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박은율 〈나비〉

나비야, 청산 가자

열렸다 닫혔다 하며 날아다니는 소책자
세상에서 가장 얇은 전집
표지도 서문도 추천사도 없는
표지가 곧 내용인
누구도 읽은 적 없는 올봄의 신간
나비 채집광 나보코프조차 읽어내지 못한 신비의 책
읽으려 들면 휘발해 버리는 비밀의 금박 문자
허공에 찍는 태양의 무늬
샤프나 플랫이 여럿 붙은 춤추는 악보
바람결에 흔들리는 돛단배, 몸보다 커다란 날개 속에 떨림을 감춘
무작정 떠나고 보는 탐험가
배낭도 나침반도 향기 지도도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너는 늘 네 일에 열중하지
긴 더듬이로 빛의 씨실 날실 더듬으며
꿀샘 깊숙이 대롱을 꽂고
작은 몸 떨면서 꿈을 음미하지
허나 뭐니 뭐니 해도 나의 시선은 시멘트 담벼락 위 내려앉은
네 가느다란 다리에 머문다네
그리고 너무 작은 내 발 들여다보지
가까스로, 이 땅에
서 있는

박은율 시집 《절반의 침묵》, 민음사, 2013



봄과 나비

나비의 중세형 옛말은 ‘나뷔’이고, 현대에 가까운 근세형은 ‘나뷔, 나 , 나부’다. 나비라는 낱말은 ‘날다’라는 동사와 ‘-방이’의 합성어로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쓰는 옛 기물에 나비 문양이 많이 나타난다. 자수, 도자기, 목칠공예는 말할 것도 없고, 병풍, 침구류, 의상, 베갯모, 보자기 등에도 다양한 나비 문양이 나타난다. 장롱과 반닫이와 궤 등에 쓰이는 장석은 거개가 호접문(胡蝶紋)이다. 민화나 화훼초충도(花卉草蟲圖)에서 볼 수 있듯이 나비는 우리 선조들에게 정서적 친화력을 가진 생물 중의 하나였다.

봄날 환한 햇빛 속을 하늘하늘 날아가는 나비는 봄의 전령이다. 늦은 봄마다 남도 지방인 함평에서는 나비 축제가 열린다.

나비 축제는 봄볕의 화사함을 즐기고, 백화제방을 기리는 축제이기도 하다. 나비와 온갖 꽃들이 어우러져 축제 기간 동안 세상은 더없이 화사해진다. 옛 사람들은 삼월 삼짇날에 나비를 보고 한 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했다.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는 행운을, 흰나비는 불운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흰나비가 문안으로 들어오면 초상이 날 징조고, 호랑나비를 만나면 운수 대통의 징조라 했다. 옛 사람들에게 나비는 미래를 예시하는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비와 천지에 피어나는 봄꽃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흔히 꽃은 여성이고 나비는 남성이라고 한다. 꽃과 나비는 한 쌍의 연인이요, 둘의 조합은 행복의 표상이다. 더러는 나비를 죽은 자의 혼령이라고 믿기도 했는데, 특히 고대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영혼이 육체를 떠난 뒤 나비로 변신한다고 믿었다. 나비는 인간의 상상 속에서 망자의 혼령으로 이승과 저승 사이를 날며 우리가 겪는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


나비는 책이다

조선시대 선비의 시조들에서부터 현대 시인의 시에 이르기까지 시적 상상의 공간에는 무수히 많은 나비들이 난다. 1930년대 시인 김기림은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3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바다와 나비〉)라고 노래했다. 바다와 나비의 대비 효과가 매우 선명한 시다. 바다가 거대한 실존 세계라면 나비는 하나의 개체를 말할 것이다. 서정주는 “가냘픈 날개의 나비처럼 헤매 다닌 나는/ 산 나무에도 더러 앉았지만,/많이는 죽은 나무와 진펄에 날아 앉아서 지내 왔다.”(〈편지〉 일부)고 썼다. 언제 찢길지 모르는 나비 날개의 가냘픔에 견줘 마침 참혹한 전쟁을 겪은 시인이 뜨내기로 떠돌며 느낀 생존에의 불안감을 얼핏 내비치는 대목이다.


누구도 읽은 적 없는 올봄의 신간

지구상에 존재하는 1억 종에 달하는 생물 종의 하나인 나비. 나비는 살과 뼈의 무거움을 조금도 갖지 않은, 가볍고 소슬한 존재라는 점에서 바람의 사생아다. 바람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불어간다. 중력의 힘조차 미치지 않는 탈육(脫肉)의 존재인 나비를 무엇이 한곳에 붙박이로 매어둘 것인가. 나비는 제 마음대로 이승의 묘지에서 육계 6천까지 날아간다. 아울러 나비는 뿌리나 줄기가 없이 허공을 난다는 점에서 학 - 백조 - 피닉스의 방계(傍系)다. 시인의 상상세계 속에서 나비는 책이다. 인류는 저마다 한 권의 책이 아닌가! 아이도 한 권의 책이고, 청년도 한 권의 책이며, 노인도 한 권의 책이다. 우리 내면의 저마다 다른 기억 - 자아들이 그 책의 내용이다. 70억의 인류는 70억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서관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비는 날아다니는 소책자이고, 세상에서 가장 얇은 전집이며, 올봄의 신간이다. 나비의 언어는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언어다. 봄날 융융한 세상을 더욱 화사하게 만드는 꽃들 위로 나는 나비를 보면 삶의 척박함이라곤 도무지 모른 채 아무 근심도, 설움도 없어 보인다. 나비는 그저 타고난 기쁨과 행복을 향유하는 복 받은 존재다. 나비가 책이라면, 이것은 자연의 순환과 게놈 지도, 즉 생명 원리의 비밀, 진화생물학의 메커니즘을 품은 방대한 신비의 책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사로 이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나비는 그 내용을 읽을 수 없는 신비의 책이고, 비밀의 금박 문자다. 나비는 태양의 무늬이고, 춤추는 악보다.


나비는 탐험가다

나비는 징그러워 보이는 유충에서 날개를 달고 변신한다. 괴테는 나비의 부화 과정을 두고 “가장 아름다운 현상”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전 세계에 걸쳐 18만 종 이상의 나비가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해마다 700종씩 새로운 나비가 발견된다고 하니, 앞으로 그 종이 더 늘어날 것이다. 진화가 만든 이토록 아름다운 생물체에 반한 문인들은 괴테 말고도 여럿 있다. 헤르만 헤세는 열렬한 나비 수집가였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나비 전문가였다. 나보코프는 “무엇보다 내키는 대로 찾아간 지역에서 보기 드문 나비들을 발견하고 그들이 먹고 사는 식물 한가운데에 섰을 때, 나는 시간과 시대의 초월을 만끽한다.”(옌스 죈트겐, 《별빛부터 이슬까지》, 289쪽)고 고백한다. 시인의 관찰에 따르면, 나비는 배낭이나 나침반도 없이 무작정 떠나고 보는 탐험가이자 낭만 여행자다. 나비는 세계를 탐문하면서 꿀을 채취하고, 짝짓기를 하면서 제 한살이를 마칠 것이다.

“허나 뭐니 뭐니 해도 나의 시선은 시멘트 담벼락 위 내려앉은/네 가느다란 다리에 머문다네”라는 구절에서 시멘트 담벼락과 나비의 가느다란 다리가 대조적으로 도드라진다. 인공 문명의 반생명성에 견주자면 나비의 가느다란 다리는 생명의 안쓰러운 현존의 상징이다. 시멘트 담벼락 위에 앉은 나비의 가느다란 다리에 머물던 시인의 시선은 “가까스로, 이 땅에/서 있는” 자신의 발로 옮겨진다. 가느다란 다리로 생존의 무게를 감당하는 나비가 그렇듯이 시인의 너무 작은 발 역시 가학적 폭력이나 대량 살상이 무시로 일어나는 이 무서운 행성에서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가냘프다. 오, 나비야, 세상에 지지 말자. 나비야, 청산 가자. 가다가 힘들면 꽃에서도 쉬고, 나뭇가지에서도 쉬고, 풀 위에서도 쉬었다 가자.


박은율(1952~)은 목포에서 태어났다. 198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고, 2013년에 시집 《절반의 침묵》을 펴냈다. 따져보니 서른여섯에 시인이 되고, 그 뒤로 스물다섯 해 만에 첫 시집을 냈으니, 등단도 늦고, 첫 시집도 늦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미시간의 달’과 ‘미시간의 겨울’을 노래하는 구절들이 나오는 걸 보면 시인이 외국에 나가 살다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는 세상 만물이 윤회하는 그 덧없음을 관조하며 침묵했었는지도 모른다. 일면식도 없는 이의 시집을 받아 읽으며, 나는 그가 침묵의 편인 게 마음이 든다. 그는 “반만 말하자/반은/침묵”(〈튤립〉)이라고 노래하는 시인이다. 침묵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자의 곤혹을 감싼다. 침묵하는 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윽하다.
  • 2014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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