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낸 이병률 시인

여행은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밑천입니다

38# 등대

어쩌면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한 사람의 등짝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친구, 아름다운 사람, 닮고 싶은 어떤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 .

그걸 바라보고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향입니다.


이병률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6년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MBC 라디오 〈이소라의 음악도시〉 작가로도 활동했으며, 현재 문학동네 계열사 ‘달’ 출판사 대표로 재직 중이다.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등의 시집과 여행 산문집 《끌림》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냈다.
《끌림》에 이어 7년 만에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낸 시인 이병률. 이번 산문집 또한 대중의 폭넓은 공감을 얻어 종합 베스트 4위(교보문고, 9월 둘째 주 기준)에 올라 있다. 이병률은 국내 여행 산문집의 개척자다. 딱딱한 정보 위주의 여행서적 일색이던 출판시장에 등장한 이병률의 《끌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먹었는지 대신, ‘그냥’ 목적지 없는 느린 여행을 통해 느낀 촉촉한 감성을 써내려간 《끌림》에 독자들은 열광했고, 여행 산문집은 이병률 이후 새로운 장르로 자리 잡았다. 사람 냄새를 좇아 라디오 작가, 출판사 대표, 시인의 경계를 종횡무진하고 있는 그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병률 시인의 첫인상은 의외로 도회적이었다. 야생과 바람 냄새 대신에 골방과 책 냄새가 났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이기에 까무잡잡한 피부에 걸걸한 목소리를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뽀얀 피부와 침착하고 낮은 톤의 목소리를 가졌다. 자외선에 노출될 때에는 선크림을 꼬박꼬박 바른다고 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그가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틈틈이 써내려간 여행 에세이이자 사람과 사랑에 관한 담론이다. 산문집임에도 그의 문체는 시 같은 리듬과 호흡이 느껴지고,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전작 《끌림》에서 ‘길 위의 인간’으로서 사랑을 갈구하던 절박함은 이제 서정적인 자기고백과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안정을 찾았다.

“나이가 들면서 부드러워진 것도 있고요, ‘외로움이 대수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때 쓸 수 있는 글과 지금 쓸 수 있는 글은 어떤 식으로든 다르죠. 《끌림》 때는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쑥스럽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4, 5년 전에 한 선배가 ‘자기 얘기를 어떤 식으로든 해야 그것이 글이 되는 거지, 계속 여미려고만 하면 보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도 않고, 답답하고, 입체적이지도 않을 수 있다’고 얘기해주셨죠. 그 시기가 저에게는 큰 전환점이 됐어요. ‘내 이야기가 글이 될 수 있구나’라고 처음 느꼈죠.”

그의 글은 읽기 편하다. 고매한 문체와 알쏭달쏭한 표현 대신, 위로하듯 속삭이는 명료한 단어들과 생동감 넘치는 사진들이 한켠 한켠 자리를 메운다. 그는 못 알아듣게 글을 쓰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저는 방송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소통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해왔습니다. 산문으로 된 에세이를 쓰면서 마치 경주하듯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념, 철학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은 그 글을 선택한 사람에게 피로감을 주겠죠. 제 책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읽어야 하고요. 그러니까 독자에게 피로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카메라를 교재 삼아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했다는 그의 사진실력은 수준급이다. 독자들은 이병률 시인의 사진전을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진전 계획은 없다. 사진 찍는 일이 목적성을 갖는 것이 싫어서다. 사진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셔터를 누르는 그는 사진이 하나의 이력이 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그저 ‘사진 찍는 시인’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다.

사람을 종교와도 같이 맹신하는 만큼 사람 때문에 끊임없이 상처를 받기도 한다는 그는 최근 건강문제로 1주일간 입원했다. ‘사람독’이 오른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변함없이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조망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이 “사람을 좋아하게 태어난 사람”이라며 “사람 안 좋아하세요?”라고 되물었다.

“저는 다른 사람을 먹이고 싶고, 책임지고 싶은 심리를 가졌어요. 이건 쌀을 몇 kg 기부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김이 나는 밥을 직접 지어서 국물과 같이 차려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에요.”

이성복・마종기・허수경은 그가 시를 놓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던 20대 초반, 그에게 거울처럼 존재했던 시인들이다.

“이성복 시인은 아쉽게도 뵌 적이 없지만 다른 두 분과는 친구가 됐습니다. 그분들과 교류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아요. 제가 후배지만 서로 지적인 동력이 되어주면서 동행하고 있어요. 독일에 계신 허수경 시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면 첫인사로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시 몇 편 썼어요? 그 시들을 어서 빨리 보고 싶어요’ 라고 하지요.”

그는 4년 전부터 문학동네 계열 출판사 ‘달’의 대표로 재직 중이다. 출판사의 다른 직원들과 근무 조건은 같다. 하지만 떠나고 싶을 때 떠나지 않으면 금단증상을 겪는 그는 이따금씩 무단결근하고 훌쩍 떠난다. 그의 시 〈생활에게〉에는 “일하러 나가면서 절반의 나는 놔두고 간다”는 구절이 있다. 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절반의 그가 겪는 ‘밥벌이’는 어떤 의미일까.

“술 마시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술 사줄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리고 내가 떠나고 싶을 때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죠.”


마냥 사람 좋아하는 착한 소년 같은 그에게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다. 《끌림》에서 그는 친척의 결혼 축의금을 전하러 가다가 그 돈으로 기차여행을 떠난 이야기를 고백했다. 그는 그때 자신이 평탄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공부해야 하는 나이였지만 그에게는 음악, 글쓰기, 여행 등 공부 대신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수업시간에는 모범생처럼 앉아 있었지만 정신은 다른 세계를 유영하고 있었고, 친구들이 수학 문제를 풀 때 그는 글을 썼다.

“축의금을 훔쳐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눈이 무척 많이 내렸어요. 눈에 취했죠. 그때 여러 가지 불행과 불안 속에서 20대를 보낼 것이라는 예감을 했어요. 공부를 하면 인생이 편안해질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주변에 저를 유혹하는 것이 많았죠. 음악이나 글쓰기 같은. 넓은 의미의 학습장애였던 것 같습니다.(웃음)”

그의 글에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는 여행 도중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30대 초반 그녀와 다투는 과정에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저는 결혼하면 잘살지 못할 것 같아요. 같은 것을 반복하는 삶이 싫어요. 생활 자체가 잔소리같이 되어버리니까. 삶의 고통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텐데, 그걸 다른 사람과 같이 살면서 감당하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불멸의 사랑을 믿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적 굴레에 예속되는 것을 싫어하고, 한없이 부드러울 것 같지만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가는 시인 이병률. 그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

“여행은 세상에 떨어져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채집하는 거예요. 우리는 여행을 통해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힘들고, 무엇을 원하고, 어딜 가고 싶어 하는지를 탐구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여행은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밑천입니다.”

사진 : 김동욱
  •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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