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한 장면 - 해님이 하신 일

글 : 이상희 

《바람과 해님》
글 : 라 퐁테느 / 그림 :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 옮김 : 우순교 / 보림
눈바람이 한겨울 산골짜기집 뜰을 휩쓸고 지나는 소리가 들리면 집 안에서도 모자며 목도리로 머리를 꽁꽁 감싼 채 담요 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어린 시절 내내 바닷바람 칼바람을 원망하다가 이제는 산골짜기바람 눈바람을 한탄하게 되었구나, 생각하면서요. 그러다가도 아침이 되어 바위가 따끈하도록 가없이 쏟아지는 햇빛 세례를 받으면 얼어붙었던 온몸의 뼈마디 하나하나가 일제히 느슨해지면서 쓸쓸하고 초라했던 마음조차 훌훌 누더기 벗고 새로워집니다. 손바닥 뒤집듯 한탄이 감탄으로 바뀌는 순간이지요. 산골짜기집에서가 아니었더라면 이 놀라운 조화를 어찌 믿었을까요.

교회 종탑 지붕 여기저기에 아름다운 깃털의 새들이 앉아 있고, 종이 살짝 들린 듯해 보이니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참인지도 모릅니다. 종 위에 앉아 있는 핑크색 새와 종탑 위 뾰족 첨탑에 앉아볼까 망설이는 듯한 크고 노란 새가 가장 눈에 띕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합창하는 새들, 홀로 앉아 노래하거나 친구를 부르는 새도 보이고요(핑크 새를 향해 날아오는 새들은 핑크 새입니다). 아기 새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어미 새도 보이고, 지금 막 날아오는 새들과 지금 막 날아와 앉는 새들도 보입니다.

그 사이사이로 아주 멀리서 날아오고 있는 새들이 작게, 더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더 아득히 먼 데서 날아오는 새는 거의 점처럼 흩뿌려져 있어요.


상대적으로 왼쪽 앞의 까만 돔 지붕에는 둥그스름한 곳에 앉기 좋아하는 새들일까요, 스무여 마리만이 오르르 한곳에 표나게 모여 앉아 있습니다. 열심히 들여다보면 그 위쪽 첨탑에 앉은 두세 마리가 보이긴 해요. 그러나 그뿐, 대부분의 새들은 돔 지붕 둘레를 맴돌고 있습니다.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듯 흥분한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한눈에도 열두 가지 색 이상을 쓴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책 장면의 주제가 하얀 햇빛이니, 새들은 아마도 이 햇빛에 열광하고 있는 거겠지요. 돔 지붕과 종탑 지붕과 새떼의 배경으로 비워둔 여백 말입니다.

“새들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라는 한 줄의 문장과 함께 화려한 햇빛 세상을 담아낸 이 그림은 영국의 3대 그림책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Brian Wildsmith)가 만든 그림책 《바람과 해님》(원제는 《The North Wind and the Sun》)의 한 장면입니다. 바로 이 앞의 “해님이 따뜻한 햇살을 비추었어요./ 곤충들은 윙윙 날아오르고,/ 꽃들은 봉오리를 활짝 터뜨렸습니다.”에 이어지는 장면이지요.

‘누가 나그네의 망토를 벗기나’ 내기에 따라 바람이 온 힘을 다해 모자를 날려 보내고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동물들을 내몰고 배를 가라앉힌 끝에 해님이 하신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국 나그네는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빛과 햇볕 세례를 이기지 못해 강으로 달려가 망토를 벗습니다. 첨벙, 물속으로 뛰어들려고요.

프랑스 작가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이 이솝우화를 다시 쓴 《북풍과 해님》은 색채의 마술사로 일컫는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에 의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그림의 힘 덕분에 다시 곰곰 생각하게 해줍니다. 바람이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 햇빛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아이에게는 처음 알게 해주고, 어른에게는 새삼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1930년대 영국 요크셔의 탄광촌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그는 어린 시절의 무채색 환경 덕분에 오히려 편견과 오해 없이 마음껏 색채를 구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람과 해님》의 11번째 장면은 특히 이 작가가 자신의 그림 작업에 대해 ‘햇빛의 흐름’이라고 표현한 그대로, 눈바람이 불고 또 불더라도 해님을 떠올리고 햇빛을 떠올리고 햇살 속에 찬란히 살아나는 색채의 세상을 떠올리게 하는 명장면이라 할 만합니다.
  • 2014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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