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이승희 <갈현동 470 -1번지 세인주택 앞>

저녁과 골목길과 불빛들이 환기시키는 것들

아리랑 슈퍼 알전구가 켜질 무렵 저녁이 흰 몸을 끌고 와 평상에 앉는다. 그 옆으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사과 궤짝 의자에 앉아 오락 하는 아이의 얼굴이 불빛으로 파랗다. 저녁은 가만히 아이 얼굴을 바라보다, 작은 어깨 위로 슬며시 퍼져간다. 가로등이 켜지자 화들짝 놀란 저녁이 또 가만히 웃는 동안에도 아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빨갛게 익었다가 다시 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세상은 저녁 아닌 것이 없는 저녁이 되었고, 골목 끝은 해 지고 난 후의 들녘처럼 따뜻하다. 골목길을 따라 불이 켜진다. 낮에 보았던 살구나무에 달린 살구들처럼 노랗게 불 켜진 골목을 따라 집들도 불을 켜는 동안 나는 집 앞에 앉아 수학학원 간 딸애를 기다린다. 불빛은 얼마나 따뜻한가. 그림자를 보면 알 수 있지. 감추고 싶은 것 다 감추고, 아니, 더는 감출 수 없는 몸을 보여준다는 것은. 나는 때로 그렇게 따뜻한 불빛에 잠겨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우리 집에도 불이 켜졌다. 딸아이가 불빛을 따라 헤엄쳐 올 것이다.

이승희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장소들

어떤 지명들은 장소의 기억들을 소환하는 장치다. 무의식의 지층에 가라앉은 장소의 경험들은 곧 삶과 존재의 심원한 중심의 일부로 귀속된 그 무엇이다. 우리가 살았던 장소들과 우리 자신은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다. 삶이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이라면 삶과 장소들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진다. 사람은 한 번도 지리적 실재, 즉 장소를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 산다는 것은 이 장소에서 저 장소에로 이동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평생을 통하여 수많은 장소들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장소들이란 경험·기억·환상들로 직조된 시간의 다른 이름일 것이고, 한 장소를 이루는 시간의 퇴적층이란 이야기들의 바글거림일 것이다. 비평가 이광호가 한 책에서 “장소는 시간의 몸을 입고 있으며 내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2104)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기억으로 호명된 장소와 현재적 삶 사이에는 엄연한 ‘간격’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몸담아 살았던 과거의 장소들을 떠올리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그 쓸쓸함은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주체가 소외로 인해 겪는 감정의 굴곡이라 할 것이다. 장소들에 육화된 친밀성이 휘발되어버린, 아주 창백한 그림자와도 같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기억들을 머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저녁과 불빛들 : 골목길을 따라 불이 켜진다

이 시가 제시하는 “갈현동 470-1 세인주택 앞”이라는 지명은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서울의 한 장소를 지시한다. 하지만 이 장소에서 특별한 한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이 지명은 경험과 인식의 바탕으로 기억되거나 회고될 것이다. 아마도 시인 자신이 과거에 살았거나 지금 살고 있는 장소일 것이 분명한 이 지명은 삶의 한 거점을 가리킨다. 가로등이 켜지자 저녁이 화들짝 놀라는 이 골목은 현재의 것, 아직은 과거 속으로 잠겨들기를 거부하는 장소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사물들의 실재를 드러내는 물리적 빛은 정신이 깨닫는 진리의 빛에 견줄 수가 있다. 진리의 표상으로서의 빛은 사람을 어리석음과 미망에서 보다 높은 계시적 깨달음에로 이끈다.

번개가 찰나적인 빛의 현현이라면, 골목길을 밝히는 불빛들은 점진적이고 느린 빛이다. 마침내 “아리랑 슈퍼 알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세상에는 “저녁이 아닌 것이 없는 저녁”이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다. 이 저녁에 사과 궤짝 의자에 앉아 오락에 열중하는 소년과 수학학원 간 딸애를 기다리는 애비가 서 있다. 이것은 소시민의 삶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저녁이 되고 골목길을 따라 불이 켜진다. 저녁과 불빛들은 이승희 시인이 편애하는 이미지들이다. 그의 시집에는 저녁과 불빛들이 우글거린다. 저녁을 밝히는 불빛들은 거기 인간의 삶이 있다는 암시, 그 암시의 근거가 되는 인간 연대에의 신뢰를 드러낸다. 아울러 자연의 무질서함과 어둠에 대응하는 이성의 빛, 나아가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유토피아에의 희미한 신호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불빛에 기대고 싶어지”(<시절, 불빛>)기도 하고, “서둘러 불을 켜는 사람을 보면 눈물나게 고맙”(<갈현동 470-1>)기도 하며, “저 불빛 속에 나의 거처를 마련하는 것”(<불빛에 쓴다>)은 그 불빛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연대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집 : 인간 실존의 심원한 중심

불을 밝힌 골목길 안쪽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집은 우리가 장소와 관련해서 겪는 경험들의 중심 공간이다. 어둠 속에서 불빛을 머금고 있는 집은 주거 공간이자 세속의 거친 삶에서 돌아오는 자들을 침묵과 평온함으로 맞아주는 은신처다. 그런 의미의 맥락에서 집은 존재의 요람이고, 나날이 이루어지는 삶의 의미를 갱신하는 자궁일 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근원 공간이다. 아울러 피로와 수고로 고갈된 생명에게 약동하는 힘을 충전시키고, 덧없고 무미건조한 삶을 기쁨과 의미의 삶으로 탈바꿈시키는 거의 유일한 지상낙원이다. 빈센트 비시나스(Vincent Vycinas)는 집을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이고 교환 불가능한 무엇이며,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해도 우리 삶의 방향을 정하고 길잡이가 되는 어떤 것”(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2005, 재인용)이라고 말한다. 철학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현대인은 점점 장소에 대한 애착을 잃고 의미의 장소들에서 밀려나고, 마침내 “집 잃은 존재homless being”(에드워드 렐프, 앞의 책)들로 전락하는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승희 시인에게 집은 여전히 존재의 근원적 중심 공간이다. 이 시의 시적 주체는 따뜻한 불빛이 번져가는 골목에서 한 마리 물고기로 변신하는 상상에 잠긴다. 막 과거로 돌아가려는 이 골목 속으로 “딸아이가 불빛을 따라 헤엄쳐”오는 상상을 잇는다. 이 저녁 풍경은 지상의 가장 따뜻한 온기를 지닌 집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일깨운다. 이 시가 따뜻하면서도 일말의 쓸쓸함을 머금고 있는 것은 이 저녁 풍경이 곧 과거를 향하여 빠르게 달려가고 사라질 암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희(1965~)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1997년 <시와 사람>으로,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등이 있다. 그의 이름을 보고 얼핏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남성이다. 그는 청년 시절 문학을 벗 삼고 문학을 쓸쓸한 삶의 지지대 삼아 보냈다. 그에게 청춘은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이었고,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던 시절이었을 테다. “살고 싶어서/가만히 울어본 사람”(<상처라는 말>)은 상처와 치욕이 많은 삶을 견디며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나는 죽더라도 온 힘을 다해 죽을 거라고 다짐했다”(<110-33>)와 같은 다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는 많은 지명들을 품고 있다. 응암동 110-33, 연신내 약국 앞, 갈현동 470-1, 청주 중앙공원 잡목숲 뒤 쪽방 따위는 그가 오래 살았던, 혹은 잠시 머물렀던 계류지들이다. 이 장소들은 삶의 고단한 자리일 테고, 이것은 “자꾸만 제목이 바뀌는 책/제목 없이 시작되는 영화”(<화분>)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여러 장소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책/영화로 이해하는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 2014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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