ 165×126cm, indian ink, oil paint on korean paper, 2001
그는 우리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영화 간판, 초상화를 그리다 40대가 되어서야 순수미술로 전환했다. 1975년과 1976년 연이어 국전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상하고, 1977년과 1978년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중앙미술대전 특선을 수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러시아·중국·프랑스 미술관에서 전시하며 그의 그림이 한국인뿐 아니라 인류의 보편정서에 다가간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2000년부터 춘천에서 혼자 칩거하면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작가는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작품을 하기까지 그는 긴 길을 돌아와야 했다. 1935년 강원도 춘천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유포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잠든 할아버지 모습을 그린 적이 있어요. 할아버지가 보시더니 ‘천재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께 ‘천재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하늘이 낸 재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나 삶은 그를 평탄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열여섯 살 때 6·25가 터졌고, 피란길에 휩쓸렸던 그는 학도병이 되었다. 분대원 대부분이 거의 몰살한 전투에서 그는 크게 부상을 당했지만 겨우 살아남았다.

“심한 자극을 받은 일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때 죽어가던 전우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요. 마지막으로 6·25전쟁 기록화를 그리고 싶어요. 저 아니면 그런 그림은 못 그리죠.”

농업학교에 다니던 열여덟 살 때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재주를 눈여겨본 미술 선생님이 “미술공부를 하려면 대도시로 가라”는 말에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숙식도 해결되지 않는 형편에 언감생심 미대 입학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노동판에서 일하다 페인트업자의 소개로 극장에서 영화 간판 그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원래 3년은 보조만 해야 하는데, 두 달 만에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간판을 그리던 분이 몸이 아파 못 나왔을 때 제가 대신 그렸더니 ‘테크닉이 너무 좋다’며 당장 일을 맡겼죠. 처음 그린 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습니다.”

대자연_ 165×125cm, indian ink, oil paint on korean paper, 2009
그는 “엄청난 크기의 간판에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게 공부가 많이 됐다. 데생과 작품 구성, 재구성 모두 영화 간판을 그리면서 터득했다”고 말한다. 영화 〈벤허〉의 간판은 5층짜리 극장 건물을 거의 덮을 정도였다. “두 달 이상 공들여 그린 간판을 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고 그는 회고한다. 1960년대에는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미 8군에 그림을 납품하는 사람이 찾아와 초상화를 그리라고 해요.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것인데, 이제까지 보통 10장 중 3~4장은 거절당했다는 겁니다. 저는 100장, 1000장을 그려도 거절당하는 법이 없었죠. 그 사람의 특징을 살리면서 단점을 보완했더니 모두 좋아했습니다.”

독학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화가 박수근 역시 미군들의 초상화 그리는 일을 했던 게 떠올랐다. 그는 “순수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감히 넘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계기를 준 사람은 시조시인인 노산 이은상이었다.

“제가 그린 8군사령관의 초상화를 본 노산이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그려보라 했습니다. 유명 화가들이 그린 영정이 네댓 점 있지만 표준영정으로 승인이 나지 않는다면서. 당시 노산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이셨거든요. 안중근 의사의 이미지는 물론, 그분의 정신과 사상까지 담아내야 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 후 그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의뢰로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그리고, 박 대통령의 초상화도 여러 점 그렸다. 우리나라 재계 인사들의 초상은 거의 다 그렸을 정도. 건설사들이 선물로 가져갈 중동의 국왕, 공주들의 초상을 맡기기도 했다.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묘사가 뛰어난 기술자지 예술가, 화가는 아니야. 화가란 자신만의 사상을 가지고 정신적인 작업을 해야지”라고 한 노산의 충고가 그의 폐부를 찔렀다. 자녀들이 아직 어린 때라 가장으로서 망설이고 있을 때 아내가 “순수미술을 하면 진짜 화가 대접을 받지 않겠느냐. 그동안 벌어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이제 당신 그림을 그리라”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해야 내 것이 나온다

시간과 공간_ 167×132cm, ink, oil paint on korean paper, 1996
그는 작가로 인정받기 위해 우선 국전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수묵화를 시작했다. 노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양화가인 소정 변관식과 의재 허백련에게 사사받으라며 소개해줬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두 사람의 영향을 찾기 어렵다. 사사받은 지 몇 개월 만에 참가한 국전에서는 수묵산수화로 입선했지만, 다음 해부터는 전혀 다른 작품을 그려냈다.

“동양화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산수를 그리니 나는 그걸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젊을 때도 내 넥타이와 비슷한 걸 맨 사람을 보면 얼른 풀어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고. 그런 성미니 서양화나 동양화나 앞질러간 사람들이 해놓은 걸 반복하긴 싫었어요. 남이 안 하는 것을 해야 내 것이 나온다는 정신 상태였죠. 누구 그림과 비슷하면 태워버렸어요. 작가란 자기 색깔, 목소리가 확실해야 해요. 남의 냄새가 나는 것은 작가로서 무릎을 꿇는 것과 마찬가지지.”

1976년 국전에서 입선한 작품 〈시간과 공간〉은 심사위원 사이 ‘대상감이다’ ‘아니다’라는 논란이 불붙었던 문제작이었다. 동양화가들도 잘 쓰지 않는 장지에 수묵과 유화물감을 함께 사용하는 자신만의 기법도 개발해냈다.

“깊이 파헤치고 또 앞으로 끌어내고 싶은데 수묵으로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기법을 바꿨죠.”

명암과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유화물감을 썼다는 설명이다. 먹과 유화물감이란 생소한 재료가 그의 작품에서는 하나로 어우러져 리얼리티를 살리면서도 담백한 화면을 구사한다. 두껍고 질긴 장지는 “1000년 가는 종이”라서 택했다 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요즘도 직접 운전해서 가난한 농촌마을, 어촌 등을 다니며 작품소재를 찾는다. 자신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대상을 만나면 미친 듯이 반복해서 그린다. 그는 “그것들이 내 안에 깔려 있는 감정을 건드리는 것 같다. 나하고 비슷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명절이 뭔지, 생일이 뭔지 모르고 살았어요. 환갑, 칠순, 팔순 다 해먹어보지 않았죠. 그럴 때면 시간 가는 게 아까워 더 열심히 그렸고, 그러고 나면 흐뭇했죠”라고 한다.

“극사실화는 작업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려요. 작업하는 만큼 눈에 들어오니까요. 예쁜 여자 보면 감정이 달라지는 것과 똑같죠. 우리 같은 사람은 작업 안 하면 금방 죽을 거예요. 한 달도 못 살 거예요. 지금같이 창작활동을 하면 102세까지는 살 거예요.”

그는 어두워지기 전에 작업실로 돌아가야 한다며 급히 발길을 돌렸다. 젊은 작가 중 이토록 치열하게 작업에 임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원 미술관

아버지 작품을 전시·보존하기 위해 아들이 만든 미술관

주소 :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화악지암길 99
문의 : 033-255-9001
아버지는 “남자는 그림 그려서는 못 먹고 산다. 우리 때는 환쟁이라며 딸도 안 주려 했다”며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상대를 졸업한 아들은 무역업을 하면서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인사동에 젊고 재능 있는 작가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하셨다. 수익성이 없다고 반대하던 아들은 “아버지 뜻이 정 그러시면, 좋은 작가를 엄선해서 무상으로 공간을 내주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상원 작가와 아들인 이승형씨의 이야기다. 이상원미술관 관장인 이승형씨는 인사동에서 10여 년간 ‘갤러리상’을 운영하면서 전국을 다니며 작가를 발굴했다. 어떤 태도로 작품에 임하는지, 작가로서 얼마나 열정이 있는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작품을 하는지가 작가 선정의 기준. 그러면서 아버지 작품을 보는 눈도 생겼다. 그러나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싶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작품을 보기 전에 그 작가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약력부터 봅니다. 아버지 작품을 가지고 여러 번 전시를 했지만, ‘독학작가구나. 특이하게 그렸네’라며 편견을 가지고 보더라고요. 제도권에 계신 분들이 폄하해서 말하는 것도 들었고요. 객관적인 반응을 보고 싶어 외국 전시를 추진했죠.”

무역하던 경험을 살려 외국 미술관의 문을 무조건 두들겼다. 포트폴리오를 보내며 전시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곳들은 작품만 가지고 평가할 뿐 편견이 없었다. 러시아 연해주주립미술관을 시작으로 베이징의 중국미술관, 파리의 세인트루이스 살페트리에 성당,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러시안뮤지엄, 중국 상하이미술관 등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어느 나라에서 전시하든 관람객의 반응이 비슷했어요. 그림 앞에서 깊이 생각에 잠기고 소통하는 모습이었죠. 우는 사람도 많이 봤고요. ‘이상원이란 화가의 작품은 눈의 즐거움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구나’ 생각했죠. 중국의 평론가는 ‘세계 공통 화두인 박애주의, 인간 삶의 본질을 그린다’고 평가했습니다.”

화가 이상원과 아들 이승형.
그때부터 미술관 건립을 구상했다는 그는 각국의 미술관이 영구 소장하겠다고 하거나 해외동포가 간청할 때를 제외하면 아버지 작품을 거의 팔지 않았다. 한 작가의 작품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미술관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계곡을 끼고 있는 자연 속에 미술관을 세운 것도 “아버지 작품을 편견 없이 봐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편견을 놓아버리게 하는 힘이 자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상원미술관은 2015년 봄부터 게스트하우스와 레스토랑, 공방도 운영할 생각이다.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미술관에 재투자해 자생력을 지닌 미술관으로 자리 잡게 한다는 계획. 다양한 아트 프로그램도 마련해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문화를 만끽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갈 생각이다.

“무얼 결정하면 몸부터 먼저 움직이는 불같은 성격이신데, 어떻게 저런 작품을 하시는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예요.”

아버지의 삶과 예술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아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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