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 화가 강요배

제주에 대한 깊은 사랑을 화폭에 담다

강요배
1952년 제주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회화과 졸업. 1976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학고재갤러리 등에서 18회 개인전을 가졌다. 제주현대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오사카 사야마이케 박물관, 대구미술관, 도쿄 우에노모리 미술관, 소마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미야코노조 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의 주요 전시에 참여했다. 199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민족 예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제주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제주도는 우주의 중심, 옴파로스지. 하하.”

강요배 화백은 이야기 말미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반도 남단의 작은 섬이 행정적·지정학적 중심일 리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터진 웃음이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소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이렇게 엮어서 살아보자 하는 이야기지. 따스하게 벗처럼 살면 어디든 중심이 되는 법이야.”

그는 여러 번 ‘따스하게’라는 말을 강조했다. 제주의 삶과 역사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평론가 김종길은 그를 “탐라국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제주도 태생의 강요배 화백이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로 내려간 것은 22년 전. 4월 21일까지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5년 만에 열리는 그의 서울 개인전에는 강요배가 보고 느낀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주상절리, 한라산 옴부리, 몽돌 해안가 같은 제주의 잘 알려진 풍광만이 아니다. 잠깐 왔다 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제주에 살고, 그 땅을 사랑하고 오래 바라본 사람에게만 열어 보여주는 제주의 속살, 제주의 감흥을 볼 수 있다. 눈 덮인 설봉, 만발한 유채꽃밭, 여름 햇살에 찬란한 보석처럼 빛나는 바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부는 가을 뜨락까지, 아침에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순간의 제주의 모든 시간이 그의 그림 속에 담겨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그림에는 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치기도 하고, 훈풍이 붉은 꽃을 흠뻑 피워내기도 한다. 그는 제주를 보려거든 폭풍 직전에 오라고 말한다. “폭풍 칠 때, 바람 불 때, 어스름할 때 이게 진짜 제주도”란다. 바람은 〈파도와 총석〉에서 숨 돌릴 틈 없이 해안가에 부딪치는 파도를 몰고 오기도 하고, 〈잔설〉처럼 한라산의 깊은 골짜기 사이를 파고들며 불기도 한다. 4m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빠른 붓질로 숨 가쁘게 붓질이 옮겨간 〈풍천〉은 바람으로 어지러운 하늘 자체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강인하면서도 때로는 연약하고 부드러운 기운생동의 리듬을 읽어낸다. 그 감흥을 빠르게 옮겨간 ‘붓바람’ ‘붓춤’이 화면 한 가득이다. 제주는 살아 있고, 그 속에는 역사와 신화가 깃들어 있으며, 오늘도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풍천_ Acrylic on canvas, 182×455cm, 2010
제주도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땅이다. 제주의 몸을 이루고 있는 나지막한 오름들의 생김새가 여성적이며, 그 땅에 깃든 신화의 주인공도 대부분 여성이다. 〈자청비(自請妃)〉라는 작품은 제주도 사람에게 곡식 종자를 가져와 사람들로 하여금 풍년 농사를 짓도록 도와준 여신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작품 〈움부리-백록담〉에서 말하는 움부리는 화산분출로 생긴 움푹한 구멍을 말한다. 한라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움부리가 바로 백록담이다. 어느 해 말 강요배 화백은 소설가 현기영과 함께 한라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현기영이 땅에 큰 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었다. 제주의 자연과 역사는 많은 예술가의 예술적 영감이 되어왔다.

움부리-백록담_ Acrylic on canvas, 259×194cm, 2010
강요배는 1980년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민중미술 그룹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며 고향 제주의 아픈 역사, 4·3사건 등을 화폭에 담았다. “내가 제주도에서 산다고 할 때 그 일을 다루지 않으면 고향을 사랑할 자격도 없다”고 말한다. 해마다 제사를 지내듯 이때쯤이면 4·3사건과 관련된 그림을 한 점씩 그린다. 역사를 예술로 치유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2013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상 대상을 수상한 오멸 감독의 〈지슬〉 역시 제주의 아픈 역사를 담은 작품이다. 제주도의 자연풍광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몇몇 장면은 강요배가 그린 제주의 풍경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 대해서 강요배 화백은 “우직하면서도 뛰어나다”고 말했다. 최근 강요배의 그림은 직접적으로 역사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자연의 풍광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는데 몸이 붕 날아서 떨어졌단다. 몸에 날개가 달린 듯하니 이제는 늙은이, ‘옹(翁)’이 되었다고 생각했단다. 작품 〈설중옹〉 속에서 관록이 있어 보이는 둥근 호박은 눈 속에서조차 세상과 따스하게 살을 맞대고 겨울을 견디는 노인으로 그려졌다. “나는 젊은 것이 싫다.” 작년이 환갑이었던 화가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의 자호는 노야(老野), 늙은 들판이다. 노야의 끝언덕은 등천(登天)이다.”

만년일파_ Acrylic on canvas, 91×116.7cm, 2012
작품 〈등천〉에 묘사된 하늘 길에는 보라와 흰색의 잔꽃들이 어지러이 피어 있는 언덕을 오르면서 바라본 하늘이 그려져 있다. 꽃들의 영혼은 하늘로 날아가 별이 된 듯 총총하다. 그는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하늘이 곧 땅이고 땅이 하늘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그것을 하나로 바라보는 통찰력을 가진 화가라는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나이 듦은 깊어짐이고 넓어짐일 것이다. 그가 이번 전시와 관련해서 쓴 글에서처럼 “섣부르게 행하기 이전에 먼저 존재해보라”는 말을 그는 그림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온당한 존재를 위해서 그는 자신이, 세상이 그어놓은 한계를 끊임없이 지워나가고 있다.

백로즈음_ Acrylic on canvas, 97×130cm, 2012
그림을 그리는 시간 이외에는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자, 거침없이 “독서와 산책”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별·물리학·수학·지질학·주역·역사 등 세상에 관한 모든 공부를 하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작품에는 우주의 무한한 섭리와 장대함이 담겨 있다. 제주에서건 서울에서건 해는 매일 뜬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에서 그는 장엄한 아름다움을 읽어냈다. 〈개천〉 〈샛별〉 〈동〉 같은 작품이 말하는 것처럼, 하루의 시작은 거대한 역사의 시작처럼 장대하다. 장엄함을 직시하기 위해서 그는 때로 멀리 바라보았고, 시선은 자유롭게 움직였다.

백경_ Acrylic on canvas, 65×91cm, 2013
근경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면에는 찬란한 민트빛 물이 담겼다. 〈명주바다〉라는 작품은 물 자체다.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이 바다 자체를 응시하며 그린 그림은 놀랍게도 추상화처럼 느껴진다. 〈옴부리-백록담〉은 동양화의 삼원법을 서양화에 적용했다. 구상화와 추상화의 경계도,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도 그의 작품에서는 모두 사라졌다. 흰 눈밭에 까마귀들을 그린 〈설조(雪鳥)〉는 유화라는 서양의 재료를 사용했지만, 즉흥적인 붓터치가 일품인 동양화처럼 그려진 그림이다. 경계가 사라지면 자유가 말간 얼굴을 내민다. “논리적으로 존재라는 것은 허점 없이 불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품도 허허실실의 묘미를 담은 작품들이다.

바다 - 바위_ Acrylic on canvas, 89.4×130cm, 2012
독서와 산책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오로지 그림이다.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것은 그림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위안’이 되는 것은 그림이다.”

그림은 위안이지만 또한 끊임없는 도전이다. “아직 만족스럽지 않다. 칠십에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도록 몸을 잘 아끼고 있는 중”이란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말처럼 “회화는 나이든 사람의 예술”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질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 예술가일 것이다. 강요배의 깊은 검은 눈동자에는 젊은이 못지않은 힘이 있었다.

사진 : 김선아
  •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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