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한 장면 -
작은 이들의 눈이 되다, 으뜸헤엄이

글 : 이상희 

글·그림 : 레오 리오니 《으뜸헤엄이》(마루벌) 26-27쪽 빨간 물고기들과 으뜸헤엄이가 만든 커다란 빨간 물고기 장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큰 것은 작은 것을 먹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약육강식’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슬기롭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운명적 과제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림책에도 약육강식 문제가 자주 비칩니다. <프린트> <뉴욕타임스> <포춘>의 아트디렉트와 미국그래픽아트협회 회장을 지낸 네덜란드 태생 작가 레오 리오니Leo Lionni의 그림책 《으뜸헤엄이》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깊은 바닷속 한켠에서 평화롭게 모여 살던 작고 빨간 물고기들을 커다란 다랑어가 한입에 삼켜버린 것입니다. 빨간 물고기 떼 가운데 단 한 마리 까만 물고기 으뜸헤엄이만 살아남습니다. 이름답게 헤엄을 잘 친 덕분이지요.

으뜸헤엄이는 친구들을 잃은 채 깊이깊이 헤엄쳐 달아납니다. 그러나 혼자 살아남는다는 것은 두렵고 슬프고 외로울 따름이지요. 레오 리오니는 망망대해 깊은 바닷속을 잿빛 얼룩으로 표현하고, 홀로 헤엄치는 으뜸헤엄이를 까만 점처럼 찍어(다양한 그림 기법을 활용한 이 그림책에서 작가는 반복 등장하는 물고기들을 스탬핑stamping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두었습니다. 이리저리 헤매어 다니던 으뜸헤엄이는 무지개 해파리를 만나면서 마음을 추스립니다. 가재를 만나고, 물풀 숲을 지나고, 기다랗고 기다란 뱀장어를 만나고, 말미잘을 만나면서, 바닷속이 다랑어같이 무서운 것만 있는 곳이 아니라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찬 멋진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행복을 깨달은 자는 기쁨을 만나느니, 이제 으뜸헤엄이는 다랑어한테 먹혀버린 바로 그 친구들과 똑같이 생긴 작고 빨간 물고기 떼도 만납니다.

으뜸헤엄이는 기뻐 소리칩니다. 함께 헤엄치면서 놀고 구경도 다니자고요. 그러나 새 친구들은 바위와 물풀 사이에 숨어서 꼼짝 않습니다. 그러다간 큰 물고기들한테 몽땅 잡아먹힌다면서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했던 으뜸헤엄이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숨어 지낼 수만은 없다고 외칩니다. 바닷속이, 세상이 더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으뜸헤엄이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모두 함께 즐겁게 살아갈 것인가?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는 법입니다. 으뜸헤엄이도 마침내 답을 얻습니다. “좋은 수가 있어! 우리가 함께 바닷속에서 제일 큰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서 헤엄치는 거야!” 으뜸헤엄이는 친구들에게 자기 생각을 설명하고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최대한 서로 가까이 붙은 채 헤엄치면서 그 모양을 유지해야 한다고요. 빨간 물고기들이 으뜸헤엄이를 믿고, 그 생각을 믿고, 물풀 숲을 나오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그림책은 이를 생략합니다. 으뜸헤엄이의 생각대로 빨간 물고기들이 커다란 물고기 모양을 이루고 헤엄칠 수 있기까지도 적잖은 연습을 거듭했겠지만 이 또한 생략하지요. 그저 장면과 장면 사이 간극으로 독자의 상상을 이끌어 ‘빨간 물고기들이 이룬 커다란 물고기 대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향해 소리치는 으뜸헤엄이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주지요. “나는 눈이 될게.” 그런 뒤로 으뜸헤엄이와 작고 빨간 물고기들은 다랑어 따위에 겁 먹는 법 없이 바다 곳곳을 유유히 헤엄쳐 다니며, 환한 햇살을 즐기며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그림책을 후루룩 읽어치우면 자칫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식의 교훈 이야기로 납작하게 받아들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앞표지를 열고 양쪽으로 펼쳐지는 빨간 면지를 넘겨서 장면장면 글과 그림을 음미하고 작은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멋진 모습에 갈채를 보낸 다음 다시 빨간 면지에 이르고 뒷표지를 닫는다면, 그 사이사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여러 가지 상념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눈’이 된 으뜸헤엄이를 통해 앞장서는 존재의 책무와 소명을 곱씹게 되지요. 시대 흐름을 먼저 느끼고 먼저 보는 존재라면 친구와 동료와 동지들을 잔혹하고 우울한 약육강식 논리 너머 아름다운 세계로 이끌 의무가 있다고, 레오 리오니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2013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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