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 정경

오페라와 드라마를 합친 ‘오페라마’ 만든 클래식계 이단아

예술에서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대다. 국악이 댄스음악과 섞이고, 발레리나가 힙합댄서와 함께 공연한다. 여기 또 하나 새로운 ‘경계 허물기’에 도전하는 아티스트가 있다. 바로 바리톤 정경이다. 그는 정통 클래식에 뮤직비디오를 입히고, 이탈리아 가곡에 한국무용 안무를 얹는 등 클래식계에서는 이례적인 작업에 도전해서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보통 성악가들과 시작부터 달랐다. 놀랍게도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육상을 하던 운동부 학생이었다. 육상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않자 어머니는 목소리가 좋은 아들에게 성악을 권했다.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소 늦은 출발이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그의 인생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국내외 수많은 콩쿠르에서 1, 2위를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고, 경희대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그는 젊은 나이에 경희대 후마니타스 컬리지에서 객원교수로 강의 중이다.

“운동을 하다가 뒤늦게 음악을 시작했지만 이런 과정이 저에게는 창조적 발상의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예중, 예고를 다니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면 오히려 일정한 틀에 갇히고 이리저리 눈치를 봐야 할 수도 있는데, 저는 지금 그런 고충 없이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죠.(웃음)”

데뷔 앨범인 1집 <정경아리랑>부터 우리의 민요 아리랑을 클래식 성악에 접목한 퓨전음악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직접 기획한 공연 <우리 춤과 노래의 정경> <오페라마> 등을 통해 계속 한국의 전통 음악과 춤을 클래식에 접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는 이런 도전을 하는 이유가 ‘사명감’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것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예술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로서 당연한 일이죠.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습니다. 클럽에서 클래식을 연주해야 하는 시대가 왔어요. ‘퓨전’을 통해 클래식의 접근성을 좀 더 용이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이런 도전의 일환으로 그는 지난 4월 발매한 싱글 곡 ‘La Danza’에 뮤직비디오를 입혔다. ‘La Danza’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의 타란텔라 춤곡이다. 정통 클래식곡을 위한 뮤직비디오라고 해서 웅장한 화면에 양장 차림의 성악가와 피아니스트가 등장해 호흡을 맞추는 영상을 상상했다면 오산이다. 가면무도회를 연상케 하는 초반의 어둡고 웅혼한 분위기는 마치 커다란 극장에서 오페라 공연을 보는 것 같고, 광대들이 나와 춤을 추고 성악가가 익살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사회풍자적인 장면에서는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조합이지만 이 뮤직비디오는 ‘La Danza’의 분위기를 십분 반영하면서 대중이 이를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정경이 진행하는 모든 예술 콘텐츠에는 한국적인 것이 스며 있다. 그가 개발한 ‘오페라마’도 오페라에 한국적인 드라마를 융합해 개발했다. ‘오페라는 이탈리아, 드라마는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오페라마’는 한국에서 시작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했다. 오페라 자체도 드라마의 일종이지만 언어와 문화양식이 다른 이탈리아적 요소들을 빼고 한국적인 요소들로 대체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 대사 대신 우리말로 이야기를 다시 썼고, 내용도 한국인이 공감하기 쉬운 스토리로 각색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한국이 예술을 하기에는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우리나라는 예술을 하기에 굉장히 적합한 나라입니다. 서양예술의 기본적인 주제는 사랑 아니면 죽음밖에 없죠. 하지만 전쟁을 겪고 분단 상태에 있는 우리에겐 항상 슬픔과 애환의 정서가 서려 있습니다. 이런 한(恨)의 정서를 제가 서양에서 배워온 클래식 음악에 접목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9월 말 나오는 3집 싱글 ‘슈베르트 세레나데’ 또한 파격적이다. 클래식 가곡 뮤직비디오에 세미 누드를 담았다. 상업적 전략이라고 비판받을 소지도 있지만 장면 하나하나에 그가 담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수많은 가곡을 남긴 슈베르트는 놀랍게도 매독으로 사망했습니다. 성(性)에 관한 이야기가 금기시되어왔던 우리나라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아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죠. 하지만 성은 인간 갈등의 기본적인 요소예요. 이번 뮤직비디오에서는 제가 80세 노인으로 분해서 인간의 욕망과 늙음, 허무에 관한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습니다.”

정경은 1년에 100회 이상의 공연을 소화해내고 있다. 이 중에는 강원도 오성학교(정신지체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협연, 가뭄 피해를 입은 동아프리카를 돕는 공연, 위안부 수요 집회를 위한 공연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공연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를 돕는 것이 예술가의 기본적인 의무”라고 말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집회를 돕는 일은 대한민국의 남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1집 〈정경아리랑〉도 위안부 할머님들께 헌정하는 앨범이었어요. 예술은 누구나 평등하게 향유해야 하는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사회적 약자에게는 티켓 값도 워낙 비싸고, 극장에 찾아가려면 시간도 많이 들고요. 그런 부분은 예술가가 먼저 다가가서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강의는 어떨까.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는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이 없다. 한의학과・의상학과・경영학과 등 다양한 타 과 전공생들이 모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 강의의 목표는 학생들이 직접 오페라마를 만들어 연말에 공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독립영화 감독이 이 수업을 영화로 제작해서 제천국제영화제에 출품하겠다며 촬영을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40명 중 10명이 넘는 학생이 노래를 해보고 싶다고 자원했고, 그가 시키기도 전에 의상담당, 연출담당이 학생들의 자원으로 모두 정해졌다.

“처음엔 학생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는 학생들에게 감동했죠. 취업학원처럼 되어가는 요즘 대학에서 학생들이 제 수업을 통해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경험과 교훈을 얻어갔으면 좋겠어요. 생전 처음 접하는 오페라마의 제작과 공연 과정을 통해 부딪치며 배우는 거죠.”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커리어보다 이웃과 음악계, 그리고 우리 민족에 어떻게 보탬이 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는 순간까지 가수로서 열심히 노래하고 싶습니다. 인문학 공부도 계속해서 학문으로나 노래의 테크닉으로나 양면 모두 고르게 성장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고요. 많은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게 되면 그동안 쌓은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제 마지막 꿈은 아프리카에 오페라마 극장을 짓고 예술을 통한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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