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의 ‘언희(言喜)’

와! 살았다.

와! 살았다.

거의 43도에 육박하는, 그러니까 사람들이 땀을 빼겠다고 찾아가는 건식 사우나의 더위를 빼다 박은 네바다의 햇빛에서 와! 살았다. 소품차량 타이어는 주야장천 터지고 휴대폰은 안 터지고 건조해서 살은 다 터지고 열불만 터지는 미국에서 와! 터졌ㄷ.. 아니 와! 살았다. 헤이 에이지안 내게 천백원만 줘봐. 난 영어를 못합니다. 내 애가 굶고 있어. 천백원을 줘. 난 영어를 잘 못합니다. 천백원만 주면 그냥 갈게. 난 영어를 아주 잘 못합니다. 어쩔 수 없군. 와우, 아임 서바이브.

습식 사우나 대한민국의 여러분은 잘들 살아남으셨습니까. 저는 파란만장했던 38일간의 미국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 있습니다. 공항에서 같은 여인을 저와 동시에 훔쳐보던 한 중년 남성이 우연찮게 왼쪽 자리에 앉아 있고요, 오른쪽에 앉은 아주머니는 영화를 보며 비행기가 떠나가라 웃는 바람에 지금 당장 이 비행기를 떠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라는 스튜어디스의 제재를 받고 갑자기 잠을 잡니다.

꿈 같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현장이었지만 꽤 오랜 시간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들어버렸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해내던 제작부 친구들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몇몇을 제외하곤 영화일을 처음 해보는 유학생이었음에도 그들이

없으면 이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할 정도로 큰일을 해냈습니다. 싫다고 해도 굳이 카지노에 데리고 가고 굳이 당겨보라고 해서 당겼더니 30달러를 땄어요. 큰일을 해냈습니다. 내가 돈을 잃어서 기분 나빠 촬영 안 나가고 그랬으면 어떡할 뻔했어. 큰일 했어. 묵묵히.

굳 잡 브로.

땡볕 아래서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50m는 돼 보이는 절벽 위에서 쓰러진 터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죠. 좌우지간 소리를 빽빽 지르다가 쓰러졌는데 웬걸 컷 사인이 나지 않습니다. 뭐지. 나 지금 쓰러졌는데. 왜 아무도 걱정하지 않지. 이런 젠장. 연기인 줄 아나 보다.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해야지, 하고 그대로 일어나 연기를 이어갔습니다. “컷! 연기 살았어. 아주 좋았어.” 당연히 살았겠지. 살아 있었으니까. 불의 계곡이라는, 이름도 무시무시한 사막에서 저는 그렇게 살아남았습니다. 와! 살았다.

또 하루는 레드록캐니언이라는, 우리말로 ‘빨간바위협곡’이라는 곳에서 촬영이 있었습니다. 산 건너편은 1주일이 넘게 산불이 잡히지 않아 하늘이 빨갛게 변해 있었고, 석양이 지는 저녁시간에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사막도로를 달리는 장면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인물이 주윤발을 좋아하는 터라 주윤발처럼 돈을 태워 담뱃불을 붙이는 행동을 나름 생각해서 연기했습니다. 산불과 노을과 담뱃불. 거기에 빨간 바위까지 엄청나다. 이건 최고의 그림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뒤에서 어떤 차가 경적을 울립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죄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니들 지금 뭐하는거야. 저기 산불 안 보여? 여긴 내 집이고 산불 나면 너희들이 책임질 거야? 지금 내가 이 불 붙은 종이를 세 번이나 끄면서 왔어. 니들 콩밥 한번 먹어볼래?”

나이도 어려 보이는 게 감히 57년생 감독님 앞에서 저러다니, 내가 복싱한 사람이니 겨뤄보자고 하고 싶었지만 ‘산불, 경찰, 징역, 감옥’ 등의 단어에 그만 허리를 90도로 숙여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그렇게 촬영이 끝나고 그날 밤 방에서 혹시 산불이 나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과, 며칠 뒤 미국 감옥에 들어가서 미국인들의 노리개가 되어 있는 상상과, 어린 놈한테 뒷발을 돌려 스트레이트를 날리진 못할 망정 허리를 굽혔다는 비참함에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안 잡혀갔다. 와! 살았다.

촬영, 조명팀은 모두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나면 항상 “첸, 너 정말 좋았어. 너는 정말 놀라운 배우야. 너는 정말 소질 있어”라고 응원해주는 그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항상 “Me too”라고 얘기해줬는데, 잠깐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 나도 내가 정말 좋았고, 놀라운 배우에 소질 있다고 생각해”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점점 그들이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안 해주는 건 쉬는 날이 없어서가 아니라 건방져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안해 문신 닉, 넌 정말 좋은 래퍼였어. 그때 ‘유투’라고 해주지 못해 미안해. 너 되게 무섭게 생겼는데 때리지 않아줘서 고마워. 다행이다. 휴! 살았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몇 시간 전 어렵사리 촬영이 끝나고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데, 카메라 감독 벤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더니 “첸, 너를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너랑 일하게 돼서 너무 행복했고 즐거웠어. 앞으로 또 볼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인사합니다. 그의 눈이 정말 진심 어려서 순간 눈물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이번엔 ‘미투’라고 해도 되나 고민하다 눈물이 쏙 들어갔고, 다행히 ‘미투’라고 말해도 되는 상황이었기에 진심으로 ‘나도 그래 벤’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오랜 시간 같이 살면서 같은 주제로 같이 고민하고 같이 아파하며 같이 웃는 건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가는 이 길이 무겁고 울적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들과 더 재밌게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게 한이 돼서 영어를 좀 배워야겠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이게 영화를 하는 맛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정이 들고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고 하면서 평소 잘 느끼지 못하는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살아 있다는 걸 느낍니다. 이 영화로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도 뒤에서도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우는 현장의 꽃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늘 피어 있어야 향기가 납니다. 저는 이번 영화로 그걸 깨달았습니다. 38일간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소중한 보배들을 만났고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질 때 느끼는 이 헛헛함이 굉장히 촌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감정 덕분에 저는 영화가 좀 더 하고 싶어졌습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박정민은 영화 <전설의 주먹>으로 이름을 알린 신인 배우. 2011년 <파수꾼>으로 데뷔했다.
‘언희(言喜)’는 말로 기쁘게 한다는 뜻의 필명으로, 앞으로 영화 현장, 배우, 그리고 연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낼 작정이다.
  • 2013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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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보름달   ( 2018-02-24 )    수정   삭제 찬성 : 6 반대 : 7
이 글을 읽으니 저도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됐습니다. 감사해요!
  조현아   ( 2017-03-22 )    수정   삭제 찬성 : 2 반대 : 3
사람냄새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뤄나가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2016-02-20 )    수정   삭제 찬성 : 11 반대 : 6
멋있어요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응원해요 늘!
  응원   ( 2016-01-23 )    수정   삭제 찬성 : 6 반대 : 5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도 뒤에서도 살아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되게 멋있네요!
 연기하는 배우님의 모습 오래오래 보고싶습니다!!
  굿마이너   ( 2014-06-07 )    수정   삭제 찬성 : 27 반대 : 33
태양을 향해 쏴라. 기대되네요. 영화를 하면서 배우님의 마음도 점점 성장해가는것이 보이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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