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 서정학

오페라와 대중을 잇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서정학의 〈오페라를 노래하는 남자〉
일정 : 11월 24일(토) 오후 7시
장소 :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문의 : 02-2658-3546
“아안녕하세요~.”

서정학이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면서 인사하자 좌중이 빵 터졌다. tvN 〈오페라스타〉에서의 바로 그 목소리다. 일반인보다 한 옥타브 낮은 음성에 버터를 좌르르 바른 듯하다. 서정학이 등장하기 전 ‘평소 목소리다’ ‘아니다. 설정이다’며 옥신각신하던 중이었다. 확실히 평소 목소리다. 인터뷰 내내 목소리 톤은 변함없었다.

“다들 이런 반응이시네요. 처음에는 좀 당황했는데 이젠 익숙해졌어요. 허허허.”

바리톤 서정학. 동양인 최초로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입성, 유럽 최고의 무대로 꼽히는 빈 슈타츠오퍼(비엔나 국립극장)에 선 한국 최초의 남자 성악가, 세계 굴지의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사인 카미(CAMI)의 전속 아티스트 등의 이력을 가진 그가 오랜만에 독창회를 갖는다. 11월 24일 예술의전당에서 〈오페라를 노래하는 남자〉라는 주제로, 오페라 아리아와 한국 가곡을 부른다. 1부는 ‘잊지 못할 사랑이야기’로, 2부는 ‘삶의 희로애락’을 노래할 예정이다.

서정학은 지난해 〈오페라스타〉를 통해 국내에서의 인지도를 확 넓혔다. 가수 테이, JK 김동욱, 임정희, 문희옥, 김창렬 등 대중가수들이 오페라 아리아로 경연을 펼치는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심사위원 겸 테이의 멘토를 맡았다. 가요 창법에 익숙한 대중가수들이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오페라 아리아를 유려하게 뽑아내는 장면은 경이로웠다. 최종 우승을 거머쥔 테이가 서정학과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클래식과 대중음악 간 장르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음을 느끼게 했다.

“누구나 훈련을 통해 오페라 가수의 발성법을 배울 수 있어요. 성악가 흉내 낼 때 음성이 달라지잖아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파장의 문제예요. 클래식 성악가들은 마이크를 쓰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음성을 전달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공기의 저항을 뚫고 전달할 수 있는 파장의 소리를 내야 해요. 소리를 내는 성대의 부위가 다릅니다.”

서정학은 재치 있는 입담과 독특한 말투로 ‘제2의 앙드레 김’ ‘클래식 예능스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갑자기 유명세를 탔고, 라디오와 버라이어티 tv 프로그램 등에서 섭외가 물밀 듯 몰렸다. 주위에서는 “클래식이 웬 예능이냐, 본령을 지켜라” “아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라. 금세 잊힌다” 갑론을박하며 말이 많았다. 갈래길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는 전자를 택했다. 지금은 후회한단다. “어어, 하다 놓쳤는데 지금은 조금 아쉬워요. 허허허.”

해외무대에서 승승장구하던 그가 국내에 온 이후 행보는 ‘오페라의 대중화’다. 무대에 올라 천연덕스럽게 트로트로 노래를 시작하는가 하면, 록과 가요도 부른다. 지난해에는 오페라 입문자를 위한 《오페라 읽는 즐거움》을 냈고, 올 4월에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레퍼토리로 꾸민 음반 〈Romanza〉를 발매했다. 《오페라 읽는 즐거움》에서 그는 지금까지 인생담을 진솔하게 들려주면서 초심자를 위한 오페라 감상법을 자신만의 어투로 전달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두 권 분량을 썼는데, 출판사 측에서 절반으로 줄였다”며 웃는다. 〈Romanza〉에서는 음표와 박자를 정확히 지키는 대신 감성 전달에 충실했다. 어떤 노래는 가사에 음을 실어서 부르는 즉흥곡처럼 들리기도 한다. 장르에 대한 편견도 없다. 대중가요와 트로트도 즐겨 듣고 부른다. 아이돌 가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도 본방 사수한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서정학은 줄곧 정해지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천부적인 재능과 우연이 만들어온 길들. 그래서 새로운 길 앞에 설 때마다 갈팡질팡한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간절함 없이 주어진 기회를 잡으며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건 중학교 1학년 때다. 유도를 배우면서 “얍!” 하고 기합을 넣는데, 소리의 진폭이 달랐다. 그가 기합을 넣으면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내면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음성은 건물을 흔들 듯 우렁찼다. 성가대에서 노래를 했고,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그는 뒤늦게 음대 진학을 결심했다. 예중이나 예고를 다닌 것도 아니었고, 노래를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니었다. 타고난 성량이 풍부해 서울대 음대에 무난히 합격했고, 미국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했다. 동아콩쿠르 1위, 마리오 란차 국제콩쿠르 1위, 뉴저지 국제 오페라 콩쿠르, 플라시도 도밍고 세계 오페라대회 등에 입상하면서 실력을 검증받았다. 그런 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같은 과 선배가 오디션을 보러 가는데 운전사로 따라간 현장에서 샌프란시스코 극장 관계자에게 우연히 발탁된 것. 노래도 노래지만 영어 실력이 결정적이었다.

“아버지가 굉장히 엄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셨죠. 아버지가 잠드신 새벽에 몰래 일어나 AFKN를 시청했어요. 미식축구가 너무 재미있었는데 룰이 잘 이해가 안 돼서 영어공부를 시작했죠.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그때부터 꾸준히 영어공부를 했어요. 덕분에 영어회화 여부가 결정적이었던 오디션에서 혼자 합격했죠.”

이후 그는 날개를 달았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메롤라 그랜드 파이널’에서 동양인 최초로 최고상을 받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소프라노 조수미, 홍혜경, 신영옥에 이어 한국 남자 성악가로는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올랐다. 링컨센터, 카네기홀, 케네디센터 등 미국 최고의 공연장에서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 및 독창회를 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에게 “관객을 사로잡는 강렬하고 세련된 음색으로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무대를 선사하는 성악가”라는 찬사를 썼다.

“건방이 하늘을 찔렀죠. 무대며 시스템이며 개런티 등 톱클래스 대접을 받았으니까요. 첫 개런티가 공연당 5000달러였어요. 운이 좋았죠. 유럽 무대에서는 개런티가 1만5000달러까지 올랐어요. 1주일에 3~4번 무대에 오르고 한 시즌이 끝나면 수십만 달러가 통장에 쌓였죠. 20대에 펜트하우스를 사고, 고급 외제차를 끌면서 초호화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삶의 지축을 뒤흔든 사건이 생겼다. 2003년 친형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업을 크게 하다가 부도가 나서 어마어마한 빚을 떠안은 채 죽은 것이다. 그에게 형은 특별했다. 음악하는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노발대발하던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지낸 그에게 몰래 생활비를 대준 이가 형이었다. 집안의 기둥이던 형이 죽자 집안은 순식간에 풍비박산했다. 아버지는 몸져눕고, 어머니마저 아버지를 병간호하다 건강이 악화됐다. 마침 음반회사와의 계약이 삐걱거리던 차였다.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가족이라는 답을 얻었다. 그는 다 던지고 2005년에 귀국했다. 귀국한 후 3년간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었다. 성악 레슨이 주 수입원이었다. 가족의 빚을 다 탕감했다. 그동안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봤어요. 그렇게 엄하시던 아버지가 제 얼굴을 만져주시고 안아주세요. 신기해요. 어렸을 때에는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처음에 귀국해서는 다시 화려했던 시절로, 웅장한 무대로 돌아가고 싶어 미칠 것 같았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편안해졌어요. 정말 소중한 것을 얻었죠. 삶이 묻어나는 음악 말이에요. 예전에는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지금은 인간 서정학의 삶을 살아요. 음악인으로서 궁극적으로 더 큰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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