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그까짓 사랑 때문에 울지 말자

사진제공 : 마음산책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김용택 시집 《그 여자네 집》, 창작과비평사, 1998


<선운사 동백꽃>이 노래하는 사랑은 깨진 사랑이다.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아쉽게도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랑의 약속을 파기해버린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 속에는 ‘항상’이란 뜻이 숨어 있다. 그냥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 동안 항상 사랑하겠다는 다짐이라는 것이다. 이때 ‘항상’과 ‘영원히’는 한뜻이다. 그런 다짐은 시간의 유동성 속에서 깨지기 일쑤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지속성을 구축하는 약속”이고, “우연을 영원에다 기록하고 고정시키는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현실 속에서 사랑은 지속성을 구축하기 어려운 약속이고, 더구나 우연을 영원에다 기록한다는 것은 실로 지난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사랑의 약속은 자주 사랑을 배신한다.

사랑은 비이성적 몰입에서 겪는 지독한 착란이다. 이 착란은 기적으로 탈바꿈한다. 사랑이 “마술적인 외재성의 한순간을 맞이하여 불타버리고, 소진되며, 동시에 소비”(알랭 바디우, 《사랑예찬》)되는 경험인 까닭이다. 사랑은 너무도 강렬하고, 존재가 완전히 녹아버리는 일이다. 낭만적 사랑의 완성이 대체로 죽음으로 귀결되는 사정도 그 때문이다.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타자가 나의 존재를 훔쳐가도록 방임하고 방조하는 행위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몸과 마음은 항상 그곳에 있지 않다. 사랑에 빠질 때 존재는 이미 누군가의 존재 영역 속으로 달아나버린다. 여기 있는 것은 자기 상실과 자기 부재의 흔적뿐이다. 이 어릿광대의 어리둥절한 얼굴, 즉 존재의 흔적 속에서는 사랑의 열정만이 저 혼자 끓어오른다. 그러므로 사랑은 놀랍고도 기이한 현상이다.

사랑의 첫 번째 매개가 된 것은 타자의 얼굴이다. 눈을 반짝이고 환하게 미소 짓는 바로 그 얼굴이다. 얼굴은 타자가 나에게 그 존재를 드러내는 최초의 방식이다. 가면이자 존재의 심연을 드러내는 그 얼굴을 통하여 빛이 쏟아진다. 이 빛은 압도적이다. 왜냐하면 이 빛으로 사랑에 빠지는 자들은 대개 눈이 멀기 때문이다. 모든 얼굴은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얼굴은 신체 중에서도 특히 영혼이 나타나고 변장하는 장소다. 사람들은 얼굴을 만들어 낸다.”(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나는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의 모호함과 추상성에 확고한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얼굴이다. 하지만 얼굴은 소유되거나 흡수할 수 없는, 불가능한 표면이다. 사랑에 빠진 자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놓친다. 얼굴은 달아났다가 돌아오고 다시 돌아왔다가 달아난다. 얼굴은 어느 날 정말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 얼굴의 영구적 부재가 곧 실연이다. 대개의 경우 실연은 괴로움을 낳는데, 그 괴로움은 망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다. 실연한 사람이 죽을 듯 괴로워하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한 존재를,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에 대한 망각이고, 망각이라는 점에서 실연과 죽음이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선운사 동백꽃>의 시적 화자가 여자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은 자신을 바라봐주고 또한 자신의 바라봄이 허용되었던 그 얼굴이 자신에게서 달아났음을 뜻한다. 사랑이란 한 얼굴에 대한 상징적 점유다. 그 점유의 계약은 한쪽의 일방적인 파기로 무효화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궤적을 더듬어볼 수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얼굴은 고통을 낳는다. 살얼음이 낀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는 자의 발이 아린 아픔은 사랑이 깨진 뒤의 고통과 등가를 이룬다. 발의 아림은 교묘한 감각적 치환을 통해 사랑이 깨진 고통을 명증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달아난 얼굴은 다음번에 만날 약속에 대한 희망을 저버린 얼굴이다. 달아난 얼굴은 사실적 구체성을 잃고 냉혹한 추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냉혹한 추상과 마주 서게 되는 자가 떠맡아야 할 몫은 무력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가까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이 울음은 사랑을 잃은 슬픔의 방출이자 자기 연민의 한 형식이다. 허나 울음은 아무 위로도 되지 않는다. 사랑의 상실로 인한 존재의 고갈만을 더 생생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다시는 울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해보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제 사랑이 깨진 뒤에 고창 선운사를 찾은 모양이다. 그 여행은 다시는 울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한 것을 더 단단하게 굳히기 위함이다. 하지만 선운사 뒤안에 피어 있는 붉은 동백꽃을 만나는 순간 그 다짐은 무너지고 만다. 사실 시적 화자를 버리고 달아난 얼굴과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선운사 동백꽃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데 왜 시적 화자는 엉엉 울고 말았을까. 붉은 동백꽃이 아직도 제 마음에 남은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사무침을 환기시켰을지도 모른다. 아니 붉은 동백꽃은 그 자체로 혼자 붉게 피어 있는 제 마음이다. 시적 화자가 엉엉 운 것은 붉은 동백꽃이 불러일으킨 서러움과 더불어 온 한 진리에의 각성 때문이다. 마음에 벼락처럼 깃든 진리는 세월이 흘러도 이미 지나간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선운사 동백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보다 앞선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피지 않했고/막걸리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라는 미당 서정주의 절창인 <선운사 동구>라는 시도 알 가능성이 높다. 두 시는 고창에 있는 선운사라는 고찰과 동백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짝을 이룬다. 두 시는 얼핏 닮았지만, 두 시는 다른 시다. 미당의 시가 아직 피지 않은 동백꽃과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을 노래한다면, 김용택의 시는 붉게 흐드러진 동백꽃과 그 앞에서 오열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노래한다. 미당의 시 밑바닥에 깔린 것은 여러 번 사랑을 겪고 그것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 하지만 이제는 사랑이 불러일으킨 의지의 착란 따위는 저 멀리 밀어낸 자의 체념과 달관이지만, 김용택의 시에 깔린 것은 존재를 불태워버리는 사랑의 황홀감과 그 미망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자의 생생한 괴로움이다. 사랑이 전쟁이라면, 미당의 시는 종전(終戰)이 되고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고요와 평화를, 김용택의 시는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받은 상처와 그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노래한다. 사랑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갈 일이다. 내게 다시 사랑이 온다면, 동백꽃 피는 시절 선운사를 찾아가서 내 마음에 타오르는 사랑의 황홀경과 괴로움을 가만히 들여다볼 것이다.


김용택(1948~)은 전라북도 임실군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이듬해에 교사시험을 보고 스물한 살에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해서 2008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교사로 재직했다.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해서 1992년 창작과비평사 21인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처음으로 시를 내놓으며 시인이 되었다. <섬진강> 연작시로 명성을 얻은 탓에 그에게는 늘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그동안 《섬진강》(창작과비평사, 1985), 《맑은 날》(창작과비평사, 1986), 《누이야 날이 저문다》(청하출판사, 1988), 《꽃산 가는 길》(창작과비평사, 1988), 《그리운 편지》(풀빛, 1989), 《그대, 거침없는 사랑》(푸른숲, 1993), 《강 같은 세월》(창작과비평사, 1995), 《그 여자네 집》(창작과비평사, 1998), 《나무》(창작과비평사, 2002), 《연애시집》(마음산책, 2002), 《그래서 당신》(문학동네, 2006),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 2013) 같은 시집을 펴내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 2014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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