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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확장되는 공간

화가 권인경

“지난해 파리 시테섬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했어요. 시테섬은 파리가 시작된 곳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방사선으로 확장되어나갔다 합니다. 개인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는 것 같아요.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역. 밖으로 확장해나가는 시작점, 출발점이 되는 그곳을 하트랜드(heartland)라는 개념과 연관시켜 작업을 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가 권인경은 2013년 11월 〈Heart-Land〉라는 이름으로 일곱 번째 개인전을 했다. 그때 전시했던 작품들이 서울 성수동 ‘아뜰리에 아키’의 <나의 도시들 이야기>전(2월 28일까지), 서울 재동 ‘갤러리 에뽀끄’의 <풍경이 말하는 방법>전(2월 6일까지),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의 <한국화의 반란>전(2월 9일까지)에서 나누어 전시되었거나 전시되고 있다.

‘아뜰리에 아키’에서 그를 만났다. 이곳에서 전시되고 있는 그의 작품 〈펼쳐진 집〉은 푸른색 창공 혹은 바다 위에 높다란 빌딩으로 가득 찬 도시, 그리고 산들이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파랑과 청록색 바탕 위에 굵은 동양화 붓에 검은 먹을 묻혀 한지에 쓱쓱 대담하게 그려낸 산과 고서를 오려 붙이고, 얇은 붓에 채색물감을 묻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을 꼼꼼하게 그려냈다. 허공 속에 펼쳐진 풍경처럼 작가의 자아가 펼쳐져서 확산되어나간다는 의미다.

그는 홍익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2012년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연 혹은 자연 속에서 와유하거나 은거하는 인물을 그린 전통그림과 달리 그의 그림에는 높은 건물들로 가득 찬 도시풍경이 등장한다. 과감한 원색을 사용하고, 콜라주 기법을 도입하고, 동양화 물감뿐 아니라, 수채물감, 때론 아크릴물감까지 사용하는 것도 새롭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의 시선에 의해 채집되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풍경들, 그리고 상상을 그린다. 바탕을 물들인 푸른색이, 이곳이 작가의 상상 속 세계, 유토피아임을 암시한다.

작품에서 초현실적인 색채도 느껴진다고 하자 작가는 “맞아요. 제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를 굉장히 좋아해요.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한 화면에 낮과 밤이 같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 옛 그림에도 그런 요소가 많아요. 용상 뒤에 두던 일월오봉도 병풍에도 해와 달이 함께 있고, 봄의 나무와 겨울의 나무가 함께 어우러진 사철도 병풍도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펼쳐진 집_ 한지에 고서 꼴라쥬 수묵채색, 126×156cm, 2013
바탕을 왜 푸른색으로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제 사주에 토(土)가 일곱 개나 들었다고 해요. 화(火)가 하나 들어 있고. 황무지와 같죠. 은연중에 물을 그리워해서인지 푸른 톤이 와 닿아요. 서양화를 그리는 친구가 제가 쓰는 색이 놀랍대요. 자신 같으면 그렇게 과감하게 색을 쓰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라고 말한다.

콜라주 기법을 처음 도입한 것은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이었다.

“수묵화를 그리다 망친 종이를 쟁여놓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북북 찢어서 화면 속에 재배치하기 시작했지요. 선화예고에 다니던 시절에는 조소를 하고 싶었고, 회화를 하면서도 얹고 중첩시키고 덧입히고 두텁게 그리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입체적인 느낌이 좋았는데, 수묵콜라주에서 그 길을 찾았죠.”

대학원에 다니던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진경-그 새로운 제안〉전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한 게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다.

“좋은 전시기획에 참여하는 게 때로는 창작에 물꼬를 터주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진경산수(眞景山水)는 풍경을 단순히 재현하는 게 아닙니다. 풍경을 보면서 느꼈던 감흥과 정취를 회화적으로 재구성하는 게 특징이지요. 저에게 감흥을 주었던 풍경들을 한공간에 재배치하는 작업 방식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존재하는 그곳의 단상들_ 한지에 수묵채색, 60×92cm, 2013
그는 그림에 고층빌딩이 많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서울 대치동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제가 1979년생인데, 태어나서 줄곧 살았던 곳이 대치동 한복판입니다. 제가 어릴 적 대치동은 지금과 같지 않았어요. 가까운 논에서 스케이트를 탈 정도였죠. 부모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사를 안 하셨는데, 옛 물건을 버리지 않으셔서 수십 년 된 금성 선풍기가 아직 있어요. 아버지는 LP음반 1만 장을 모으실 정도고요. 덕분에 디지털 공간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가지게 되었죠. 도시공간은 제게 부정적인 이미지만 있는 게 아니에요. 어릴 적에는 미로 같은 공간을 누비며 아지트를 만들던 놀이공간이었지요.”

그는 한 사람과 그 사람이 성장한 공간은 샴쌍둥이 같다고 말한다.

“저라는 존재가 처음 접하는 게 방이고, 그 다음 집, 동네, 도시로 확장되어나가지요. 자아도 그렇게 확장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동양의 고전을 뒤지다 복잡한 세속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노니는 것만 은거가 아니라 저잣거리에서도 은거할 수 있다는 대목을 발견했다 한다. 빌딩 속도 그에게는 은거의 장소였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덩그러니 빈 의자나 화분이 등장한다.

“동생이 수술 후 충격으로 한동안 말을 잃었는데, 그 때문에 괴롭힘을 많이 당했어요. 사람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회의가 많았고,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애착이 커진 것 같습니다. 고흐의 구두처럼 의자도 어떤 존재를 뜻하는 것 같아요. 작가도 자신의 그림을 100% 해석하지는 못해요. 저도 ‘내 그림에 이게 왜 자주 등장하지?’라고 할 때가 있지요. 제가 작품에 그려 넣은 산세비에리아 화분을 보고 친구가 ‘너랑 똑같다’고 하기도 하지요.”

저장된 파라다이스 1_ 한지에 고서 꼴라쥬 수묵채색, 160×130cm, 2013
〈저장된 파라다이스 1〉은 괴석(怪石) 형태 안에 건물과 나무·화분· 화병 등이 그려져 있는데, 중앙에 빈 나무의자가 놓여 있다.

“조선시대 문인 최립이 쓴 글을 보면 ‘화산 풍경을 즐기기 위해 멀리까지 다녔는데, 괴석을 창틀에 놓고 보니 그 작은 괴석 안에 풍경이 다 들어 있다’는 구절이 있어요. 멀리 여행해도 사실은 내 주변 풍경과 다르지 않죠. 이상향을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일상에서 찾자는 의미도 있습니다.”

〈여기에 존재하는 그곳의 단상들〉에는 여러 개의 방이 한 화면 속에 등장한다. 그의 방, 혹은 그가 방문했던 방들이다. 한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 그 사람을 상징한다면, 여러 명의 초상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 같은 작품이다. 콜라주 할 때 활용하는 고서는 황학동이나 부산 보수동 책방거리에서 구해 오는데, 주로 옛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잡설 책을 찢어서 쓴다고 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옛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을까?

“앞으로 40년, 50년 계속 그림을 그릴 텐데, 이제까지 10여 년을 그렸으니 지금이 출발점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전뿐 아니라 그룹전까지 찾아와서 제 그림을 보고 가는 분이 계신데, 그림을 구입할 만한 형편은 아니신지 엽서를 가져가 액자를 하신대요. 제 작품을 컬렉션하는 분들만큼 그런 분도 제게는 소중하고 반갑습니다.”

4년째 경기도 장흥 아틀리에 입주작가로 칩거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서울에 나올 때는 한꺼번에 일을 모아서 처리하고 간다고 한다. 곁눈질하지 않고 또박또박 자신의 길을 걸어온 젊은 작가. 그가 얼마나 깊고 확장된 세계로 또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지 기대된다.

작가 권인경(35)은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 ‘진경-그 새로운 제안 전’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는 공평아트센터에서 ‘도시-일상의 삶’이란 타이틀로 2005년 1회 개인전을 한 후 2013년 시립미술관 Emerging Artist로 선정되어 최근까지 총 7번의 개인전(서울문화재단 기금 후원 및 갤러리 공모)과 다수의 기획전,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현재는 가나에서 운영하는 장흥아뜰리에 입주작가이며 2013년 3월에는 프랑스 씨떼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13년 3월에는 프랑스 주재 한국문화원 외부작가 공모에 당선되어 전시를 열기도 했다. 2003년 중앙미술대전, 미술세계 대상전 특선, 2007년 송은미술대상전, 2009년 가나 나우아트 공모당선, 2011년 63스카이 아트 갤러리 신진작가 선정, 2012, 2013년 연속으로 서울문화재단에서 공모했던 ‘바람난 미술’전에도 참여했다.
  • 2014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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