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63) 김광규 〈나무의 기척〉

도처에 스민 가을의 기척들

댓돌에 한 발 올려놓고

헌 신발 끈 조여 매는데



등 위로 스치는 손길

여름내 풍성했던 후박나무 잎

커다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가을 나무의 기척



여름이 끝나면 우리는 조금씩 늠름해진다. 젊은이의 몸은 더 단단해지고 나이 든 사람의 품성은 더 넉넉해진다. 그러나 우리를 갈고닦은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우리를 연마한 것은 지난여름의 땡볕과 열대야다. 지난여름의 열탕지옥을 견디며 산 자들은 그저 빈둥거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 분자를 외부에서 받아들이고 다 쓴 것은 밖으로 내보내는 생명활동을 수행했다. 우리가 밥도 먹고 맥주도 마시고 잠도 자는 사이에 손톱도 자라고 모발도 자란다. 쇤하이머가 말했듯 “생명이란 대사의 계속적인 변화이며, 그 변화야말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이다.” 여름이 끝났을 때 우리 존재의 일부였던 원자나 분자는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를 외부에서 들인 새 분자들이 채운다. 지금의 우리는 지난여름의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다. 우리 몸이란 분자들이 우연히 모여 일시적으로 밀도를 이루고 형태를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살아남은 것은 우리의 자랑거리다.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새로운 도구도 발명하고 문명도 부흥시키며 역사를 이어 나갈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스스로 자족감과 더불어 뿌듯함을 느낄 텐데, 그것은 살아남음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고결한 도덕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살아남은 사람은 존중받는 만큼 보람과 내실 있는 삶을 살아야 할 당위를 갖는다. 우리는 살아남았기에 새 가을을 맞는다.

노시인의 시 〈나무의 기척〉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시인 자신으로 짐작되는 한 사람과 아마도 꽤 큰 후박나무다. 때는 어느 청명한 가을날이다. 그 무대를 채우고 있는 것은 차라리 넉넉한 여백이고 가을의 청명한 고요다. 시인은 마침 “댓돌에 한 발 올려놓고/헌 신발 끈 조여 매는” 중이다. 외출 채비를 하는 중이다. 그때 “등 위로 스치는 손길”을 생명의 기척인 듯, 우주의 진동인 듯 느낀다. “여름내 풍성했던 후박나무 잎/커다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기척은 주의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하찮은 일상범백사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흠, 후박나무 잎 하나가 우연히도 내 등 위로 떨어졌군’ 하고 무미하고 심상하게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시인은 대체로 주변 사물의 변화에 예민한 촉수를 갖고 반응하는 존재다. 대뜸 시인은 노랗게 탈색된 후박나무 잎의 우연한 조락에 “가을 나무의 기척”이란 뜻을 부여한다.

아시다시피 활엽수는 여름에 번성하고 가을엔 조락을 맞는다. 조락은 식물이 겪는 작은 죽음들이다. 오늘 떨어지는 나무의 잎들은 여름내 광합성 작용을 해서 나무 생명의 번성함에 기여했을 것이다. 식물은 동물보다 지구에 먼저 와서 번성한 생명체다. 그러니까 식물은 동물에 선행하는 태생의 상류다. 분자생물학의 단위에서 보자면 직립보행을 하는 인류가 나무보다 더 고등 생명체라는 근거는 희미해진다. 사람 세포에는 미토콘드리아만 있지만, 나무 세포에는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가 있다. 후박나무 잎들의 엽록체가 여름내 했을 광합성은 한마디로 식물의 기적이다. 광합성은 식물이 태양에너지를 끌어들여 물에서 전자를 빼내고, 그것을 다시 고에너지로 바꾸는 능력인데, 생명 역사의 흐름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는 기적의 첨단기술이다. 그것은 제 태생의 장소로 한사코 회귀하는 연어떼, 주극성좌를 기준점 삼아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철새, 설치류에 속하는 나그네쥐들의 이타적 자살과 마찬가지로 우주가 보여주는 경이로운 기적의 쇼다.

후박나무의 커다란 잎이 허리를 굽혀 신발 끈을 매는 시인의 등 위로 떨어진다. 시인은 “가을 나무의 기척”을 통해 가을을 온몸으로 맞는다. 살아있는 존재는 자신을 둘러싼 사물의 기척으로 제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그것이 슬픈지 기쁜지 구체적이고 세세한 소회에 대한 피력은 없다. 다만 그 정황에 대한 짧은 묘사만 하고 그 소회는 생략함으로써 독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이때 소회란 외부 자극에 대한 의식작용에서 만들어진 느낌을 말한다. 느낌은 움직임과 생각과 더불어 사람을 사람이게 만드는 생물학적 자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다. “가을 나무의 기척”은 조락으로 가을이 왔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며, 아울러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는 우주적 진리의 선포이기도 하다.

해마다 맞는 계절이건만 가을은 늘 새로 오는 가을이다. 가을은 나로 하여금 자족의 지혜를 갖게 만든다. 장자가 〈호접몽〉에서 말한 지혜는 나와 너의 분별을 짓지 않는 것의 황홀경이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꾸다가 깼는데, 한동안 자신이 나비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꾸고 있는지 혼동 속에 있었다. 우주적 생명의 합창 속에서 장자와 나비는 하나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들, 나비가 장자 꿈을 꾼들 그게 무슨 대수랴! “살아간다, 이것으로 충분하다.”(횔덜린) 산책 나가서 만나는 한강은 유유자적 흐르고, 바람은 더없이 쾌적하고, 하늘은 맑고 광활하다. 폭염과 열대야에 지쳐 백상아리에 목을 물어뜯긴 채 바다 밑으로 추락하던 바다표범과 같이 무력하던 기분에서 벗어나면서 잃었던 식욕이 돌아오고, 책은 더 심도 있게 눈에 들어오고, 심드렁하던 고전음악은 훨씬 더 감미롭게 들린다. 내 혈관의 피들이 한결 순해진 느낌이다. 우울증은 옅어지고, 이웃을 더 관대하게 대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도 생긴다. 이게 다 도처를 청명함으로 채우는 가을의 선물들이다.

시인은 한 잎의 떨어짐에서 가을의 기척을 취한다. 이렇듯 자연의 사물을 동적으로 느끼는 한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것들이 숨긴 비밀과 미스터리를 느낀다. 한번 피어난 잎들은 조락을 맞고, 한번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 식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종말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오늘은 내일을 사는 사람에게 이미 과거가 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죽은 자에게 오늘의 삶은 전생이 되고 말 것이다. “해골의 눈으로 본다면 지금/이곳도 아득한 전생이 되고 말 것을”(〈시체는 차갑다〉)이라는 구절은 그런 부동의 사실을 전달한다.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의 전생을 사는 셈이다. 가을은 가을의 일들과 가을의 기척들로 가득 찬다. 이 금생의 가을, 거저 주어진 이 기적 같은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살아 있어야만 한다. 살아서 저 살아 있는 것들이 보내는 가을의 기척들에 귀를 기울여라!


김광규(1941~ )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대학교에서 독문학을 공부했다. 1975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하고, 지금까지 시집을 14권이나 펴냈다. 그는 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치다 정년퇴직을 했다. 그는 관망하는 중산층의 정서를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를 즐겨한 리얼리스트 시인이다. 그는 우리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3남4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는 시인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칠순 노시인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늙었고 이미/몇몇 형과 누나는 세상을 떠났다”(〈다섯째 누나〉)는 범상한 사실의 피력에도 쓸쓸함이 깃드는 것은 죽음의 기척에 대한 무언의 암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축약의 천재들이다. 이 노시인은 제 삶을 “폭설 30센티미터 내려 쌓인/영하 15도의 소한 추위 겪으며/2천만 대의 자동차 매연과/4천만 대의 핸드폰 소음 속에서/참으며 견뎌온/613,200시간/끔찍한 세월 오래 살고도/죽음이 두려운 나이”(〈종심(從心)〉)라고 축약한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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