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홍영철 〈저무는 빛〉

저무는 빛 속에 서니

누가 당기고 있나
해가 기울고 있다
누가 떠밀고 있나
해가 떨어지고 있다
당기지 마라
떠밀지 마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우리가 언제
기울지 않았던 적이 있더냐



저녁은 하루의 끝이고, 12월은 한 해의 끝이다. 나는 끝들이 주는 멜랑콜리로 마음의 사치를 누리려고 늦은 오후 먼 곳을 본다는 마을 망원(望遠)을 지나 서울 서쪽 강으로 산책을 나간다. 강물은 지는 해의 빛을 받아 붉은 물결을 뒤채며 고요하게 흐르는데, 그때 저무는 빛은 다가오는 밤의 전조(前兆)로 엄연하다. 일몰 무렵 세상은 붉고, 노랗고, 환한 색조로 물든다. 어둠이 오기 직전의 세상은 이상하게도 더 환한 광휘로 물든다. 해 뜨기 직전 가장 어둡듯 그 반대의 이유에서 해 지기 직전 세상은 이상한 밝음 속에 잠긴다. 나무와 건물들은 빛이 비쳐오는 서향의 반대쪽인 동향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왜 해 질 무렵의 빛들은 더 붉고 노랗게 비치는가.

일몰의 색조가 빨간색·노란색·오렌지색으로 물드는 것은, 일몰의 물리학에 따르면 태양 광선이 수직으로 내려쬐지 않고 대기를 사선으로 투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 질 무렵의 비스듬한 빛은 해가 공중에 떠 있을 때의 빛보다 무려 38배나 더 많이 대기를 통과한다고 한다. “공기의 분자가 파란색과 보라색을 선별적으로 굴절시키기 때문에 지는 해와 우리 사이에 놓인 공기의 밀도가 증가하게 되면, 스펙트럼의 파란색 부분이 따로 분리된다. 빛이 투과해야 할 공기층이 많아질수록 빛은 더욱 더 붉은색을 띨 것이다.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가 오렌지색이나 붉은색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크리스토퍼 듀드니 《밤으로의 여행》) 해 진 뒤 대기는 빠르게 어두워진다. 그 박명 속에서 밤은 태고의 밤과 똑같이 세상을 다 덮어도 될 만큼 거대한 검은 담비 모피를 안고 성큼 다가온다.

홍영철의 시는 해가 지는 시각에 벌어지는 사건을 묘사한다. 일몰은 마음의 약동 속에서 인류가 날마다 겪어내는 천문학적인 사건이다. 붉은 고래 떼가 하늘에 나타나는 휘황찬란한 해 지는 광경은 장엄하고 한편으로 쓸쓸하다. 〈저무는 빛〉은 장엄함 쪽보다는 쓸쓸함 쪽에 더 기초점이 맞춰져 있다. 해 질 무렵은 낮의 끝자락이고, 어느 곳에서나 “통계적으로 노상분노road rage 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시간대”(듀드니, 앞의 책)이다. 해가 지면 곧 어둠이 닥치는데, 미국 해군 관측소는 이 황혼의 시각을 세 단계로 분류한다. 시민박명, 항해박명, 천문박명이 그것이다. 맨 먼저 오는 시민박명은 일몰 직후다. 거리의 운전자들이 어둠을 인지하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켜는 시각이다. 항해박명은 시민박명이 시작되고 30분 지난 뒤 다가온다. 하늘에 떠오른 밝은 별들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시간대다. 마지막으로 천문박명은 해가 지고 한 시간 지난 뒤의 시간대를 가리킨다. 이제 약한 빛을 가진 별들도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 만큼 천지간이 충분히 어두워진 시각이다. 황혼이 지나간다. 쾌락과 유흥의 밤들이 깊어갈 때, 박쥐들은 공중에 날고 부엉이 같은 야행성 동물들이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서고, 귀신과 유령들이 빛을 등진 어둠의 저편에서 서성거린다.

낮과 밤이 교대하는 해 질 무렵, 일하던 자들이 일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도시의 가로등들이 하나씩 불을 밝히며, 한산했던 술집들은 퇴근길에 한잔하려는 회사원들을 맞을 준비로 한참 분주하다. 시인의 상상에 따르면, 해는 저절로 기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해를 아래로 잡아당기기 때문에 기운다. 해는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뒤에서 떠밀기 때문에 해는 천 길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해를 당기고 떠미는 누군가를 향해 시인은 외친다. 당기지 마라. 떠밀지 마라. 그냥 두어도 해는 진다. 그것만으로 끝났으면 시가 싱거웠을 것이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우리가 언제
기울지 않았던 적이 있더냐

시든 꽃, 지는 해, 인생 황혼들이 그렇듯이 기울고 떨어지는 물질들의 운명은 수직으로 우뚝 서고, 상승하는 기세에 있던 것에게도 작동하는 원리요 법칙이다. 한번 일어선 것은 기세가 다하면 넘어지고, 한번 모였던 것은 응집력을 잃으면 산산이 흩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해가 기우는 것으로 시작한 시는 돌연 생로병사를 차례로 거치면서 기우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탐색으로 초점을 바꾼다. 인생이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기운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것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뒤에서 떠미는 자들이 있다. 인생이 고달픈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라. 우리가 언제 기울지 않았던 적이 있더냐. 청춘의 때를 남김없이 탕진하고 어느덧 장년의 시기에 ‘회고적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물리적 나이에 도달한 시인의 인생 통찰이 반짝하고 빛나는 대목이다.

인류가 나이 들면서 어떤 망각과 영원을 향해 급격히 기울어가는 것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순리다. 혈기 왕성함을 탕진하고 기세가 꺾이자 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조바심은 누그러지고, 저혈당의 피들은 의기소침하다. 나이가 드니 그림자들도 함께 야위었음을 알겠다. “가난한 주인을 따라다니느라/많이 야위고 파리해진 내 그림자여”(〈가자, 그림자여〉). ‘내일’에 대한 기대가 젊은 날들의 힘듦을 버티게 한 동력이었을 테지. 우리는 ‘내일’을 바라보며 꾸역꾸역 살아왔지.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내일이 있었단다/내일을 만나러 갔단다/그러나 내일은 만나주지 않았단다/그래서 오늘은 가슴이 아프단다/하지만 괜찮단다/오늘뿐이란다/오늘이니까 아픈 거란다”(〈내일〉) 우리에게 ‘내일’을 약속했던 정치가와 기업가들은 제 잇속 챙기고 제 재산 늘리기에만 바빴다. 오직 자기와 제 자식들만의 ‘내일’을 도모했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내일’들이 우리를 속이고, 우리의 희망과 기대를 저버렸다. 그런데 시인이 도달한 지점은 희망과 기대를 저버린 ‘내일’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오늘이니까 아픈 거란다”라는 체념과 달관이다. 살아보니 ‘오늘’의 아픔으로 ‘내일’의 꿈을 사겠다는 희망은 가당찮은 기대였다. 인생 덧없음을 깨닫고 저무는 빛을 바라보니, 비로소 그 마지막 빛이 왜 그리도 휘황한지 알겠다.


홍영철(1955~)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계명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8년 <문학사상> 신인 발굴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게 연줄이 되어 대구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서울로 올라와 이어령이 주간으로 앉아 있던, 내자동 한옥을 사무실로 쓰던 <문학사상> 편집부에서 일했다. 얼굴이 하얗고 눈썹이 짙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 무렵이다. 그해 신춘문예 시 당선자들과 함께 그를 몇 번 만났다. 그도 나도 새파랐던 시절이다. 그의 시에 신촌과 홍대 앞이 자주 나오고, 기타리스트이자 가수인 신중현, 록그룹 사랑과 평화·시나위·봄여름가을겨울, 마임이스트 김성구와 유진규, 화가인 이영배와 추응식의 이름들이 거명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1970년대의 곤핍과 치욕들을 가까스로 견디며 살아남은 청춘들의 표상이다. 시인은 그들과 말을 섞고 몸을 부비고 술과 담배로 몸을 혹사하며 1970년대를 통과한다. 유흥과 도락의 시간들은 덧없고, 견뎌야 할 가난과 질곡들은 끈질겼다. 그 시절 청춘들이 품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이봐, 나쁘게 여기지 마, 슬픈 노래를 좋은 노래로 만들어보자고, 두려워하지 마, 세상의 짐을 혼자 짊어지려고도 하지 마,”(〈영혼에 대하여〉) 그들은 슬픈 노래를 좋은 노래로 만들어보자고, 한사코 시·노래·연극에 제 한 몸을 바쳤다. 세월을 이기지는 못하는 그들은 이미 늙었거나 늙어가는 중이다.
  • 201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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