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신화학자 김선자 박사

“중국 소수민족의 신화에서 인류의 지혜를 배웁니다”

‘신화(神話)’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지. 대부분 그리스-로마 신화를 필두로 한 서양 신화나 힌두교 신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인도 신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터전인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三國)도 방대하고 유서 깊은 신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동아시아 신화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김선자 박사가 최근 《오래된 지혜》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전작 《중국 소수민족 신화기행》이 중국의 소수민족별 신화를 정리해 소개하는 차원이었다면, 이번에 펴낸 《오래된 지혜》는 각 민족의 다채로운 신화를 주제의식과 메시지를 기준으로 분류해 독자로 하여금 자신과 주변,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그가 연세대 중문과에 입학하던 시절엔 ‘신화’라는 단어조차 잘 쓰이지 않았다. 하물며 동양의 신화는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텍스트 자료나 문헌으로 정리된 자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학 3학년 때 초나라 역사와 관련된 강의를 듣고 중국 역사에 관심이 생겼다는 그는 졸업논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신화학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 신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중국에서는 자신들의 시조 ‘황제’를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로 자리매김하려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중국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강대국이라는 주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었죠.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신화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비판하고, 신화 본래의 힘과 가치를 회복시키는 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신화를 접했고, 그들의 서사시에서 신화의 본래적 가치를 발견했어요. 그 후 중국 소수민족들의 신화를 연구하고 정리하는 것에 매달려왔습니다.”

만주-허저족의 조상신.
중국 내 소수민족의 경우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민족도 많다. 때문에 이들의 신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족을 비롯한 중국 내 주류 민족들이 정리한 채록 자료를 먼저 짚어보아야 한다. 하지만 주류 민족인 학자들의 경우, 자신들의 민족이 소수민족보다 더 우월하다는 근거로 사용하기 위해 채록 과정에서 소수민족의 이야기를 왜곡하기도 한다. 때문에 연구자는 채록된 문헌자료를 분석할 때 이런 오류들을 잘 감안해야 한다. 문헌자료를 모두 살펴본 후에는 그들의 삶터로 답사를 떠나 직접 취재와 채록에 나선다.

“문헌자료로만 소수민족의 신화를 연구할 수는 없습니다. 직접 그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노래를 듣고, 그들이 먹는 음식과 그들이 입는 옷에 새겨진 무늬, 색깔 하나하나를 다 살펴보아야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 주변에 어떤 동식물이 살고 있는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지형은 어떤지도 꼼꼼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소수민족 대부분이 척박한 오지를 터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의 답사는 늘 순탄치 못하다. 몸이 편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음식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항상 몸은 고생스럽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 둘씩 알아가고 이해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어서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나마 티베트로 떠났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네요. 고산증으로 쓰러져서 인민해방병원에 실려 갔었는데, 커다란 산소통에 들어 있는 산소를 다 마시고 나서야 괜찮아지더군요. 또 티베트 사람들은 양을 통째로 삶아먹는데, 웬만한 현지 음식은 감사하며 맛있게 먹지만 그건 정말 냄새 때문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어요.(웃음)”

그리스-로마 신화로 대표되는 서양의 신화와는 달리 동아시아 신화는 다소 허무맹랑하다고 느껴질 만큼 동화적이고 원초적인 상상력을 담고 있다. 산(山)이 겨드랑이 밑으로 인간을 낳거나, 동물은 물론이고 돌이나 곡식까지 유창하게 말을 하기도 한다. 또 치열한 욕망을 드러내면서 서로 경쟁하는 그리스-로마의 신들과 달리 동아시아의 신들은 인간에게 속아 넘어갈 만큼 순진하고, 실패를 끊임없이 거듭한다.

“소수민족의 신화는 매우 다양하지만 거의 모두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것이죠. 주류에 밀려 척박한 땅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는 그들은, 주어진 환경을 조금이라도 훼손할 경우 생존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입니다. 서양 신화와 달리 동아시아 소수민족 신화에는 동식물이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해 인간과 더불어 살며 인간을 돕기도 하고, 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또 동아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의 꾀에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좌충우돌 실수를 남발하기도 합니다. 이런 면들이 동양 신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이들의 신화는 인간을 교화하고 인간을 위로하는 힘을 가진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한 학생은 자신의 고향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환경운동을 하고 싶어 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제 수업에서 신화를 접하고 용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글쓰기를 통해 환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더라고요. 타인의 평가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꿈에 도전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신화를 통해 답을 찾았다며 제게 종종 이메일을 보내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신화가 가진 본래의 가치와 힘을 실감합니다.”

얼마 전 완결된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는 한국 신화를 모티프로 한 스토리로 연령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독자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 작품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바로 이거다’ 싶었다”며, 앞으로 이런 작업들이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윈난 리장 나시족-장이머우-인샹리장.
“요즘 세대가 공감하는 웃음 코드를 담으면서도 원전을 거의 훼손하지 않는 정도의 높은 퀄리티로 우리나라 신화 이야기를 잘 담아냈더라고요. 〈만추〉의 김태용 감독이 영화로도 제작 중이라고도 하던데, 많이 기대가 됩니다. 동아시아 신화를 몰랐던 사람들이 이런 접근성 높은 작품들을 접하고 나서는 좀 더 우리 터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세계 최대 수력발전소인 중국의 산샤댐 공사와 우리나라의 4대강 사업을 지켜보며 《오래된 지혜》의 집필을 결심했다고 한다. 강줄기를 막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좀 더 많은 사람이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다.

“물론 산샤댐 공사나 4대강 사업 모두 좋은 취지로 시작된 것이고, 나름의 목적이 있겠죠. 하지만 신화는 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읽는 분들이 한번쯤 더 생각하고 고민해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티베트
망과절 축제에 참가한 티베트 여성들(왼쪽).
신장위구르-경건하게 기도 중인 사람들(오른쪽).
비슷한 취지로, 그는 기업 CEO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도 맡고 있다. 기업의 대표가 삶의 태도를 바꾸면 그 영향력이 많은 사람을 바꾸고, 그런 노력들이 조금씩 쌓이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연구자로서의 욕심만 챙기자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취재하면서 많은 논문으로 성과를 내면 되겠지만, 그는 좀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수백 명의 학생이 제출한 기말고사 시험지를 채점하고 나서 방학을 하면 그는 어김없이 오지로 답사를 떠난다. 이번 겨울엔 와족이 살고 있는 운남지역에 갈 예정이라고 한다. 새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생각에 그의 표정은 기대감으로 부푼 듯했다. 유난히 차가운 한파가 몰아치는 이번 겨울, 그가 만날 소수민족들은 우리에게 또 어떤 따뜻한 메시지를 전할지 기대해본다.

사진 : 김선아
  • 201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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