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내 수첩에 적어놓은 것들

제 책상 한켠엔 수첩 하나가 고이 놓여 있습니다. 불현듯 드는 생각이나 간밤에 꾼 기막힌 꿈들을 적어놓는 종이 뭉치죠. 수첩 맨 앞 하드커버에는 검정색 사인펜으로 ‘썩어빠진 당신의 무엇’이라 적어놓았습니다. 문득문득 보일 때마다 열어보면 내가 이걸 왜 적어놨지, 하는 것들이 태반입니다.

1번 케이스) 전혀 말이 안 되는 알 수 없는 단어의 조합형
‘정민철 폭풍 커브, 하늘색 벽지로.’
‘유자 냄새 커피 한 잔 2500원.’

2번 케이스) 오그리 토그리 연기 열정 가득한 에세이형
‘퇴보한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근데 더 퇴보하면 낭떠러지 호잉.’
‘꼭 여자 주인공 해보기.’

3번 케이스) 명언형
‘유명해지기 위해 사용할 그 어떤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다.’ - 게리올드만 -

4번 케이스) 이별 후 아픔 승화형
‘나 왜 버려, 이 기집애야. 내 눈 앞을 가리는 게 눈물인지 눈곱인지 알 수가 없다.’

팔에 돋는 소름이 고름이 되어 터져버릴 것 같은 지경에 이른 순간, 한쪽 면에 덩그러니 묻어 있는 문장 하나가 그럴 듯합니다.

‘가만히 보면,
모두가 의외로 살아 있다.’

제목도 없는 이 한 문장의 - 시라고 하기에도 뭣한 - 시를 보면서 갑자기 많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 살고는 있구나. 굉장히 의외지만 다들 살아 있긴 하구나. 죽지 못해 살더라도 살아는 있구나.

꽤나 큰 장점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 말입니다. 밥을 먹을 수도 있고, 잠을 잘 수도,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꿈에서 정민철이 하늘색 벽지로 폭풍 커브를 던지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어제 부장님한테 혼구멍이 났어도 살아 있으니 오늘은 혼구멍이 안 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이틀째 한화 이글스가 역전패를 당했어도 살아 있으니 오늘은 역전승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장님도, 한화 이글스의 선수들도 살아 있으니 곧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 이겨주세요. 어제 낮술 먹고 야구 보다가 역전당하는 거 보고 또 술 먹었어. 나 이러다 죽으면 어떡해. 힝.

살아 있다는 건 경험 속에 있다는 겁니다. 나는 지금 노트북에 묻은 짜장면 국물을 한 달 동안 지우지 않으면 결국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난 만날 경험해. 경험쟁이야. 아무튼 경험하다 보면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요. 새롭게 배우기도 하고 적응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괜찮아지는 거겠죠. 생각해봅시다. 이글스가 13연패 하니까 “뭐 괜찮아. 난 이글스라 행복하거든” 하지, 라이온스가 13연패 했다고 쳐봅시다. 아마 그날 대구 동성로에는 파란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소주를 마시며 “내한테 우째 이랄 수가 있노. 우째 내한테 이런 시련을 주냐 말이다”라고 울고불고하는 팬들로 가득 찰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거라니까. 난 이글스라 행복합니다.

또 한 가지, 나만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당신 주변엔 꽤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 주변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놀랍습니다. 굉장히 의외죠. 살아 있을 줄 몰랐는데, 살아 있네요.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냥, 고마워합시다.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 갑자기 보고 싶어졌을 때 볼 수는 있게 살아준 당신이 참 고맙다,고 생각합시다. 고맙습니다. 거기서 뭐하세요. 뭘 하시든 고맙습니다.

수첩에 적힌 이상한 글자들이 지금의 나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스물다섯 살의 박정민이 스물여덟 살의 박정민을 위로합니다. 동생 주제에 꽤나 위로를 잘합니다. 가끔씩 느끼는 큰 감정의 요동을 글자로 남겨보세요. 그중 8할은 훗날 보면서 쌍욕을 퍼부을 글자들이지만 그중에는 분명 나를 세워주는 글자가 있을 겁니다. ‘정민철의 폭풍 커브.’ 말도 안 되는 글자지만, 난 아직도 폭풍 커브를 던지는 게 꿈입니다.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나도 각도 큰 변화구를 던져볼 수 있겠지요. 여러분도 앞으로 계속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직구만 던지면 얻어맞기 일쑤니, 적절히 변화구도 섞어가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는 데 9회 말이 있나요. 역전패 같은 것도 없겠죠.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의외로 잘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길 때까지 그렇게 계속 살아가세요. 아주 잘하고 계신 겁니다.

박정민은 영화 <전설의 주먹>으로 이름을 알린 신인 배우. 2011년 <파수꾼>으로 데뷔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 2014년 05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5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우편물   ( 2016-09-01 ) 찬성 : 14 반대 : 22
마지막 단락의 마지막 세 문장이 너무 좋네요.
  bohya   ( 2016-04-28 ) 찬성 : 14 반대 : 12
작가님 말처럼.. 3년 전 싸이 히스토리를 보다 위로를 받았습니다. 3년 전의 나는 더 어른스럽고 멋지더군요. 퇴보하는 이유가 뭘까요? 위로받는 동시에 슬픈 마음도 드네요. 암튼 너무 공감되어 댓글이란 걸 달아봅니다.
     ( 2016-02-21 ) 찬성 : 12 반대 : 10
저도 예전에 줄기차게 글을 썼던 적이 있었는데 되게 오글 거렸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위로도 되고 도움도 많이 되는것 같아요.. 근데 오늘 또 이 글을 읽고 위안을 얻어가네요..
  1234   ( 2015-04-26 ) 찬성 : 23 반대 : 9
가만히보면,모두가 의외로 살아있다라는 말이 머리에 깊숙히 박히네요
 마지막문장에서 큰 위로 받고갑니다 이런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은지   ( 2014-05-18 ) 찬성 : 63 반대 : 52
우와 되게 깊네요. 연기가 좋은 데는 이유가 있겠어요. 고마워요! 저도 위로받고 갑니다.
201911

201911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11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30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