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윤희상 <장닭>

수탉,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달려들다

큰 누님이 결혼한다고 도배하는 날,
방안의 장롱을 마당으로 꺼내놓았다
그래서, 마당에서 놀던 장닭과
장롱 거울 속의 장닭이 만났다

한쪽에서 웃으면, 다른 한쪽에서 웃고
한쪽에서 폼을 잡으면, 다른 한쪽에서 폼을 잡고
한쪽에서 노래하면, 다른 한쪽에서 노래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닭이 장닭에게 덤벼들었다
서로 싸웠다
놀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췄다
누가 먼저 덤벼들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장닭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거울이 깨졌다

사람들은 눈앞의 장닭이
거울이 깨지면서
거울 속에서 걸어나온 장닭인지
마당에서 놀다가 거울 속으로 걸어들어간 장닭인지
아니면, 또다른 장닭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윤희상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학동네, 2014



<장닭>은 시인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을 적은 시다. 도배를 한다고 마당에 내놓은 장롱 거울 속의 제 모습에 놀란 수탉이 그것과 싸우는 이야기를 담은 시다. 수탉이 거울 속의 제 모습에 놀라 사납게 덤벼드는 모습은 분명 신기한 광경이다. 그랬으니 사람들이 놀라서 일손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시인은 이 소동의 전말을 담담하게 전한다. 사실 이 수탉이 보인 행동은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거울이 수탉을 속이려고 든 적이 없으니, 수탉은 스스로 미망에 빠져 벌인 어리석은 행동이다. <장닭>에서 볼 수 있듯 윤희상의 시는 대개는 별다른 시적 기교 없이 평이한 어조로 되어 있다. 시를 읽는 데 어려울 것이 없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 사람이다. 아마도 그의 체질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시를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쉬운 어조로 풀어내는 시 속에 뜻밖에도 되새겨보아야 할 의미의 심연이 숨어 있다.

도대체 거울이란 무엇인가. 20세기의 독일 철학자이자 파리의 산책자인 발터 벤야민은 거울로 넘쳐나는 아케이드의 매혹에 빠져들었다. 거울에 의해 공간은 “인공적인 넓이”를 얻고, “램프 불빛 아래에서 그것의 넓이는 몽환적일 정도로까지” 넓어진다. 거울과 거울을 마주 세우고 서로를 비추게 만들면 “거울 속에 무한에의 원근법”이 펼쳐지는데, 벤야민은 거울로 뒤덮인 공간에서 공간이 거울 안에서 무한 복제되며 확장되는 그 마술적 모습에 빠져든 것이다. “이러한 거울의 세계 또한 다의적, 아니 무한대로 다의적일 수 있겠지만-그러나 역시 양의적으로 남아 있다. 이 세계는 눈짓한다-이 세계는 언제나 하나의 세계이지 거기서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게 해주는 무(無)의 세계는 결코 아니다. 변신하는 이 공간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의 품안에서뿐이다.”(《아케이드 프로젝트》, 1281쪽) 벤야민은 현대적인 공간 안에서 거울이 온갖 눈짓, 시선들이 번성하면서 “시선들의 속삭임”들이 아케이드를 가득 채우고 마침내 공간이 “시선의 속삭임에 메아리”를 보내고 있음에 주목한다.

거울은 빛을 그러모아서 그 빛을 다시 반사해낸다. 사람은 빛이 비치는 세계에서 빛 속에서 산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산다는 것은 어둠을 건너는 것”이고, “빛을 본 사람이 어둠을 건널 수 있다”(<빛>). 거울은 빛이 있어야만 구실을 하는 사물이다. 빛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거울은 오직 빛이 있을 때만 제 앞에 놓인 사물과 풍경을 그대로 비춰 보인다. 빛의 세계에서 거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우주를 이룬다. 한쪽에서 웃으면 다른 한쪽에서도 웃고, 한쪽에서 폼을 잡으면 다른 한쪽에서도 폼을 잡는다. 거울은 마치 똑같은 세계의 일인 듯 저쪽의 일들을 그대로 비춰 보인다. 하지만 그 세계에 거주하는 것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들이다. 그러니까 거울은 허상들의 세계다.

다시 시인의 집 마당에 내놓은 거울로 돌아가자. 수탉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다른 개체로 착각하고 그것에 덤벼들었다. 수탉이 거울에 덤벼든 것은 거울에 도취된 까닭에 분별력을 잃은 것이다. 그 거울에 비친 상에 덤벼든 수탉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 수탉이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인은 그 어리석음을 탓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수탉이 그 거울을 부리로 세게 쪼아서 거울이 그만 깨지고 말았다. 거울이 사라지자 거울에 비치던 수탉도 사라졌다.

수탉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당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사라졌을 텐데, 시인은 그 수탉이 마당에서 놀던 그 수탉인지 아니면 거울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그 수탉이 애초에 마당을 거닐던 바로 그 개체임을 알고 있다. 시인이 그 수탉이 밖에 있던 것인지, 안에 있던 것이 걸어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거울이 아상(我像)을 비춰 보이는 그 무엇이고, 아상은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라는 것을 말하려고,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능청을 부린다.

거울이 깨지기 전까지 거울 안의 ‘나’와 거울 밖에 있는 나는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분별을 버릴 때 거울 속의 상을 향해 덤벼들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헛것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고 발로 차는 짓을 하는 것일까. 보이는 것이라고 다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다 진리가 아닌 것이다. 있지도 않은 부재의 상과 싸우는 게 미망이다. 삶의 미망에서 벗어나려면 거울을 깨라! 나는 <장닭>을 읽으며 ‘거울을 깨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내가 너무 앞질러 갔던 것은 아닐까. 시인은 결코 그렇게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 거울을 깨라는 소리는 시의 저 뒤쪽에 숨어 있는 말이다. 말로 쓰지 않은 말이다. 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시의 문면 뒤에 숨어 있는 말하지 않은 말이다. 그것은 시인의 어법에 따르자면, 시인이 하는 말이 아니라 사물과 존재들에게서 나오는 속삭임들, 그리고 “어둠이 하는 말”이다. 이 속삭임, 이 어둠이 하는 말들은 다 비밀이다. 시인은 단지 사물들로부터 보고 들은 세계의 비밀을 다시 세계를 향해 전하는 자일 뿐이다.


윤희상(1961~)은 전남 나주 영산포에서 태어났다. “여러분 가운데,/자신이 고아, 사생아, 혼혈아, 전과자인 사람은/조용히 앞으로 나오세요”라는 말에 “나는 신발을 들고 앞으로 걸어나갔다”고 쓴 <징병검사장에서>라는 시에 따르면, 그는 고아, 사생아, 혼혈아, 전과자 라는 분류 속의 하나에 속한다. “일본 여자가 사는 집은 우리집이고 / 일본 여자는 나의 엄마였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일본 여자가 사는 집>에 따르면, 그는 혼혈아가 맞다. 광주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1980년 그가 고등학생일 때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때는 계엄군이 시를 검열했다. 그는 한 편의 시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9년 <세계의문학>에 시를 선보이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소를 웃긴 꽃》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등이 있다.

나는 시인을 모른다. 어쩌다가 시인의 시집 두어 권을 읽었을 뿐이다. 시인은 서울에 살면서 줄곧 편집자로, 편집회사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 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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