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김형영 〈봄봄봄〉

이 하수상한 시절 다들 살아있었구나!

다들 살아 있었구나.
너도,
너도,
너도,
광대나물
너도,

그동안
어디 숨어서
죽은 듯
살아 있었느냐.

내일은
네오내오없이
봄볕에 나가
희고 붉은 꽃구름
한번 피워보자.



섣달그믐 지나자, 새로운 해가 수평선 위로 불쑥 솟는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온 것이다. 한 해가 지나간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137억2000만 년 전에 우주는 무로부터 탄생했다. 이 우주는 더 거대한 암흑물질에 감싸여 있다. 무에서 우주가 생긴 그 빅뱅의 순간을 르메트르라는 사람은 ‘어제가 존재하지 않는 날’이라고 명명했다. 우주가 생기기 전이니 어제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고, 내일도 없었다. 초, 분, 시, 날, 한 주, 한 달, 한 해 따위의 식별이 아예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별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빅뱅으로 무에서 4000억 개의 은하들이 생겨났다. 지구는 그 4000억 개의 은하들 중 하나인 은하에 속하는 작은 별이다. 그 별에 인류가 나타난 것이 20만 년 전이라고 하니, 인류는 지구에서 20만 번 해가 바뀌도록 살아온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노나라 제후 양왕이 치세 22년째인 기원551년 ‘안징재’라는 젊은 아가씨가 니구산(尼丘山)에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러 왔다. 그 아가씨는 64세인 한 제후국 재상을 만나 아들을 낳고, 아들에게 ‘구(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바로 공자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뒤 북인도에서 젊은 왕자 석가모니가 왕궁을 나와 들과 거리를 헤매 다니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고 설교를 시작했다. 기원전 538년, 그때 공자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같은 시기, 지중해의 많은 섬들 중의 하나인 사모스 섬에서 보석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피타고라스는 수학과 기하학에서 중대한 정리들을 찾아내고, 우주를 수적인 구조를 지닌 것으로 설명했다. 그는 우주에 대해 음악적 협화음들과 마찬가지로 정수 1, 2, 3, 4로 이루어지는 비율들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화음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우주가 아름다운 것은 수적인 비율로 표현할 수 있는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전의 이오니아 철학자들과는 달리 피타고라스는 신화적인 사고를 벗어나 자연현상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최초의 철학자였다.

우리는 공자와 석가모니와 피타고라스의 시대로부터 2551번이나 더 해가 바뀐 뒤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이 작은 별에서 해마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한반도 남쪽에서 한 해에 새로 태어나는 사람은 43만8625명이고, 죽는 사람은 24만5511명이다(2005년 통계청이 발표한 기준). 살아 있는 자들은 누구나 먹고 마시고 자고,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일들을 했다. 누군가는 연애를 시작하고, 누군가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진다. 누군가는 취직자리를 구하고, 누군가는 정년을 채우고 직장에서 퇴직한다. 누군가는 암에 걸리고, 누군가는 암을 치료한다. 누군가는 나무를 심고 누군가는 나무를 베어낸다. 누군가는 벽과 지붕을 허물고, 누군가는 애써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린다. 야구를 하는 누군가는 새로 프로구단에 지명을 받고 입단하고, 누군가는 구단에서 방출되거나 은퇴를 한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곡절과 사연을 거느리고 ‘오늘’에 도착한다. 오늘에 이른 사람들의 공통점은 살아 있다는 점이다. 다들 살아 있었구나! 너도, 너도, 너도 살아 있다니! 참 반갑구나! 이것은 살아 있음의 새삼스러운 의미와 가치에 대한 발견이고,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살아 있는 기쁨의 되찾음이다. 죽음이 오기 전까지 견디고 살아야만 하는 게 태어난 자의 당연한 의무라면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토록 감격할 만한 일인가? 아니다. 매 순간 우리의 살아 있음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징표다. 우리는 한 번만 태어나는 게 아니다. 삶은 어떤 순간마다 우리에게 늘 새롭게 태어나기를 요구한다. 그 요구에 부응했기에 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 있기 때문에 새해를 맞는다. 우리는 살아서 타인들과 반가움 속에서 만나는데, 내 눈동자 안에 들어오는 너는 실은 나를 자신의 눈동자 속에 비추게 하는 자다.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너’고, ‘너’는 ‘나’다. 결국 ‘나’는 또 다른 ‘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너의 살아 있음과 나의 살아 있음은 동질이고, 하나의 의미로 묶인다.

사람들은 배타적 존재로서의 소아(小我), 그 파편화된 존재가 ‘나’라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우리가 ‘나’라고 믿는 그 자아라는 것이 “실상 잡다한 작용들의 집합”이고, “우리 안에 본래적이며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우리의 할아버지들과 아버지들이 느끼고, 바라고, 생각했던 것의 창백한 반영”(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유럽의 붓다, 니체》)일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면서 그런 한에서 우주와 홀로 마주선 고독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무수한 ‘너’의 변주이기도 하다. ‘나’는 일즉다(一卽多)이자 다즉일(多卽一)이다. 겨우내 그것들은 어디엔가 숨어 있다. 역경과 고난의 시기에 제 존재를 한없이 웅크리며 견디던 날들. 봄은 그렇게 어디엔가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던 것들이 일제히 생명의 찬가를 부르며 깨어나는 시기다.

시인은 “그동안 어디 숨어서 죽은 듯 살아 있었느냐”고 묻지만, 물음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구절에는 치밀어 오르는 감동이 스며 있다. 숨어서, 죽은 듯, 지냈던 것은 그 칩거와 굴종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곰팡이나 이끼류들은 숨어서, 죽은 듯, 생을 도모한다. 숨어서, 죽은 듯, 생을 도모하는 것은 자기의 힘만으로 살아야 하는 약한 자의 숙명이고, 그 생존법이다. 약육강식의 경쟁에서도 너끈히 살아남는 강자들뿐 아니라, 겨우 숨어서, 죽은 듯, 살아온 우리도 살아서 ‘오늘’에 도착한다. 강한 자여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우리는 강자다. 숨어서, 죽은 듯, 모지락스럽게 살아남아 오늘을 맞은 우리는 강자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는 “인생에는 오직 쫓기는 자와 쫓는 자, 분주한 자와 지친 자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지만, 사실 우리는 쫓기는 자이면서 동시에 쫓는 자이고, 분주한 자이면서 지친 자가 아니던가!

누리에 빛과 온기가 두루 퍼진다. 삭풍이 그치고 얼음이 녹는다. 땅속에서 싹이 나오고, 죽은 듯 보이던 나뭇가지에서 잎눈이 튼다. 봄은 혹한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령(生靈)들에게 자연이 주는 선물이고 축복이다. 동토의 씨앗은 싹을 틔우고, 생령들은 생육과 번성의 일로 분주해진다. 그게 자연의 원리다. 시인은 봄이 오면 “네오내오없이 봄볕에 나가 희고 붉은 꽃구름 한번 피워보자”고 벅찬 회동을 제안한다. 나남의 분별없이 생명이라는 한 덩어리를 이루어 봄볕을 쬐고 꽃구름을 피워보자는 이 청유에는 생명의 숭고함과 더불어 생명이 품은 벅찬 환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는 생령들이니, 꽃을 피워야 마땅하다. 오늘을 견디고 살아남았으니, 내일은 꽃피워도 좋은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오는 봄은 곧 가는 봄이다. 내일 애인과 함께 꽃등심을 사먹고, 봄비가 키우는 고요에 귀를 기울이려면, 부디 살아 있으라! 봄비 속에서 작약과 모란이 꽃망울 터뜨리는 그 경이와 조우하려면, 부디 죽지 말고 살아 있으라!


김형영(1944~)은 전북 부안 출신이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나와 시를 썼다. 1966년 <문학춘추>로 문단에 등단했으니, 시를 쓰고 산 지 어느덧 마흔 해하고도 일곱 해를 더 꼽아야 한다. 그 긴 세월을 시에 헌신하고 시로 초지일관했다. 지금까지 시집 《침묵의 무늬》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친다》 《다른 하늘이 열릴 때》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새벽달처럼》 《홀로 울게 하소서》 《낮은 수평선》 《나무 안에서》 등을 펴냈다. 그는 혈액과 관련된 병을 오래 앓았다. 그 병마마저 늠름하게 떨치고 일어나 요즘에도 왕성한 시작 활동을 펼친다. 새로 도착한 문학잡지 두어 지면에서 그의 시를 만나니, 퍽 반갑다. 아주 가끔 그를 만나는데, 그때마다 그는 여전히 후덕한 웃음을 잘 웃는 좋은 선배다. 시로 올곧게 제 삶을 세워온 선배의 모습은 늘 존경스럽다.
  • 2014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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