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한 장면 -
랭보와 고흐에 바치다

글 : 이상희 

예술가들은 흔히 자기가 감명받은 예술품이나 인물에 작품을 바치곤 합니다. 그림책 작가도 마찬가지여서 그림책 표지를 열어 속표지 앞뒤 어딘가에서 그런 헌사를 발견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누군가에게 바칠 마음으로 만든 작품’에 대한 기대 덕분이지요.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 속표지 앞에는 아르튀르 랭보의 시 <감각sensation>이 실려 있습니다. 아마도 글을 쓴 라스칼이 그것을 인용했으리라 짐작하는 이유는, 제도권 교육을 거부하고 독학으로 글 쓰기며 그림 그리기를 배웠다는 이 벨기에 작가에게서 유난히 자유를 탐하는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상쾌한 여름 저녁이 되면 나는 들길을 가리라.
보리 이삭에 찔리고, 가느다란 풀을 밟으며
꿈꾸듯이, 나는 발자국마다 신선함을 느끼리.
불어오는 바람에 내 맨 머리카락이 날리는구나!
말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랑만이 솟아오르네.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방랑자처럼
자연 속으로, 연인과 가는 것처럼 행복하게.”

그림책을 어린아이들의 전유물로 오해하는 이들에게 이 그림책을 읽어줄 때, 위의 인용 시는 특히 유용합니다. 게다가 이 기묘한 여행 이야기가 절반쯤 진행되는 지점에서, 그림 즐기는 이라면 금세 낯익게 여길 그림 장면과 맞닥뜨리게 되는 반가움도 어른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잘 익은 밀밭을 헤치며 나아가는 서커스단의 재주 부리는 곰 오리건과 곰 어깨에 목말 탄 빨강 코 난쟁이!

동물이 사람을 돕지 않고, 사람이 동물을 돕기 때문일까요? 그 ‘사람’이 온전치 못한 존재로 취급되는 난쟁이이기 때문일까요? 색연필과 물감과 사인펜을 사용한 이 소박한 그림은, 그러나 비현실적인 동화적 세계 너머 근원적인 고독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스타 서커스단의 어릿광대 듀크와 재주 부리는 곰 오리건은 단짝입니다. 언제나처럼 그날도 공연이 끝나 오리건을 우리로 데려가는 참인데, 오리건이 문득 말을 건네지요. 자기를 큰 숲으로 데려다달라고요. 듀크는 잠시 생각하다 미련 없이 단짝과 함께 서커스단을 나섭니다. 오리건이 원하는 큰 숲으로 가려면 긴긴 여행을 해야 해서, 둘은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만큼 버스와 기차를 타고 여관 잠을 잔 다음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가며 노숙을 합니다. 자고 나면 걷고, 자고 나면 걷습니다. 걷고 걷고 또 걷는 두 존재가 자유의 바람을 마음껏 들이키는 이 장면에서 독자는 듀크의 독백을 듣습니다. “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나는 반 고흐의 그림 같은 풍경을 헤치고 갔습니다…./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듀크의 이 독백은 물론 앞서 인용한 랭보의 시구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이 장면의 그림은 고흐의 밀밭 그림 여럿에 대한 오마주일 테고요.

둘은 그렇게 걷고 걸어 마침내 숲 울창한 오리건의 고향 ‘오리건’에 이릅니다(그러니까 곰 ‘오리건’은 ‘원주댁’같이 출신지로 이름을 삼은 셈입니다). 마지막 밤을 함께 지내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듀크는 눈 쌓인 숲을 떠나지요. 듀크가 지나간 눈발자국 위에 살에 붙어버려서 떼어지지 않노라던 빨강 코가 떨어져 있습니다. 오리건처럼 듀크도 비로소 자유로워진 거지요. 랭보의 시와 고흐의 밀밭 그림이 영감을 불러일으킨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금빛 밀밭을 헤치며 나아가는 곰과 난장이, 하얀 눈밭의 빨강 코… 먼 훗날 어떤 후배 예술가가 이 장면을 기려 오마주를 바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리건의 여행》
글 : 라스칼
그림 : 루이 조스
옮김 : 곽노경
미래아이
  • 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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