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 주인공 염정아

친절한 선희씨, 불친절한 세상에 맞서다

글 : 유슬기 TOPCLASS 기자  / 사진 : 김선아 

영화관에 들어가면 2시간 동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신문과 뉴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의 의미가, 500일 넘게 거리에서 외친 그들의 사연이 이제야 비로소 들린다. 〈카트〉는 사회고발영화도, 계몽을 위한 투쟁영화도 아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 이웃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비정규직을 주제로 제작한 첫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주인공으로 열연한 염정아와 부지영 감독을 각각 인터뷰했다.

사진제공 : 명필름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카트〉는 한선희(염정아 분)의 성장영화이자 염정아의 성장영화다. ‘평범한 소시민 선희’는 배우 염정아의 필모그래피에서 찾아보기 힘들던 역할이다. 그의 연기에 터닝포인트가 된 영화 〈장화, 홍련〉(2003)이나 드라마 〈로열패밀리〉(2011)에서 조차 그의 역할은 부잣집 안주인이었으니까. 이번엔 다르다. 화장을 지우고 대신 기미를 그렸다. 큰 키는 어깨를 구부려 어리숙한 느낌을 줬다. 부지영 감독은 처음부터 “염정아 외에 다른 배우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했다. 동년배의 배우들 중 가장 ‘생활력이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꺼내고 싶었지만 꺼낼 기회가 없던 염정아의 얼굴, 그는 어쩌면 〈카트〉가 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이 역할을 제안해주셔서 참 고마워요. 아무도 이런 역할을 제의하지 않을 때는 ‘나도 맡겨주면 잘할 수 있는데’라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캐릭터를 만드는 게 아니라 현실에 발붙인 연기를 하는 게 굉장히 좋았어요. 영화를 순서대로 찍은 덕분에 후반에는 거의 선희가 되어 있었어요. 선희라면 이렇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해외에 출장 간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생계를 꾸리고 있는 마트 직원 선희는 5년 동안 우직하게 일해왔다. 까대기(갑자기 잔업에 동원되는 일)도, 잡일도 마다하지 않아 벌점도 없는 우수 직원. 그는 “회사가 잘돼야 나도 잘된다”고 믿었다. 곧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는 소식에 고등학생 아들에게 신상 휴대폰도 사주마 약속했다. 그런데, 해고됐다. 영화의 배경이 된 건 2007년, 비정규직보호법이 발효되면서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했던 시기다. 사측은 이에 비정규직 대량해고와 외주화로 대응했다.

“저도 영화 전까지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이 없었어요. 다만 저는 평소에 하도 마트를 자주 가서 영화 찍기 전 준비할 때부터 (마트) 직원들이 남 같지 않았거든요. 이번 영화에서는 선희의 마음으로 선희가 느낀 만큼만 보여주자고 생각했어요.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고요.”


한 명, 한 명 떨어진 섬처럼 계산대에 서서 서로를 ‘여사님’이라고 부르던 마트 직원들이 처음으로 힘을 모았다. 핑크색 티셔츠를 맞춰 입으며 어색하게 웃던 것도 잠시, 계산대 밑에 박스를 깔고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평화는 잠시였다. 회사 측은 대체인력을 투입했고, 물과 전기를 끊은 뒤, 용역을 고용해 파업 중인 이들을 내쫓았다.

아줌마들이 모이니 현장 분위기도 달랐다. 인사팀 대리 동준 역을 맡은 김강우와 선희의 고등학생 아들로 나온 엑소의 도경수를 제외하면 감독부터 배우까지 여자들 ‘판’이었던 현장, 합숙소 같은 세트장에서 이들의 동지애는 더욱 끈끈해졌다.

그중 의외(?)의 소식은, 이 합숙소의 청소대장이 염정아였다는 것이다. 얼굴에 그린 기미에 이어 2차 반전이다.

“제가 원래 청소하는 걸 좋아해요(웃음). 실제로 저희가 마트를 빌릴 수 없어서 공장을 마트로 개조했어요. 아무리 환기해도 계속 먼지가 쌓이고, 공기가 안 좋았어요. 그러다가 우리 다 병 걸리겠다 싶어서 집에서 청소도구를 가지고 왔죠. 제가 고무장갑 딱 끼고 등장하니까 그다음부터는 후배들이 ‘선배님, 제가 할게요’라면서 자기들이 순번을 정해서 하던데요(웃음).”


내공이 빛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표현하기보다는 속으로 생각하고,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따르는 선희가 변해가는 과정은 염정아도 바뀌게 만들었다. 본래 그는 첫 테이크(중간에 끊지 않고 촬영한 연속적인 화면 단위를 지칭하는 용어)에 집중해 온 힘을 쏟는다. 때문에 그동안 염정아에게는 첫 번째 테이크가 늘 베스트였다. 이번엔 달랐다. 그가 자진해 반복 또 반복했다. 선희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염정아가 엄청난 테이크의 반복을 감수한 것도 다 아들 때문이다.

“선희가 처음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태영이(아들)가 편의점에서 ‘알바비’를 못 받았을 때예요. 자기가 당하는 건 참을 수 있겠는데, 아들까지 같은 일을 겪으니까 견딜 수 없었던 거죠. 이번 작품은 희한하게 테이크를 많이 갔어요. 저는 원래 첫 테이크에 힘을 다 쏟는데, 이번엔 할 때마다 힘이 올라오더라고요. 특히 아들이랑 같이 하는 장면을 엄청 많이 찍었어요.”

선희가 태영을 위해 싸우는 동안, 염정아의 아이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동탄댁’이라 불리는 염정아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스스로 “극성맘의 징조가 보인다”고 할 정도로 아이들에겐 아낌없는 사랑을 쏟는다. 일곱 살 딸과 여섯 살 아들, 두 아이를 키우는 데 온 힘을 쏟느라 허리디스크가 왔을 정도다. 엄마가 없는 동안 남편이 일찍 퇴근해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염정아의 긍정 마인드는 〈무릎팍 도사〉를 통해서도 잘 알려졌다. 스무 살에 미스코리아로 연예계에 입문한 뒤로 꾸준히 연기했지만 이렇다 할 존재감은 없던 시절,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시청자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작품은 내 안에 쌓인다’고. 그의 믿음대로 그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찾아왔고, 그 빛은 쉬 꺼지지 않았다.

“잘 안될 때도 늘 ‘좋은 날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요. 웬만하면 욕심은 갖지 않으려고 하고요. 욕심을 가지면 실망하니까. 우리 아이들도 뛰어난 아이가 되기보다는 ‘사랑을 많~이’ 받는 아이가 되길 바라요.”

영화 촬영을 마친 ‘동탄댁’의 하루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아이들 아침 먹여 유치원에 보내고, 매일매일 난장판이 되는 집을 정리하고, 마트에서 아이들 먹거리를 사고, 유치원 마칠 시간이 되면 데리고 학원에 가서 간식을 먹이고, 화장실에도 데려간다. 돌아와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나면 비로소 남편과의 시간이 온다. 가끔 영화관에 가기도 하는데 밤 11시가 넘으면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잠든다. 요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1주일에 두 번 남편과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사회 때 영화를 보면서 참 많이 울었어요. 김강우 씨가 옆에 앉았는데 그분은 엉엉 울더군요(웃음). 그때 그 마음이 되살아나서 같이 했던 배우들은 지금 만나도 눈물이 글썽해요. 이제 영화가 개봉하고 일정이 마무리되면 저도 동탄으로 돌아가야죠.”

그럼에도 염정아는 가끔 생각할 것 같다. ‘그 후 선희는 어떻게 됐을까?’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지만 그는 열심히 풀어볼 참이다. 우직하게 주어진 문제를 풀어가는 게 선희와 그녀의 닮은 점이니까.
  •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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