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 문범강 조지타운대 회화과 교수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묘한 이야기로의 초대

문범강
1954년 서울 출생. 1993년 뉴욕 시그마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02년 일민미술관, 서울 스케이프갤러리 등 서울과 뉴욕에서 1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워싱턴의 캇젠아트센터, 프레이저갤러리, 스미소니언미술관, 로크빌 아트플레이스, 하워드카운티센터, 광주비엔날레, 플로리다 국제대학 뮤지엄 등에서 개최하는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8년 Bethesda Painting Awards에서 대상을, 메릴랜드 주 몽고메리카운티의 예술인문위원회에서 수상하는 Creative Project Grant를 수상했다. 2010년에는 메릴랜드 주 예술위원회에서 수여하는 Individual Artist Award in Visual Arts 상을 수상했다.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학의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황후애정행각기〉라는 기묘한 제목의 전시가 펼쳐졌다. 낯선 이야기에 대한 야릇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 전시의 주인공은 미국 내에서는 ‘BG Muhn’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중견화가 문범강이다. 그는 현재 워싱턴에 있는 조지타운대학교의 회화과 교수이기도 하다. 2010년 그는 〈춘자 시리즈〉라는 작품으로 전시를 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문범강은 매력적인 서양 모델들이 불승처럼 머리칼을 민 초상화를 그리고 나서 춘자·길자·옥자·순자 등의 제목을 붙였다. 〈춘자 시리즈〉의 영어 제목은 ‘American Enlightenment Series’다. 일반적으로 ‘계몽’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Enlightenment’라는 단어를 그는 ‘해탈’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니까 이 이름들은 요즘 한국에서도 쓰지 않는 일본식 이름이 아니라 노자·공자·맹자 같은 맥락의 이름인 것이다. 서구 여성을 모델로 삼음으로써 작가 자신이 누리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신, 문화적 특혜를 특정 지역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인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모델들의 기묘한 시선 덕분에 관람객은 해탈과 유혹 사이를 넘나드는 곡예를 해야 한다.

올해 선보인 〈황후애정행각기〉는 2010년 워싱턴의 아메리칸유니버시티뮤지엄의 캇젠아트센터에서 선보였던 전시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전시는 오프닝 당일 800여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하여 뮤지엄 사상 최대 인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중국 청나라 황후를 내세워 풀어나간 이야기는 관람객과 비평가 모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지나간 기억의 집적으로서의 개인, 그리고 인간이 이루어낸 문명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5년째 이 작품에 몰두해왔다. 그는 역사에 자신의 문학적인 상상력을 더해서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 신화는 그의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꿈속에서 그는 푸른 늑대, 청랑(靑狼)이 되어 자금성의 덕종융유황후를 등에 태우고 새벽이 오기까지 돌아다녔다. 덕종은 모친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젖이 모자란 상태로 자란다. 40대에 모친이 환생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가슴만 어루만진다. 그 여인이 덕종융유황후라는 이야기다. 덕종융유황후가 한번은 덕종의 어머니로, 다음에는 덕종의 아내로 태어났다는 상상은 동양의 윤회사상에 닿아 있다. 이런 가상의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문범강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행위는 축적된 기억과 컨트롤할 수 없는 기억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일견 매우 거칠어 보이는 이야기 속에서 그는 정화된 인간성의 회복을 꿈꾼다.

AE Series_ acrylic on canvas, 51x41cm, 2007
졸업 앨범처럼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도열해 있는 72점의 황후 초상화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중국 지방 관공서나 사당에 비치했던 목판화, 황후 전신상 오리지널 판화 12점을 구해서 얼굴 부분만을 채택해 이미지를 변화시킴으로써 그는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예컨대 사팔뜨기 눈을 한 황후는 권세가 집안의 딸이다. 권력의 힘으로 황후가 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삶이 행복했는지는 의문이다. 얼굴에 파리가 잔뜩 붙은 황후는 권력의 정점에서 어느 날 깨달았다. 황후가 되어도 삶은 덧없다는 것을. 그리곤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 눈물이 파리가 되어버렸다. 파리가 잔뜩 앉은 황후의 얼굴은 눈물 범벅의 슬픈 얼굴이었던 것이다. 잔혹동화와도 같은 그의 그림은 늘 삶과 죽음, 권력과 허무, 에로티시즘과 공포 등 양가적인 가치를 드러낸다. 미술 평론가 엘리노어 하트니(Eleanor Heartney)는 그가 “보는 이의 감각을 뒤흔들어놓는 문범강의 이미지는 그 기괴함으로 인해 오히려 신빙성이 부여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들에 “자오자대하는 내 마음, 응큼한 마음, 간교한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불충한 마음, 배신의 마음, 살해의 마음, 자비의 마음”을 모두 다 담아냈다. 그런데 이 감정들이 다 섞이고 나니 한 글자로 압축이 되었다. 바로 “비! 슬플 비悲”다. 푸른 늑대의 등에 올라 밤을 새워 달리는 황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살아 있다는 것의 깊은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 여인들의 표정이 낯설면서도 어쩐지 마음을 끄는 것도 이런 복잡 미묘한 슬픔이 표면에 기어코 떠오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어쩌면 “영문 없이 나돌아 다녔고 그리도 서럽”던 그의 젊은 날의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Lover - Empress Series
작가 문범강은 서강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했지만, 그것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강의실에서 보낸 시간보다 학교 밖에서 더 많이 있었고, 그곳에서 더 많이 인생을 배웠다.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긴 방황의 시간이었다. 이 시절 특별히 배우지 않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으로 간 지 8년 만에 그는 조지타운대 미술과 교수로 발탁되었다. 교수 한 명을 뽑는데, 미국 전역에서 수백 명이 지원하는 상황이었다. 학연도 지연도 없는 그곳에서 그의 실력과 열정이 통했던 것이다. 그는 교수가 되었다고 안주하지 않았다. 판화 전공으로 교수가 되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1992년부터 3년간 뉴욕에 가서 회화 공부를 했다. 조각을 위해서 용접을 배우기도 했다.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철저하게 파고드는 열정과 집념은 그를 지금으로 이끌었다.

She, Empress 01_ Acrylic on linen mounted on pressed wood, 41×31cm, 2012


She, Empress 02_ Acrylic on linen mounted on pressed wood, 41×31cm, 2012
5년간 집요하게 황후 시리즈를 그려나가는 과정은 생각을 실천하는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72번째 그린 황후의 얼굴에는 최첨단 문명의 흔적인 픽셀을 응용했다. 디지털 화면의 기초단위인 픽셀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한다. 예전 문명이 지리학적인 요건에 따라 국지적으로 발생했던 것과는 달리, 이 문명은 지구 전체에 동시적으로 발생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보편의 문명이 바로 ‘픽셀 문화’다. 디지털 세상의 가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전지구적 문화의 등장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끌어들이는 일은 2년간 다양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의 작업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2012년 들어 그린 작품에는 ‘시간 저편’ ‘쿠데타’ ‘디지틀 스킨’ 그리고 ‘스마트폰’ 등의 부제들을 붙였다. 이것들은 “앞으로 발생할 시각적 소요의 주모자들”이다. 이 새로운 문명의 진화를 그는 “인간성에 대한 문제의식, 의식의 진화 발전”과 연관시키는 것이 그의 예술적 과제다.

Empress on Blue Wolf_ Arcylic on linen, 292×216cm, 2009~2010


Lover - Empress_ Acrylic on Dura-Lar mounted on canvas, framed, 39.5×31.7cm, 2009


Blue Wolf Embracing Empress_ Arcylic on linen, 292×216cm, 2010
“한반도에서 태어나 동양사상과 서구 교육제도의 혼합체에서 성장”한 그는 미국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스승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서양인 스승들이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윤회와 동양적 사유에 관해서 말한다. 삶으로부터 분리된 사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추를 키우고 가꾸는 과정 같은 쉬운 예로 들며 생명의 순환에 관해 이야기한다. “순환・환생 이 과정이 생명이다. 이게 과학이다. 윤회가 힘든 것은 ‘내’가 결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떼어놓는다. 전체로 보면 모든 것은 죽고 태어나고를 그저 반복한다.” 이런 삶과 죽음의 순환 과정을 직시하는 동시에 치유의 기능을 갖기 때문에 예술은 궁극에 있어서는 종교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죽음을 삶의 단절로 이해하는 서구적인 세계관에서는 낯선 말처럼 들리지만, 공존과 순환을 중시하는 생각은 21세기 전지구적 문제에 직면해서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윤회・환생 등은 물론 그 자신에게도 매력적인 개념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그리고 지금은 낯선 미국 땅에서 화가가 되어 중국 황후를 그리는 문범강.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내가 이런 일을 할까?” 필연적으로 그를 거기까지 데리고 온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침에 눈뜨고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 살아 있구나. 이 짓거리하다가 휙 그냥 가도 괜찮은 짓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그는 말한다. ‘화가’-이것이 그가 세상에서 부여받은 업무다. 한 지구인으로서 그는 오늘도 작업실에서 업무 수행에 “진골로 파고들고” 있을 것이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08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