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11년 만에 첫 장편소설 《나프탈렌》 펴낸 소설가 백가흠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평한 시간과 자연스러운 죽음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 <힌트는 도련님> 등 비이성적 인간의 군상을 그린 문제적 단편집으로 독자들의 꾸준한 관심을 모았던 소설가 백가흠이 등단 11년 만에 첫 장편소설 《나프탈렌》을 들고 돌아왔다. 출간을 앞두고 EBS <라디오 연재소설>에서 전편이 낭독된 이 작품은 청취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나프탈렌》은 순리를 따르는 자연스러운 죽음을 이야기한다. 코를 찌르는 냄새로 존재감을 과시하다가도 어느새 기화되어 사라져버리는 나프탈렌처럼, 죽음도 그렇게 모르는 새 다가오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입체적인 등장인물들을 통과해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난다.
나프탈렌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읽은 《나프탈렌》은 그간 구축해온 백가흠의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나면서도 전작들에 비해 확연히 ‘착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물들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있지만, 그래도 지극히 인간적인 범위에 머물고 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맞게 될 가지각색의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다. 단편에 비해 이야기는 더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서사구조는 견고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의 흐름과 그로 인한 자연스러운 죽음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시간은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성냥개비처럼 위로 쌓여가는 것 같아요. 신이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죽음을 향해 쌓여가는 가지각색의 성냥개비 탑이 참 예뻐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부분을 포착해서 그리고 싶었어요.”

《나프탈렌》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백용현은 K대 국문과 교수다. 그는 6・25 전쟁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후 죽음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노인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나가 그렇듯 죽음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늙음에 대한 반작용으로 어린 여자 조교 공민지의 육체를 동경해온 그가 첫 번째 부인 손화자의 죽음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젊은 작가인 백가흠이 어떻게 죽음과 인접한 노인의 심리를 이토록 섬세하게 묘사했을까 싶은데, 그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등장인물 중 저와 심리적인 부분을 가장 많이 공유한 인물이 바로 백용현입니다. 상상도 잘되고, 제 심리가 백용현에게 가장 많이 투영되더라고요. 제가 늙어가나 봐요.(웃음) 오히려 공민지 같은 여성 등장인물을 그리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제가 여자를 잘 모르거든요.”

첫 번째 부인의 죽음은 백용현의 정신적 각성으로, 백용현의 죽음은 공민지의 잉태로, 어머니 김덕이의 죽음은 암환자인 딸 양자의 쾌차로 이어지면서 소멸과 생성이 순환되는 순리를 잔잔하게 전한다.


스승

그는 좋은 스승을 많이 만났다. 성장과정에서 만난 문학인들은 그가 소설가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당시 갓 부임한 안도현 시인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안도현 시인은 맑디맑은 소년 같았다.

“시간이 지나 여쭤보니 당시 안도현 선생님이 스물여섯이었다고 합니다.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어린 청년이었죠. 그분을 어린 시절 선생님으로 만난 건 제게 굉장한 행운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나 다시 만났는데 지금도 사제지간으로 지내며 의지하고 있어요.”

대학시절 은사는 박범신 작가다. 그는 권위적인 모습을 버리고 학생들을 사랑하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노인 백용현이 젊음을 탐하는 몇몇 장면이 그의 스승인 박범신 작가의 《은교》를 떠올리게 하고, 이 부분들이 ‘박범신의 오마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은 저와 선생님을 엮고 싶어 하는 이들의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백용현의 모티프는 따로 있다고 했다.

국어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부터 안도현・박범신에 이르기까지 그는 평생 한 사람도 만나기 힘든 훌륭한 스승을 여럿 두었다. 여러 대학에서 소설 창작을 강의하고 있는 그도 어느새 그들 같은 스승이 되어 있다. 권위의식은 버리고 아이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며 친구처럼 지낸다. 심지어 강의가 마무리된 후에 그를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저는 문학 선생입니다. 강의 자체가 문학으로 학생들의 감성을 움직이는 작업이죠. 그 점이 굉장히 맘에 듭니다. 제 강의는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이야기를 나눌 뿐이죠. 그래서 제가 학생들에게서 더 많은 감동을 얻습니다.”


고민

그는 국어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졌고, 역시 아버지의 추천으로 문창과에 진학해 소설가가 되었다. 20대 중반, 문학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장이나 수사 같은 지엽적인 것들에만 집착해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청탁이 끊겼고, 2년 남짓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길고 긴 고민 끝에 ‘선배 작가들에게는 있고 나에겐 없는 것’을 찾아냈다. 바로 ‘진심’이었다.

“‘어떤 작가가 되어야 하는가’ ‘무엇을 써야 하는가’ 같은 여러 가지 고민으로 힘들던 그때 소위 ‘소설가 소설’로 불리는 메타소설을 몇 편 썼죠. 문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그 후 죽음도 막을 수 없는 문학적 숙명을 다룬 〈그래서〉라는 단편을 필두로 글이 술술 써지더라고요.”

좋아하는 글과 잘 쓸 수 있는 글은 달랐다. 그는 개인적 치욕보다는 보편적 가치가 침해당하는 데에 분노하고 도덕과 공익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특성을 살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단편들에선 남성이 품은 그릇된 판타지로 인해 어그러지는 세상을 그렸다. 짧은 분량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야 하는 단편의 특성상 실종이나 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주어졌고 인물들은 더욱 위악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제 그의 소설 세계는 고전의 단골 주제로 다뤄졌던 인간의 원죄의식과 죽음, 구원의 범위로까지 확장되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응축되는 신앙과 종교에 관한 고민을 다룰 것이라는 그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이야기꾼 백가흠

이날 만난 백가흠은 ‘소설가’라는 단어가 주는 고지식한 느낌보다 ‘이야기꾼’이라는 단어의 호방함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시종일관 유쾌했고, 거침이 없었다. 집필과 강의를 하지 않을 때 즐기는 취미활동을 물었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술 마셔요” 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못 말리는 애주가다. 소설을 쓰다 지칠 때면 야구장에 간다. 넓고 푸른 잔디가 에너지를 준다고 했다. 구인회(球人會)라는 문인 야구팀에서 야구도 즐길 만큼 활달하다. 하지만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과 견고한 철학을 품고 있었다.

사진 : 김동욱
  •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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