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나 형 삼고 싶은 배우 차태현

해맑고 착하며 웃긴 캐릭터 전문, 영화 <슬로우 비디오> 주인공

사진제공 : 조선DB, 20세기 폭스코리아
영화제작사 화인웍스의 김민기 대표가 <챔프>라는 영화를 준비할 때의 일이다.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완성한 뒤 제일 먼저 배우 차태현에게 주연을 제안했다. 이틀 만에 “하겠다”는 답이 왔다. 하지만 투자사와 논의하던 중 <그랑프리>라는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먼저 제작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던 투자가 하나 둘 미뤄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소재의 영화 두 편이 만들어진다면 당연히 후발주자가 투자를 받기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니 김민기 대표는 배우마저 영화를 포기할까봐 걱정이 됐다. 그는 어렵게 차태현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다릴게요.” 그러곤 그는 영화가 제작에 들어갈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묵묵히 경주마에 올라 연습을 했다. 불평은커녕 틈틈이 “잘될 거다”라며 제작사를 응원했다.

그렇게 8개월을 기다려 촬영에 들어갔지만 어려움은 끝이 없었다. 실제를 방불케 하는 경주 장면을 찍어야 했고, 추운 겨울 제주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는 등 난관이 이어졌다. 촬영은 계속 지연됐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차태현씨는 지친 스태프와 동료를 위로하고 챙겼다. 영화가 개봉한 후 흥행에 실패했을 때 김민기 대표를 먼저 위로한 것도 그였다. “아쉽지만 우리 열심히 했잖아요. 다음 작품 준비하셔야죠.”


순수한 괴짜 ‘여장부’ 연기


영화배우는 무릇 선망을 받는 존재다. 스크린 안에서 그들은 범인(凡人)들보다 멋있고, 능력이 뛰어나며, 연애마저 잘한다. 하지만 대부분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와 그들의 실제 모습은 한국과 아르헨티나(한국과 정반대에 있다) 사이만큼이나 거리가 멀다. 그에 비하면 차태현은 남자들이 동경하는 배우가 아니라 친구나 형으로 삼고 싶은 배우에 더 가깝다. <엽기적인 그녀>(2001) 이후로 영화에서 쭉 주연을 맡았지만, 그는 한 번도 복근을 드러내거나 날카로운 눈빛을 쏘며 남성미를 과시하고 여심을 휘어잡은 적은 없다.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수더분하고 지고지순하며 웃기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차태현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슬로우 비디오>(감독 김영탁)에서도 초능력에 가까운 동체시력을 가진 여장부 역을 맡았지만 그 역할 역시 전형적인 ‘히어로’와 거리가 멀다. 남들에게 없는 특출난 능력을 가졌지만 그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아서 스스로 집에서 TV만 보고 산다. 성인이 된 후, 어느 날 그는 세상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능력을 살려 CCTV 관제실에서 근무한다. CCTV를 들여다보면서 동네 지도를 그리던 중 그는 초등학교 때 첫사랑 봉수미(남상미)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차태현은 “많은 코미디 영화를 해왔는데 이번에는 내가 많이 웃기지 않아서 실망하는 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자극적인 구석이 별로 없는 <슬로우 비디오>는 캐릭터와 소소한 사건들로 조금씩 전진하는 영화다. 모든 동작을 슬로 모션으로 인식하는 여장부는 “남들도 나만큼 세상을 느리게 보면 행복할 텐데”라고 말한다. 차태현은 “<슬로우 비디오>는 요즘 나오는 영화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많죠. 그것이 불편함으로 보일지, 신선함으로 보일지 궁금해요.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번은 방송사고로 자막과 효과음이 안 나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 느끼는 불편함이 있거든요. 항상 봐오던 것들이 안 보였을 때 느끼는 불편함. <슬로우 비디오>도 빠른 편집과 음악이 나오고, 눈이 피로하거나 가슴이 조마조마한 작품이 아니에요. 공식화된 기법을 따라가지 않았기에 어색해할까봐 걱정도 되네요.”

차태현은 “<슬로우 비디오>가 내 필로그래피 중 가장 나답지 않은 영화”라고 했다. 일단 동체시력 때문에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사회생활 없이 TV로만 세상을 배운 그는 봉수미에게 “꽃이 피어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와서 봄이야”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건네고, 연장자인 직장 동료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한다. 게다가 높낮이가 별로 없는, 생경한 말투까지 구사한다. ‘순수한 괴짜’라는 점에서 여장부는 차태현이 연기해온 평범한 남자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변신까지는 아니고 변화를 주려고 했어요. 여장부는 제가 했던 배역 중 가장 자연스러움이 덜해요. 캐릭터를 표현하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재밌었어요. 처음에는 ‘이게 맞는 연기인가’ 하고 고민도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건 전례가 없는 캐릭터예요. 제가 만들어가는 캐릭터이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요. 물론 영화 내내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건 조금 걱정이 됐죠. 표현이 100% 전달이 안 될까봐. 그래도 제가 워낙 익숙한 얼굴이라서 눈을 가리고 있어서 관객들도 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스무 살 때 KBS 수퍼 탤런트로 데뷔한 차태현은 부모에게서 처음 연기를 배웠다. 그의 부모는 모두 성우 출신이다. 특히 어머니는 인기 애니메이션 ‘영심이’의 주인공 영심이의 목소리 연기로 유명했다. 아버지는 성우를 계속하진 않았지만 “어느 자리에서나 좌중을 휘어잡을 정도로” 활달하고 웃겼다. 그는 “코믹 연기는 아버지에게서, 목소리는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했다. 탤런트 공채 시험에서 면접관들은 그에게 정극 연기보다 코믹 연기를 더 많이 요구했다. 당시엔 탤런트들이 드라마뿐만 아니라 음악, 예능 방송에서 MC 역할까지 도맡아 하던 때이다. 면접관으로 들어온 한 PD가 차태현에게 웃긴 이야기를 해보라고 시켰고, 그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PD의 반응은 이랬다. “아까 한 사람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는 하나도 안 웃겼는데, 당신이 하니까 웃기네.”

수퍼탤런트에서 은상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도 차태현이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방송국을 드나들 때마다 경비원에게 출입증을 보여줘야 했을 정도로 어려 보이던 그의 외모 때문이었다.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 전도연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잠시 등장한 그는 “너무 어려 보인다”는 지적에 드라마 중도 하차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는 “드라마 설정상 세월이 흐른 뒤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난 빠졌다. 대학생에서 사회인이 될 때 자연스레 하차하거나 다들 상경하는데 나 혼자 시골에 남아 있는 설정을 하는 식이다”라고 했다.

“남들은 동안이라서 좋겠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서른 살 때 찍었던 영화 <파랑주의보>에선 교복을 입었다니까요. 얼마나 어색해요. 그래도 이제 와선 어려 보이는 얼굴이 좀 도움이 돼요. 아이 셋 키우는 아빠인데, 그런 느낌은 강하지 않으니까요.”

차태현은 2006년, 13년 동안 연애한 첫사랑과 결혼해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그는 결혼 전 배우로 인기를 얻은 뒤에도 방송이나 인터뷰에서 “고교시절 처음 만난 후 10여 년간 사귀어온 첫사랑이 있다”고 밝혔었다. 촬영이 없을 때 그의 일과는 이렇다. “매일 아침 7시 30분에 큰아이(8)를 등교시키고, 9시 30분에 둘째 아이(4)를 유치원에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나가 더 남아 있어요. 남은 아이(2)를 돌본 다음 오전 11시에 영화관으로 가요.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는 거의 다 보는 편이라 IPTV에서 볼 게 없을 정도죠. 영화를 보고 나면 오후 2시에 큰아이가, 2시 30분에 둘째 아이가 와요. 세 아이를 돌보다가 밤 9시쯤 재워요. 그러고 나서는 술 먹으러 나가죠.”


“관객에게 즐거움 주고 싶다”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2001)는 드라마에서 인기를 얻은 차태현과 신인배우 전지현을 단숨에 톱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차태현이 연기한 ‘견우’는 술을 마시면 아무 데서나 토하고 정신을 잃는 여자친구를 돌봐주고, 여자친구가 발이 아프다면 하이힐도 대신 신어주는 남자였다. 학교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남학생이나 동네 형 같은 그 캐릭터는 배우 차태현을 설명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 스스로도 “견우는 내 인기의 시발점”이라고 인정할 정도다. 이 작품 이후 차태현은 밥 먹는 연기를 해도 ‘밥 먹는 견우’처럼, 우는 연기를 해도 ‘우는 견우’처럼 보였다. 그는 “견우가 차태현화(化)된 것”이라고 했다. 차태현은 10월 초부터 <엽기적인 그녀2> 촬영을 시작했다. 여자 주인공은 전지현이 아니라 아이돌그룹 f(x)의 멤버 크리스탈이다.

“견우는 저랑 정말 비슷한 캐릭터라서 연기가 별로 필요 없었어요. 70~80% 정도 닮았던 것 같아요. 그동안 정말 속편 제의가 많았는데 다 고사했어요. 전지현이 없는 <엽기적인 그녀>는 아무래도? 그런데 최근 들어 견우가 많이 보고 싶어졌고, 관객들이 견우도 많이 사랑해줬다는 걸 깨달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앞으로 결혼한 견우, 늙은 견우까지 계속 보여드릴지도 모르죠.”


<엽기적인 그녀> 이후 차태현은 조금씩 제 영역을 확보해갔다. <바보>나 <파랑주의보>,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처럼 흥행에서 쓴맛을 본 적도 많았지만 1년에서 1년 반마다 꾸준히 작품에 출연했다. 관객은 이제 ‘차태현’이 아니라 ‘차태현 영화’를 보러 간다. 그가 나오는 영화라면 ‘웃기면서도 따뜻할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음악영화의 느낌이 강했던 <과속스캔들>, 귀신에게 빙의돼 1인 5역을 해야 했던 <헬로우 고스트>, 스포츠영화인 <챔프>, 사극이자 범죄물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모두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심지어 부잣집 도련님이나 의사 역할을 맡을 때도 거기엔 그 특유의 어설프고 개구진 모습이 묻어난다.

“드라마에서 재벌 2세 역을 맡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다른 재벌 2세들과 달리 어딘가 어수룩했죠. 어떤 역할을 해도 즐겁게 살아온 제 삶이 반영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도 아버지 사업이 안돼서 고생했을 때 빼고는 무난하게 산 편이거든요.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는데, 어떤 인물이라고 해도 제가 그 인물에 들어가기보단, 그 인물에 저한테 들어와서 차태현화되는 것이죠.”

차태현은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로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 <바보> 속 승룡, <슬로우 비디오>의 여장부를 꼽았다. “마음이 아련한 캐릭터는 승룡인데, 견우는 1등을 안 줄 수 없는 캐릭터”라며 “승룡은 만화로 봤을 때의 모습이 영상으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만족스럽게 나온 것 같아서 좋았다”고 했다.

“장부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짠하다. 여지껏 하지 않았던 패턴의 영화이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역할인 것 같다”고 했다. 셋 다 해맑고 착하며 웃긴 캐릭터다. 비슷한 역할을 반복하는 필모그래피 때문에 그는 이미지 변신에 대한 질문을 유독 자주 받았고, 그때마다 “억지로 변신하기보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잘 활용하는 것이 낫다”고 답해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변신을 하거나 진지한 영화를 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그런(밝고 웃기는) 영화를 찍는 것도, 보는 것도 좋아한다. 15년 동안 주연을 하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변신이 없었다. 하지만 시청자나 관객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뭔지 알기 때문에 이제 그런 걸 신경 쓰지는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게도 가끔 악역 제안이 들어오긴 하는데 “처음에는 착한 모습으로 나오다가 나중에 반전으로 무서운 눈빛을 보여주는 뻔한 역할들이라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단다.

“저는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연기를 하면서 메시지를 주려고 하지도 않아요. 그게 감독과 배우의 다른 점이죠. 전 영화의 메시지와 상관없이 두 시간이란 시간 동안 관객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다만, 쌍욕하는 연기는 별로 안 좋아해요. 제가 쌍욕을 한다고 웃길까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저는 좀 웃겨요. 흐흐.”
  • 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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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happyi724   ( 2015-01-13 ) 찬성 : 47 반대 : 50
후속작 엽기적인그녀2의 여주인공은 크리스탈이 아니라 빅토리아입니다
2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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